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투원(套元)
1913년 11월 4일, 북양군경(軍警)이 대거 출동하여, 국민당 본부를 포위하고, 중화민국 대총통 원세개가 서명한 대총통령을 읽었다. 반란의 죄명으로 국민당을 해산하고, 모든 국민당 소속의 의원과 가족은 즉시 북경을 떠나라는 것이다. 이 소식이 나오자, 북경성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각 기차역과 교통로에는 국민당 소속의원과 가족들이 북경을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국민당은 도대체 무슨 일을 겪은 것인가? 일찌기 최대의 당이 왜 졸지에 해산당하게 되었는가.
1. 송교인(宋敎仁) 암살, 국민당의 명성에 금이 가다.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애신각라 부의는 퇴위조서를 반포하고, 봉건왕조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손중산을 대표로 하는 혁명당과 북양군벌의 영수인 원세개는 함께 중화민국정부를 구성하고, 원세개가 손중산의 뒤를 이어 임시대총통에 오른다.
이때의 중화민국은 합작건국시기였고, 일시에 각종 당파가 우후죽순으로 출현한다. 동맹회의 창시자이자 주요지도자중 한명이었던 송교인은 동맹회를 기초로 다른 당파의 구성원들을 흡수하여 1912년 8월 25일 당시 중국에서 인원수가 가장 많고, 규모가 가장 큰 정당인 국민당을 결성한다. 송교인은 이사장을 맡고, 손중산을 대리하여 당무를 주재한다. 1913년 2월 진행된 국회선거에서 국민당은 다수의석을 차지한다. <중화민국임시약법>의 규정에 따르면, 송교인이 중화민국 내각총리를 맡을 터였다.
1913년 3월 20일 저녁, 송교인은 황흥(黃興), 요중개(廖仲愷)등 국민당의 주요 요인들과 상해북쳑에 도착하여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경으로 가서 내각을 조직하기 위해서. 그런데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몇번의 총소리가 울렸고, 송교인이 총탄에 맞고 쓰러진다. 일시에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서 사방으로 흩어졌고, 암살자도 그 틈을 타서 도망친다. 우우임(于右任)등 동행한 몇 사람은 금방 송교인을 병원으로 보내 응급조치를 하지만, 그를 살려내지는 못했고, 송교인은 22일 사망한다. 송교인의 죽음은 당시의 국민당에 있어서, 엄청난 손실이었다. 일시에 국민당은 군룡무수(群龍無首)의 상태가 되었고,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국민당의 해산을 주장했다.
내각총리가 암살당해 사망했다는 엄청난 소식은 각 신문과 잡지에 실린다. 신문매체의 대거 선전하에 송교인암살에 관한 보도가 계속되었고 전국은 소란스러워진다. 사회각계의 압력하에, 상해순포도 서둘러 밤을 새워 흉수를 찾는다. 그리고 마침내 3월 23일, 흉수 무사영(武士英)이 상해청방의 두목 응기승(應夔丞)의 지시를 받아 송교인을 암살했다고 발표한다. 그리고 응기승은 국무총리 조병균(趙炳鈞)과 내무부비서 홍술조(洪述祖)로부터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안을 수사하던 초기 국민당을 위주로 하는 일부 사람들은 주관적으로 원세개가 막후주모자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원세개와 송교인은 정치체제방면에서 이견이 컸기 때문이다. 국민당이 국회선거에서 성공함으로 인하여 원세개가 지지하는 총통제가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원세개가 사람을 시켜 송교인을 암살했다고 의심했다. 그들은 대거 신문에 글을 실어 격렬한 어조로 원세개를 공격하고 비난한다. 예를 들어, 국민당원인 서혈아(徐血兒)는 <민립보(民立報)>에 글을 실어 이렇게 주장한다: "송선생의 죽음이 총통제 및 혼합내각제를 주장하는 자들이 시켰다고 감히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반드시 평민에 반대하는 자들에게서 나왔음은 단언할 수 있다." 비록 직접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그 뜻은 아주 명확했다. 그러나, 국민당에서는 직접적인 증거를 내놓을 수 없었다. 이런 글과 추측만으로는 원세개가 막후주모자라고 지목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대중의 여론은 동정심과 정의감으로 국민당을 지지했다.
