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항우)

항우의 신세내력

중은우시 2008. 3. 27. 21:32

진시황, 유방, 항우는 진나라말기의 영웅들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신세내력에 대한 미스테리를 안고 있다.

 

항우(項羽, 기원전232년-기원전202년)의 이름은 적(籍)이고 자는 우(羽)이다. 하상(지금의 강소성 숙천)사람이다. 초나라 명장 항연(項燕)의 손자이다. 초나라가 망한 후, 그는 숙부 항량(項梁)을 따라 오중(강소성 소주)에서 유랑했다. 어려서 서예를 배웠으나 다 배우지 못하고, 검술을 배웠으나 그것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그리하여 숙부로부터 한사람이 만명을 상대할 수 있는 '병법'을 배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상이 컸다. 진시황이 절강으로 순유를 나왔을 때 그의 위풍이 당당한 것을 보고 "내가 저 자리를 빼앗아야겠다"고 하였다.

 

사마천의 <<사기. 항우본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항적이라는 사람은 하상 사람이다. 자는 우이다. 처음에 의거를 일으켰을 때는 나이 24살이었고, 그의 계부(季父)는 항량이다. 항량의 부친은 항연인데, 바로 진나라장수 왕전(王剪)에게 죽임을 당했었다. 항씨는 대대로 초나라의 장수를 지냈고, 항(項)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성을 항씨로 했다" 사마천은 그의 집안내력에 대하여 그다지 자세히 쓰지는 않았다. 부친의 이름조차 기록하지 않았다. 나중에 쓴 반고의 <<한서>>에도 역시 언급이 없다. 항우의 부친이 누구인지는 언급이 없다. 그리고 항우의 모친이 누구인지도 적혀 있지 않다. 남존여비 시절에 모친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더라도 부친의 이름은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것조차 없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사기에는 '항량'이 '계부'라고 되어 있는데 '계(季)'는 셋째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계부"는 셋째숙부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항우의 부친대에는 적어도 첫째, 둘째는 있었을 것이다. 넷째, 다섯째는 몰라도. 그렇다면, 항우는 왜 부친이 아닌 계부인 항량과 함께 살았을까? 항량에게는 자식이 있었을까? 현재로서는 자료가 없으니 알 방법이 없다. 사기에 보면 또한 "항백(項伯)"이 나온다. 중국의 형제간의 서열은 "백중계숙(伯仲季叔)"의 순서로 불렀으니, '항백'은 아마도 첫째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항우의 부친은 둘째일 가망성이 많다. 그렇다면 아마도 "항중(項仲)"이 아니었을까?

 

<<항씨족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항씨의 제1대조상은 숙도(叔度)인데, 주무왕의 아들인 백금(伯禽)의 손자이다. 숙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가 득상(得常), 둘째가 탁(), 셋째가 안(顔)이었다. 첫째와 셋째는 후손을 두지 못하여 둘째 '항탁'의 후손이 번성하는데, 숙도의 제8대손이 바로 항연이다. 항연도 세 아들을 두었다. 첫째가 항초(項超), 둘째가 항량(項梁), 셋째가 항양(項襄)이다. 항초의 아들이 "항적"인데 바로 항우이다. 항량의 아들은 "항리(項里)"이고, 항양의 후예는 "유유(劉猷)"이다. "항양"은 바로 <<항우본기>>에 나오는 "항백"이다. 항백의 아들이 왜 성을 유(劉)로 바꾸었을 까? 이에 대하여는 유유의 곁에 주석을 달아놓았다: "한고조가 즉위하자 항백을 열후에 봉하고 사성을 내려 유씨를 주었다. 유씨 유는 항백의 아들이다" 항우가 오강에서 패한 후 유방은 한나라를 건립하고, 유방은 즉시 항백을 사양후에 봉한다. 그리고 유씨성을 내린다. 그리하여 그는 황실의 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유방과는 자녀들을 결혼시켜 지위가 높고 황실인척이 된다. 그리하여 항백의 후손은 아주 흥성하게 된다. <<항씨족보>>를 보면 항초와 항량의 후손은 적혀 있지 않고, 모두 항백의 후손만 적혀 있다. <<항씨족보>>는 통상적인 '백중계숙'의 쓰임새와는 달리 '항백'이 셋째, '항량'이 셋째가 아니라 둘째로 적혀 있어서 의문이 있기는 하지만, 항우의 부친이름이 '항중'이 아니라 '항초'였음은 알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