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시화(施化)
무엇이 원한인가? 의학적인 해석에 따르면, 원한은 사람의 엄중한 정신병리상황하의 핵심정서이고, 심각한 인격장애, 도착 및 기능성 정신명이다. 원한은 분노에서 나온다. 본노는 일종의 초보적인 정서이고, 공격성이 핵심이다. 심각한 정신병리학에서 원한은 직접 자신과 타인에 대한 압도적인 지배로 바뀌게 된다. 원한은 일종의 유해한 정서이며,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불량정서를 모두 포괄한다. 예를 들어, 질투와 혐오이다.
원한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그것은 대뇌사고의 산물이 아니다. 이성이나 지혜와는 관계가 없다. 다음으로, 통제불능성이다. 원한는 대뇌의 지배를 받지 않으므로 일단 폭발하면, 고삐풀린 야생마와 같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 다음으로, 정서관리라는 각도에서 보자면, 원한은 의심의 여지없이 저급의 유해한 정서이다.
다만, 원한은 결국 인간고난의 최대 근원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듣자마자 반대할 것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자본이야말로 인간고난의 최대근원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어떤 사람 어떤 나라에서는 일단 돈만 가지면, 자랑하면서 마음대로 침범하고 온갖 나쁜 짓은 다한다. 그것이야말로 인류의 모든 고난의 근원이다. 어찌 원한을 애기할 수 있겠는가? 원한이 나타나는데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 아무런 이유없는 사랑도 없고, 아무런 이유없는 원한도 없다. 원한에 대하여는 이해해 주어야 한다. 나는 믿는다. 이런 관념을 가진 중국인들이 절대 소수가 아닐 것이라고.
소수의 돈을 많이 가지고 베풀지 않는 부자가 있다는 걸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주 사회에 위해를 끼친다. 다만 비교하자면, 이런 위해는 원한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돈있는 사람의 위해는 기껏해야 불법불공이다. 세력을 믿고 남을 못살게 구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사법의 한계선을 넘어서게 되면 그것은 범죄가 된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범죄가 오랫동안 지속되도록 용인하지 않는다. 범죄행위에 대하여 일단 처벌을 받으면 엄격히 제한되고 범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잘 보이지 않고, 분명히 잔인하기 그지없는데, 절대정의로 보이는 원한은 처벌도 받지 않고, 제지도 받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최대의 위해이다. 원한이 축적되어 일정한 수준이 되면, 산사태, 쓰나미처럼 사회의 모든 구석구석으로 밀어닥쳐 모든 문명이 창조한 부를 파괴하고, 모든 살아있는 생명을 찢어발길 것이다. 그때가 되면, 위해가 보이더라도 이미 늦었다. 원한이야말로 인류최대의 고난의 근원이다.
나는 유화에서 그리스의 복수의 여신을 보았다. 그녀는 에리니에스라고 부른다. 즉 검은 밤의 딸이다. 키는 크고, 눈은 핏빛으로 붉으며, 머리카락 사이에는 독사가 꿈틀거리고 있다.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한 손에는 뱀을 꼬아만든 채찍을 들고 있다. 무릇 그리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미녀 헬레나를 잃고 정적을 향해 복수하기 위해 두 나라는 여러 해동안 전쟁을 벌이고, 십만명이 죽었다는 것을.
<히틀러의 자원처형자들>의 미국작가 다니엘 골드하겐은 이런 점을 발견했다: 보통의 독일인의 유태인에 대한 원한이 충만했다. 이런 원한은 당의 강령에서 나왔을 뿐아니라, 일종의 감정적인 원한, 심리적인 원한이다. '유태인은 비열하다 .유태인은 사기꾼이고, 나쁜 놈이다; 유태인은 독일의 적이다. 그들은 독일의 생존을 위협한다, 유태인은 사탄이다...." 바로 이런 원한때문에, 천만에 이르는 히틀러의 자원처형자들이 만들어졌다. 수백만의 수용소유태인을 처형한 사람은 히틀러 본인도 아니고, 그의 막료도 아니며, 보통의 하층독일시민이었다.