사건수사가 진전되면서, 조병균과 홍술조 두 사람이 수면 위로 나타난다. 대중의 여론은 대국을 고려하여, 여기에서 끝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다은 이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언론은 더욱 과격해지고, 여론의 반대에 부닥친다. 그중에는 중간파에 속하는 <대공보(大公報)>까지 나서서 신문에서 국민당을 질책했다: "막수유(莫須有, 남송에서 악비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때 쓴 말)의 세 글자로, 사람을 죄인으로 모는 것은 쌍방간의 악의를 도발할 뿐아니라, 더더욱 민국의 앞날도 파괴한다." 사회여론은 원세개를 동정하기 시작했고, 국민당이 송교인암살후 막무가내로 원세개를 공격하는 거동은 결국 사회안정을 원하는 중간파들의 분노를 산다. 그리하여 국민당의 사회에서의 명성은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한다. 이는 이후 원세개와의 정권투쟁에서 줄줄이 패배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2. "2차혁명"의 실패, 국민당의 군사역량이 크게 손상을 입는다.
송교인암살후, 내각제를 확정하고 내각을 구성하는 일은 흐지부지된다. 원세개는 대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자신의 독재를 다지기 시작한다. 원세개의 독재를 저지하려는 최대의 적수는 국민당이었다. 이때 국민당을 지지하는 역량은 비록 계속 쇠퇴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강서, 안휘, 광동의 몇개 성을 손아귀에 장악하고 있었다. 국민당을 소멸시키려면,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이 몇개 성의 군사역량을 소멸시키거나 장악해야 했다.
원세개는 먼저 신해혁명 사후처리를 명목으로 심복인 주자제(周自齊)를 중국을 방문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은행단과 만나 그들과 차관문제를 협의하게 한다. 그후 일본, 러시아가 가입하고, 미국은 빠진다. 원세개는 최종적으로 관세, 염세를 담보로 하여, 5개국으로부터 2,500만파운드(실제수령한금액은 900여만임)의 차관을 도입한다. 원세개는 이 돈을 대부분 군사비에 투입한다. 그리하여 원세개의 군사력이 크게 증강된다. 5개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는 동시에, 원세개는 병력을 남하시켜, 임시대총통의 명의로 원세개의 차관도입에 반대하는 강서도독(江西都督) 이열균(李烈鈞), 안휘도독(安徽都督) 백문울(柏文蔚), 광동도독(廣東都督) 호한민(胡漢民)을 파면하고, 1913년 7월 북양제6사단을 강서에 진주시킨다.
국민당쪽을 보면, 비록 3월 26일 손중산이 일본에서 상해로 돌아왔고, 1913년 4월부터 6월까지 상해에서 3차례에 걸쳐 군사회의를 소집하여, 원세개를 무장토벌하여 독립을 선포하는 일에 착수했지만, 국민당내부에서 이때 다수가 "법률도원(法律倒袁, 법률로 원세개를 타도한다)"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무장토벌노선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7월에 이르러, 원세개가 병력을 움직이자, 비로소 국민당 내부에서 일부 행동이 개시된다. 파면된 이열균은 손중산의 지시하에 강서에서 병력을 이끌고 원세개의 군대에 대항하며 "2차혁명"을 일으킨다. "무력도원(武力倒袁)"의 기치를 내걸고 독립을 선언한다. 그후 강소, 호남, 사천등지에서 속속 호응을 받아낸다.
그러나, 국민당의 대응은 이미 늦었다. 5국은행의 차관을 얻은 북양군은 이때 실력이 급증해 있었고, 게다가 각각의 독립성들은 합심하여 원세개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호남, 사천이 독립을 선언할 때, 강서와 강소의 토원군(討袁軍)은 이매 패전했다. 그외에 민중들은 평화를 갈망한지 오래되어, "2차혁명"에서 속속 원세개의 편에 서게 된다. 국민당의 "2차혁명"은 금방 실패로 끝난다. 남방7성에 대한 통제권을 모조리 상실한다. 그리고 장악하고 있는 군사력도 얼마 남지 않았다. 손중산, 황흥등은 할 수 없이 다시 일본으로 도망친다.
