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세개)

원세개의 공일증(恐日症)

중은우시 2018. 10. 11. 16:13

글: 정만군(程萬軍)


1894년, 대청 주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대신 원세개는 이미 한성(서울)에 산지 12년이 되었다. 그는 아마도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이 갑오년을 맞이하면서, 조선에서의 좋은 시절이 끝나게 될 줄은.


세상에 끝나지 않는 연회는 없고, 지지않은 위풍은 없다. 하물며 몰락한 제국의 대표임에야. 상대방의 10년전 도광양회는 10년후에 그를 찾아왔다.


진정한 힘겨루기는 곧 시작될 것이다 원세개의 천적이 곧 도착할 예정이다.


그는 바로 일본의 신임 조선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이다.


오토리 게이스케. 그는 일본에서 유명한 강경파이다. 1833년에 태어났고, 일본 효고현(兵庫縣) 사람이다. 부친은 의사이다. 그는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웠고, 나중에 난학(蘭學)을 배워 서양학자로 자처했다. 전후로 막부에서 번역교두를 지냈다가 나중에 메이지정부에 투항한다. 오랫동안 메이지정부의 외교관을 맡는다. 그리고 공부대학교장 겸 학습원장이 된다. 나중에는 화족(일본황족)여학교 교장이 된다. 저서로는 <남가기행>과 병학 저작이 있다. 그의 일본에서의 역사적 지위는 중국의 채원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원세개에 비하여, 이때의 오토리 케이스케는 이미 환갑의 나이를 바라보았으니 노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담략을 논한다면 노인이지만 전혀 뒤쳐지지 않았다. 원세개는 오토리가 태어난 후 26년이 지난 1859년에 태어난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원세개의 부친은 부호이고, 숙부는 고관이다. 관직이 조운총독에 이른다. 그래서 원세개도 부자고관자제라 할 수 있다. 그는 어렸을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과거의 길은 포기하고 군대에 들어가서 성공을 거둔다. 평생 그럴듯한 책 한 권을 남기지 않았고, 학식에서는 선배들에게 많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담량을 다투는데, 누가 더 크고 누가 더 작을까?


원세개와 오토리 케이스케는 모두 양국의 대표적인 매파라고 할 수 있다. 소위 매파는 최소한 표면적으로 보기에 담량이 적지 않다. 반드시 용맹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면 누가 더 용맹한지 누가 진짜 영웅인지 드러나게 될 것이다.


두 매가 싸우면 결과가 어떻게 될까?


검증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원세개의 복지(福地)인 조선에 다시 사건이 발생한다.


1894년 4월 25일, 조선에 동학혁명이 일어난다. 소위 동학은 바로 조선의 종교조직이다. 동학은 발전하여 정치집단이 된다. 주요 구성원은 농민이다. 동학혁명은 바로 정치종교조직이 일으킨 농민반란이다. 그 성격은 청나라말기의 홍수전의 태평천국운동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동학조직의 민간에 대한 영향력은 컸다. 혁명초기에 만명의 무리가 금방 십만으로 늘어나고 전국에서 불길이 일어난다. 혁명군은 조선반도의 서남문호인 전라도의 수부 전주성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전쟁의 불길은 전국으로 번져갔다. 혁명군이 수도 서울로 쳐들어 오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같은 해 6월 1일, 불안해진 조선왕실은 원세개와 청정부에 난을 평정해줄 것을 요청한다.


국면을 한동안 따져본 원세개는 최종적으로 병력을 증강시켜 간섭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이것이 종주국의 책임을 다할 기회라고 여긴다. 그는 청너라조정에 전보를 보내어 조선국왕이 출병을 요청했다는 소식을 전할 때, 자신의 간섭이유를 내놓는다: "만일 윤허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 사람이 기꺼이 하게 될 것이니 중국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는 물리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만일 출병하지 않으면 조선국면은 통제력을 상실하여 더 이상 청나라조정의 수중에 있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청나라조정에 조선에 출병할 것을 건의한다. 수륙으로 함께 조선에 진군하여 난을 평정하자는 것이다.