미국의 "911"테러참극의 배후에서 이를 추진한 직접적인 원인은 역시 원한이다. 원한외에 무엇이 자살식공격을 감행하는 테러리스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지 상상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끊이지 않는 유혈충돌도 근본적인 원인은 원한이다. 하마스의 기습살륙이건, 이스라엘무장의 소탕작전이건, 모든 새로운 충돌은 모두 새로 오랫동안 축적해온 원한을 한층 더 쌓게 된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낭패하게 철군했고, 이는 세계반테러전쟁의 실패를 의미한다. 모든 테러리스트두목을 죽여버리더라도, 근본적으로 원한을 해결할 열쇠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쌍방은 그저 영원히 서로에게 원한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더 많은 육체를 소멸시켜도 원한이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원한은 가중되기 때문이다.
전세계인구의 4분의 1을 점하고 있는 중국은 원한의 역사를 따지더라도 매우 오래 되었다. "중국특색"의 원한은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보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때가 도래하지 않은 것이다." 중국고대의 군주는 세계 다른 민족에게는 절대로 없는 '연좌'를 만들언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먼 친척,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까지 모조리 죽여버렸다. 왜냐하면 장래에 복수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지난세기의 어떤 시기에 중국인은 나이나 성별, 당파신앙을 불문하고, 모두 어느 정도 원한에 빠져 있었다. 전란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나 개인이 성장했던 평화시기에도 원한은 항상 우리가 성장하는 것과 함께 했다. 이때의 원한은 "계급원한, 민족원한"이라고 했었다.
나는 7살때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머리 속에는 첫번째 원한이 기억되어 있다. 소영웅 류원쉐(劉文學)은 어린 나이에 고추를 훔치다가 지주의 손에 죽는다. 원한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 사회에서 내가 기억해야할 원한은 계속 증가하고, 계속 이어졌다. 지부반괴우(地富反壞右, 지주, 부자, 반혁명, 나쁜놈, 우파), 미장비특(美蔣匪特, 미국과 장개석의 스파이), 미제국주의, 일본군국주의, 인도반동파, 나중에는 소련수정주의, 반동학술권위, 흑육류(黑六類, 위의 지부반괴우에 자본가를 추가한 것), "516분자"(북경의 516홍위병의 극좌집단), 현행반혁명, 당내주자파, 현대공노이(現代孔老二, 공노이는 공자를 가리팀), 임표, 사인방....아직 다 크지 않은 아이가 이렇게 많은 원한을 가지다니, 소화시킬 수 있겠는가? 어린 마음 속에, 많은 원한이 채워지며나 애정을 담을 공간이 얼마나 남아있게 될까?
반평생, 내가 듣고 본 본국동포가 받는 고난은 대량의 억울하게 죽은 토지개혁때의 부유농민, 도시점포주, 지식분자, 과학기술엘리트, 문학가, 예술가, 고중저층 당원간부를 포함하여, 모두 원한때문이 아닌 경우가 없다. 그것은 일부러 선동한 원한이다.
한번 물어보자. 만일 육체가 소멸되고, 정신이 고통받고, 재산을 모두 빼앗기는 것을 고난이라고 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또 무슨 고난이라고 말한 것이 남겠는가. 사실은 증명한다. 원한은 바로 모든 고난의 가장 큰 근원이다.
개혁개방40년은 중국민족사상 원한을 가장 적게 전파했던 시기이다. 또한 경제발전이 가장 빨랐던 연대이다. 그 대표적인 말은 바로 장쩌민총서기의 "민성발대재(悶聲發大財, 소리내지 않고 큰 돈을 벌다)"이다. 대다수 중국인들은 이 40여년간 더 많은 부를 쌓았고, 고난은 없었다. 원한과 고난의 밀접한 관련성은 여기에서도 증명된다. 그러나, 최근 들어 대량의 폭력사건이 빈발한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쑤저우 후여우핑(胡友平)여사의 순직안이다. 이 모든 것은 전혀 감추는 것없이 세상사람들에게 말해준다. 원한은 부의 증가로 사라지지 않는다. 심지어 반대로 말하자면, 지난 10년간, 원한의 증가속도는 계속 가속화되었다. 특히 경제가 부진한 오늘날, 인간관계는 특히 긴장되고 있다. 최근 들어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인기슬은 제목이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늦지 않다> 노골적으로 네티즌들에게 일본에 대한 원한을 선동하는 것이다. 읽고나면 전율이 돋지 않을 수 없다.
조금만 분석해보면 정상인이라면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양심을 가지고, 원한의 추악함과 험악함을 알아차릴 수 있다.