3. 총통선거에 실망하여, 분노로 국민당을 해산시킨다.
원세개는 국민당과의 권력쟁탈과정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우세를 점했다. 그리하여 원세개는 정식으로 대총통에 오르고자 했다. 그는 하루빨리 대총통에 오르기 위해, 특별히 천진에 구금되어 있던 저보성(褚輔成)등 8명의 의원을 협박하여 연명으로 국회에 서신을 보내 하루빨리 총통선거를 진행하자고 요구하게 한다.
1913년 10월 6일, 중화민국의 총통선거가 중의원(衆議院)에서 거행된다. 원세개는 특별히 만명이상의 경찰과 민중을 동원하여 중의원 주위를 에워쌌다. 이를 통해 자신이 백성들의 옹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러나, 제1차선거에서 원세개는 비록 반수이상의 표를 얻기는 했지만, 다른 경쟁상대방들과 마찬가지로 법정정족수인 3/4에는 미달하여, 대총통당선조건을 갖추지 못해 무효가 된다.
제2차경선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아무도 3/4이라는 법정정족수에 도달하지 못했다. 제3차선거는 앞의 두번과 달리 최다득표자 2명만 남는다. 즉 원세개와 여원홍(黎元洪)이다. 원세개는 여원홍을 300여표차이로 이기고 대총통에 당선된다. 그러나 원세개의 심복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축하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날의 부총통선거에서는 총통선거와는 전혀 다르게 여원홍이 1차선거에서 법정정족수의 표를 얻어 당선되고, 전체 의원으로부터 열렬한 축하를 받는다. 이 모습은 원세개를 분노하게 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은 국민당이 그를 반대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왜냐하면 중의원에는 국민당 소속의 의원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국민당과 국회를 해산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원세개는 비록 군벌출신이지만, 권모술수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직접 국민당을 해산하면 여론의 욕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직접 손을 쓰지 않고, 당시 국무총리였던 웅희령(熊希齡)의 손을 빌어 국민당을 제거한다. 원세개는 먼저 전국 각성의 군민 양장관에게 전보를 보내, 국민당이 선거를 교란시켰고, <헌법>초안은 국정에 적합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5일내에 의견을 회신하라고 요구한다. 이들 관리들은 대다수가 원세개의 부하였고, 자연히 회신에서 국민당을 욕하면서 국민당을 해산하라고 요구한다. 그후 이열균과 국민당의원간에 오고간 수십통의 비밀전보를 압수한 것을 이유로 하여, 국민당이 반란에 참여했다고 하여 웅희령에게 국민당해산을 명령하도록 요구한다. 웅희령과 다른 내각구성원들을 압박하여 서명하게 한 후, 원세개는 11월 4일, 공개적으로 국민당해산과 국민당소속 의원의 자격박탈에 관한 명령을 발표한다. 중화민국의 최대당파로서 국민당은 결국 원세개와의 투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북경의 길거리에서는 국민당원과 가족들이 황급히 북경을 떠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국민당의 해산으로 내부는 사분오열되었지만, 그래도 일부 사람들은 계속하여 혁명을 추구했고, 그들중 다수는 손중산의 소집에 응하여 1914년 7월 일본동경에서 중화혁명당을 성립시키고, 1919년 10월 10일 조직개편을 통해 중국국민당이 된다.
결론
국민당이 해산된 것은 결국 송교인암살사건에서 지나치게 과격한 반응을 보인 것과 "2차혁명"에서의 실패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전에 축적해놓았던 사회적 명성과 군사역량을 모두 잃게 되고, 원세개와의 싸움에서 연이어 패퇴하면서 결국 정치적 입지를 상실한 것이다. 민국초기 각 정치세력의 권력다툼으로 국가는 혼란한 전쟁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국가제도건설은 지지부진했기 때문에 나중에 원세개가 복벽하여 황제를 칭하고, 후기 북양군벌간에 혼전이 벌어지는 화근이 된다. 그리고 민국초기의 헌정국면은 붕괴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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