청나라조정은 원세개의 건의가 이치에 맞는다고 보고, 오월말 조선에 출병시킨다. 회군(淮軍) 장령 섭지초(葉志超)로 하여금 청군 2천여명을 이끌고, 조선의 아산(牙山)에 상륙하게 하여 동학혁명을 진압한다.


원세개는 청나라군대가 오기만 하면 조선의 농민반란군은 금방 와해될 것이고, 국면은 금방 통제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원세개는 모르고 있었다. 당랑포선(螳螂捕蟬) 황작재후(黃雀在後). 농민군은 상대하기가 쉽지만, 침략군은 호랑지사(虎狼之師)이다. 이때 10년간 옹크리고 있던 일본은 이미 중국이 조선을 통제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천진전약>이 체결된 후, 일본은 조선에 순조롭게 침투해 들어온다. 그리고 계속하여 국가의 군사력을 키웠다. 6월 3일, 원세개는 조선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는 정식공문을 받는다. 이어서 조약규정에 따라, 일본측에 전보로 통지한다. 그러나 일본은 가만히 있으면서 아무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일본의 반응에 대하여, 원세개의 판단은 이러했다: "현재 일본은 국내에 일이 많아서, 설사 일본이 출병한다고 하더라도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기껏 백여명의 병력을 파견하게 될 것이다. 청나라의 출병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확실히, 이는 옛날식의 사고에 따른 심각한 오판이다. 그후 청나라조정과 원세개는 오판의 댓가를 침중하게 치르게 된다.


일본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일본군은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도전(賭戰)에 능하다. 기습,급습을 잘 한다. 이 특징을 이번에 원세개도 맛보게 된다.


오토리 케이스케는 움직였다. 그는 원세개에게 한방 먹인다.


1년전, 1893년 7월 조선공사로 부임한 오토리 케이스케는 일찌감치 이 날을 기다려 왔다. 6월 9일, 휴가를 가장하여 귀국한 오토리 케이스케는 "팔중산호(八重山號)" 군함을 타고 몰래 인천으로 돌아온다. 수행인원에는 70명의 일본해군육전대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인천에 정박하고 있던 5척의 일본선박과 회합하여 임시로 각 함선에서 뽑은 해군대원으로 선발대를 주직한다. 총인원 488명이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다음날 아침 일찍 한성으로 출발한다.


며칠 후, 일본은 다시 인원으 계속 증원한다.


일본이 대거 증원은 청나라조정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6월 15일, 청일양국의 조선주둔 최고대표자인 원세개와 오토리가 회담을 한다. 여기에서 "쌍방은 더 이상 병력을 증원하지 않는다"는 구두합의를 달성한다. 다만, 오토리 케이스케는 구두합의를 지키지 않는다. 명수잔도 암도진창의 수법으로 계속 병력을 증원한다. 6월 30일, 일본의 혼성부대 제2차부대가 상륙한다.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대는 이미 8천명에 달했다. 조선에 상륙한 청나라군대 2천명과 비교했을 때 우세가 확실했다.


이제 일본군은 전투준비를 한다. 오토리는 대결전을 펼칠 시기가 도래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원세개와 철저히 안면을 바꾼다. 7월 12일, 대외적으로 '청일간의 조정이 실패했다"고 선언하고, 일본내각에 보고하여 "즉시 실제행동을 개시할 것"을 요청한다.


이 때, 원세개는 일이 잘못되고 있다고 느낀다. 대국을 만회할 수 없다고 여긴다. 아마도 자신이 조선에서 12년간 있으면서 강경한 행동을 보여, 그를 뼛속까지 미워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조선의 조야에서 그에게 복수할 것이라는 걱정이 있었다. 좌불안석의 원세개는 초조해하기 시작한다. 연속 며칠간 청나라정부에 전통을 보내어, '일본에 포위된' 곤경을 얘기하며 귀국을 요청한다. 청나라조정은 처음에 윤허하지 않았지만, 원세개가 계속하여 보고서를 올리며 중병이 들었다고까지 말하자, 마침내 청나라조정은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청일간의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1주일전에 원세개를 귀국시킨다. 7월 18일, 대사면을 받은 듯이 원세개는 행장을 꾸려서 배를 타고 한성을 벗어난다.