첫째, 여하한 원한도 아무리 좋은 이름을 붙이더라도, 변태적이다. 이것은 이미 심리과학이 정의한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하에서, 어떤 층면에서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모두 사안별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사법, 행정, 도덕여론등등이 수단을 적절하게 운용하면, 모든 사회갈등을 해소하는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다. 아쉽게도 '복수'는 여하한 갈등도 해결하지 못한다. '원한을 역량으로 만들자"에서 '역량'은 단지 파괴의 역량이다. 예수가 수난을 받아 죽은 것도 군중의 진상을 모르는 원한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용서하며 말했다: "저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만일 원한때문이 아니라면, 예수는 아마 박해받아 죽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용서라는 탈속한 이념이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이렇게 기나긴 생명력을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한 사람이 만일 계속하여 원한정서로 이성을 대체한다면, 가장 좋거나 가장 나쁜 결과는 오직 하나일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한다. 당연히 아무도 누군가 명확하게 '너를 이용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네가 들은 말은 분명히 "누구누구가 압박을 받고, 누구누구가 침범을 당했다. 너는 정의의 측에 서야 한다. 너의 모든 것 생명까지 바쳐서 도탄에 빠져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구해주어야 한다."등등. 사람간의 마찰과 분쟁은 항상 존재한다. 그리하여 정의감에 충만한 너는 즉시 끓는 피를 가지고 있고, 검을 뽑아서 일어서야 한다. 그러나, 원한을 선동하는 ㅎ사람들은 모두 너보다 훨씬 총명하다. 어느날 그들이 네 마음 속의 원수들돠 손을 잡고 환담하면서 '상봉일소민은구(相逢一笑泯恩仇)"때 너는 바보가 되어버릴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원한으로 바꿔온 것은 네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고로 바꿔온 것이야말로 너의 이익에 진정 부합하는 것이다.
셋째, 원한의 배설대상은 반드시 사람이다. 또 다른 너와 같은 사람이다. 이렇게 추리해보면, 원한의 결말은 반드시 원수를 죽이는 것이다. 심지어 인종말살, 집단살해일 것이다. 이건 반인류죄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 모든 연민과 측은지심은 원한에 깨끗이 씻겨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 이건 사병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 노약자,부녀자, 어린아이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일종의 불량한 정서를 가지고, 대대손손 무궁한 재난과 고통을 얻게 된다면, 그게 지혜로운 것일까? 가치있는 것일까?
여기까지 쓰다보니 좋은 소식이 있다. 얼마전에 텐센트(騰訊), 넷이즈(網易), 틱톡(抖音)등 인터넷플랫폼은 연이여 중일대립을 선동하고, 극단적민족주의정서를 자극하는 유해한 정보에 관한 공고를 내놓았다. 공고에 따르면, 최근 들어 개별적인 유저들이 최근의 일부 사건을 이용하여 극단적인 민족주의정서를 선동하며,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하거나 심지어 내용을 날조하여 부당한 언론을 발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항일서간(抗日鋤奸)"을 선양하거나, "당대의화단(當代義和團)"을 성립하자고 소리치거나, 쑤저우에서 사람을 구하다가 희생된 스쿨버스 승무원을 '일본특무'라고 폄하하는 말을 살포하거나, "가장 좋은 것은 일본이 침몰하는 것이고, 하루빨리 인종을 말살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극단국수주의적인 언론들이 있다. 중앙만신판의 '개인미디어'들의 한계선없이 클릭수만 늘이려는 행동은 정리정돈해야 한다는 요구에 따라, 플랫폼의 정보컨텐츠관리의 주체책임을 실행하여, 플랫폼은 이런 류의 극단적이고 유해한 언론을 전하는 계정에 대하여 금지, 폐쇄등의 조치를 취할 것이다.
사람들이 각성하고 있는 것같다.
'중국과 사회 > 중국의 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승서강(东升西降)과 백년대변국(百年大变局) (0) | 2024.05.07 |
---|---|
중화민족: 통치자에 순화되고 있는 민족 (1) | 2024.04.15 |
중국인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1) | 2024.02.27 |
"졸(卒)"의 심리 (1) | 2024.01.09 |
중국당국은 왜 이렇게 신경이 날카로운가? (0) | 2023.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