7월 20일, 일본이 바다와 육지로 나란히 진격한다. 같은 날, 오토리 케이스케는 조선왕실에 최후통첩을 보낸다. "중국과의 조약을 폐기하고 중국군대를 축출하라"고 요구한다. 3일내에 답변하도록 기한을 정한다. 7월 23일 영시, 시간이 다 되었는데, 조선왕실에서는 회신이 없었다. 오토리는 일각도 기다리지 않고 왕궁부근에 배치한 혼성여단으로 하여금 왕실을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조선왕궁수비대는 일본군의 진격에 극력 저항해 보지만, 금방 각 성분으로 진격하는 일본군에 무너진다. 새벽 6시경, 일본군은 조선왕궁을 점령한다.


7월 25일, 일본은 조선정부를 해산하고, 조선국왕 이희(李熙)를 연금한다. 그리고 이희의 생부인 대원군으로 하여금 섭정하게 한다. 대원군은 일본이 시키는대로 하였다. 일본의 지시에 따라, 조선과 청나라의 조약을 폐기하고, 청나라와의 종번관계도 해제하며,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다. "조선은 자주국이며 더 이상 조공을 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사료에 따르면, "이때부터 조선의 정령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일본이 장악하게 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일본에 통제된 조선은 '독립'을 선언하는 동시에, 일본에 '위탁'하여 아산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을 축출하도록 한다. 같은 날, 일본군은 선전포고없이 공격을 개시하여, 아산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군대에 공격을 개시한다. 청일간의 갑오전쟁이 정식 발발한 것이다.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아산의 청군은 바로 궤멸한다. 섭지초는 도망친다.


섭지초와 비교하면, 원세개는 더 빨리 도망친 셈이다. 조선의 한성에서 본국의 북경으로 귀국한 원세개는 이때부터 일본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바뀐다. 청일전쟁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는 주전파에서 주화파로 변신하여, '의화단(議和團)'의 주요 구성원이 된다. 귀국후의 그는 조정에 조선의 상황을 보고하고, 의견서를 쓴다. 거기에서 적은 강하고 아는 약한 현실을 얘기하고, 일본군이 이미 우세를 점했으며, 청군이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고 말한다. 할 수 없이 압록강변으로 철수하여 지키고, 조선은 일본이 점령하게 버려야 한다고 한다. 


신일본과 일본의 신사인(新士人)에게 원세개는 완전히 고개를 숙인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의 휘황한 역사를 기술하면서 오토리 케이스케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종군기자인 사토 데츠지로(佐藤鐵治郞)는 <원세개전>에서 오토리의 이런 호언장잠을 적고 있다: "청나라는 내가 출병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우리나라가 군대를 정비해서 기다려온지 오래된 줄을 모르고 있었다." 일본의 전쟁준비는 이미 오래 되었고, 이 시각을 기다려 온 것이다.


적수인 청나라조정관리에 대하여 오토리는 나름대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청나라조정은 "자감우루(自甘愚陋)"하여 "아무런 감각이 없는 관리들을 만들어 냈다" 이런 구관료들이 어찌 일본의 신엘리트에 상대되겠는가.


아마도 어떤 독자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일본고관으로서 왜 오토리는 청나라관리에 대하여 이렇게 이해했을까?


그의 이력을 조사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원래 일찌기 조선으로 가기 전에, 오토리는 청나라에 5년간 살았었다. 그는 유명한 중국통이다. 1889년 6월 3일, 오토리 케이스케는 일본정부에 의하여 주청국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된다. 청나라에서 일한 5년동안, 오토리는 청나라정부의 부패와 사대부의 무능을 손바닥보듯이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을 멸시하는 선입견이 생긴다. 그는 그렇게 대중국 강경파인 일본의 대표적 매파가 된다.


전략적으로 청나라를 경시한 오토리 케이스케는 전술적으로는 아주 신중했다. 그는 청나라에 대하여 손을 쓰기 전에, 대량의 자세한 정보업무를 진행한다. 일본정부를 도와 청나라의 국정에 대하여 조사하여 일본정부가 의사결정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은 유학 혹은 시찰을 명목으로 청나라에 가서 조사를 진행했다. 청나라의 바닥까지 알고 난 후에 이 이웃나라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치게 된다. 그리하여 극력 본국정부로 하여금 청나라와 결전을 벌이도록 선동한다. 이를 위하여, 그는 많은 병서, 전략서적을 저술하다. 전후로 <투청책안(鬪淸策案)>, <청국정토책안(淸國征討策案)>, <인방병비략(隣邦兵備略)>, <진인방병비략표(進隣邦兵備略表)>, <군비의견서(軍備意見書)>등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런 말이 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오토리는 이미 대청의 바닥까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세개와 조선에서 싸울 때, 독사와 같은 영민함과 공격력을 드러낸다. 친히 병력을 이끌고, 신속하게 조선왕궁을 점령한다. 항상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기만 하던 원대인은 편안하게 사는데 익숙해져서 반응속도나 판단력이 많이 느려져 있었다. 오토리와 비교하면 하수였다.


<청광서조중일교섭사료>와 <일본외교문서>에서는 모두 양국대표가 조선에서 어떻게 했는지를 대비하고 있다. 오토리 케이스케는 먼저 도광양회의 계책을 쓰고, 나중에 섬전기습을 시행하여 일본이 대청에 완승을 거두도록 기선을 제압하여 만점을 받는다. 그러나 그의 적수인 원세개는 진퇴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점수로 따지면 불합격이 된다.


청일전쟁때 원세개의 큰 과실은 형세를 오판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조선사건으로 일어난 청일전쟁은 발단이 아편전쟁과 비슷하다. 오판으로 인해서 벌어진 전쟁이다. 아편전쟁의 오판자는 임칙서라면, 청일전쟁의 오판자는 원세개이다. 청나라조정은 바로 원세개의 "일본은 청나라의 출병에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오도하에 군대를 조선에 보내어 난을 평정하였고, 이로 인하여 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발발한다.


여기서 언급해야할 점은 오토리 케이스케에 대하여 원세개는 경적필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중국에서 어떻게 했는지를 원세개는 들어서 알고 있었고, 거리낌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오토리가 한성에 온 것은 분명히 속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초 오토리와 전임 일본의 주조선공사의 교체때 원세개는 조선왕실에 극력 반대의견을 표시한 바 있다. 오토리가 조선에 공사로 오는 것을 극력 막으려 했다. 원세개는 오토리의 조선공사부임을 막고, 일본군의 한성진입을 막는데 많은 외교적 노력을 했다. 그는 화를 미연에 방지하려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자신감이 없었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사태의 발전은 원세개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오토리 케이스케는 그래도 왔고, 그가 온 것은 원세개에게 천적이 나타난 것이다. 마침내 청나라말기의 이 용병의 간웅은 근대화전쟁에서 유약함을 드러낸다. 누가 알았으랴 원세개는 1881년 22살때 군대에 들어간 이후 남다른 지혜와 용맹으로, 크고 작은 전투에 참전하면서 한번도 패전을 한 적이 없었다. 1894년에 이르러 조선에서의 패배는 34살의 원세개 평생 첫번째 패전이다. 그리고 그는 전쟁전에 도망쳤다. 져도 부끄럽게 진 것이다. 이 평생의 첫패배는 일본인이 그에게 안겨주었다. 아마도 각골명심했을 것이다. 그는 중국 사대부를 대표하여 일본 사인(士人) 오토리 케이스케와 대결했지만, 그것은 중국사대부가 일본신사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다.


이때부터 아마도 원세개는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다. 십년하동, 십년하서. 세상은 바뀌었다. 일본은 이미 옛날의 일본이 아니다. 탈태환골한 일본인의 아에, 알아서 기는 것이 옳다. 그리하여 그는 심각한 '공일증'을 앓게 된다. 그는 이후 다시는 일본과 전투를 벌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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