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는 도대체 어떻게 죽었는가?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추측해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추측할 것인가? 우선 항우가 탔던 말부터 시작하자.
항우의 말은 이름이 추(騅)였다. 추는 우희와 함께 항우(項羽)의 총애를 받았다. 항우가 오강에서 자결할 때, 유일하게 부탁한 일 한가지는 그가 총애했던 이 말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부탁했는가? 그는 오강정장(烏江亭長)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탄 이 말은 다섯 살이고, 천하무적이다. 하루에 천리를 간다. 차마 죽일 수가 없으니 그대에게 주겠다"
항우의 이 말은 비록 몇 마디 되지 않지만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정보를 전해분다. 하나는 자기를 5년간 따라다닌 말을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는 것을 보면, 분명히 항우는 아주 정의(情義)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정의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하여도 분명히 잘 대해주었을 것이다.
사실도 확실히 그렇다. 항우는 우희에게 잘해주었다. 매번 출정하여 싸울 때마다 그녀를 데리고 갔다. 항우에게 몇 명의 여인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 우희도 그저 한 '미인(美人)'일 뿐이다. 죽기 전에 항우는 그의 처자식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면서 이 미인에 대하여는 강개한 비가를 남겼다. 이로써 우희가 항우의 마음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해하(垓下)에서 포위망을 돌파하기 전에 항우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느꼈다. 몇잔 술이 뱃속에 들어가자,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자신에게는 산을 뽑을 힘이 있는데, 감히 누가 자신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렇게 저렇게 싸우다 보니,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말과 여인조차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전장터에서 죽어도 좋으나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백성들이 말하는 것처럼 "여자는 슬프면 곡을 하고, 남자는 슬프면 노래부른다"는 것처럼 노래를 불렀다.
"역발산혜기개세(力拔山兮氣蓋世).
시불리혜추불서(時不利兮騅不逝)
추불서혜가내하(騅不逝兮可奈何)
우혜우혜내약하(虞兮虞兮奈若何)"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세은 세상을 뒤덮는데,
시운이 불리하니 추도 앞으로 나가지 않는구나
추가 앞으로 나가지 않으니 어찌할 것인가
우여, 우여, 어찌할 것인가
우희는 마음을 잘 헤아리는 여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항우는 이처럼 그녀를 아끼지 않았을 거시다. 항우가 표현한 의미를 그녀는 알아들었다. 그래서 "화지(和之, 그에 화답하다)"했다. 즉, 동일한 시로서 항우의 '우려'에 대하여 회답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화답하였는가? 사마천의 <<사기>>에는 아무 것도 적지 않았다. 당나라때의 장수절(張守節)이 <<사기>>에 주석하면서 이렇게 화답하였다고 적었다.
한병이략지(漢兵已略地)
사방초가성(四方楚歌聲)
대왕의기진(大王意氣盡)
천첩하료생(賤妾何聊生)
한나라 병사가 이미 쳐들어왔고,
사방에는 초나라노래소리가 들리네
대왕의 뜻과 기운이 다한다면
천첩이 어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장수절이 이렇게 말한 근거는 무엇일까? 그는 바로 <<초한춘추>>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가사의 형식은 초한시대에 쓴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읽은 사람의 느낌으로는 옛 사람들의 시는 마치 말하듯이 하였다. 청나라때 심덕잠은 <<고시원>>에서 "우희의 화가는 당나라 절구이다. 그래서 싣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합리적인 해석이다.
분명히 우희의 화가는 후세인들의 위작(僞作)이다. 그렇다면, 후세인들은 왜 우희의 입을 빌어 이런 화가를 만들었을까? 목적은 하나이다. 우희의 절대를 찬미함으로써, 항우의 실패를 탄식하는 것이다. 이 화가의 속에는 우희의 말투는 분명히 항우에게 말하고 있다: "나는 절대 구차하게 삶에 연연하지 않겠다. 나는 죽음으로써 그 동안의 은혜에 보답하겠다" 바로 이렇게 때문에 후세인들은 대부분 우희가 자결하였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자살은 스스로 원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희는 정말 자살하였을까? 사마천의 수수께끼같은 글저가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확실히 자살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우희가 자살하였다면, 그리고 죽을 때 그렇게 담담하고 비장하였는가의 점이다. 청나라때의 시인인 하포(何浦)가 읊은 것처럼,
팔천자제동귀한(八千子弟同歸漢)
불부군은시초요(不負君恩是楚腰)
팔천자제는 모두 한나라에 귀순하였는데,
군주(항우)의 은혜를 배반하지 않은 것은 초요(초나라의 허리가 가는 여인, 즉 우미인)뿐이구나.
그렇다면 이렇게 정이 깊고 강렬한 여자에 대하여, 사마천은 왜 아무 말도 언급하지 않았던가? 보기에 문제는 그리 간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태사공 사마천이 쓴 두 사람의 생사이별장면을 다시 보기로 하자.
"가수궐(歌數闕)
미인화지(美人和之)
항왕읍수행하(項王泣數行下)
좌우개읍(左右皆泣)
막능앙시(莫能仰視)"
노래를 몇구 부르고
미인(우희)이 화답하였다.
항왕(항우)는 눈물을 몇줄기 흘리고,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눈물흘리며,
쳐다보지를 못하였다
이 묘사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왜 의미심장한다. 자세히 음미해보면, 원래 항우가 울고 주변 사람도 다 울었다. 그런데, 이것은 우희의 화답하는 노래가 슬퍼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희가 노래를 다 부른 후 자결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운 것이다.
즉, '노래를 몇 구 부르고, 미인이 화답하였다'와 '항왕이 눈물을 몇줄기 흘리고,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쳐다보지를 못하였다'의 중간에 글이 생략된 것이다. 이 생략된 부분은 바로 우희가 자살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어지는 문자는 그래서 더욱 우리가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어시항왕내상마기(於是項王乃上馬騎)
휘하장사기종자팔백여인(麾下將士騎從者八百餘人)
직야궤위남출(直夜潰圍南出)
치주(馳走)"
그래서, 항왕은 바로 말을 탔고
휘하장사중 따라간 자가 팔백여인이다
한밤중에 포위망을 무너뜨리며 남쪽으로 뚫고나가
달려갔다
여기서 "그래서"라는 문구는 아주 깊은 맛이 있다. 즉, 항우의 마음 속의 부담을 떨쳐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말을 타고 포위망을 뚫으려 한 것이다. 이 마음 속의 부담은 바로 우희의 처리였다. 어찌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가? 그녀를 데리고 포위망을 뚫는데에는 손발이 아무래도 걸리적거린다. 그리고 자기의 생명조차 지키기 힘든데, 만일 자기의 여인을 유방에게 빼앗긴다면 그것은 더할 수 없는 치욕이다. 그렇다고 친히 죽이자니, 또한 차마 손을 쓸 수가 없다. 말도 못죽이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유일한 방법은 그녀의 감정에 호소하여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 자결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래를 불러 그녀의 마음이 아프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을 집중하여 포위망을 뚫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항우의 눈아래에서 일어났다.
항우는 자기의 말도 못죽일 정도로 정의를 중시했지만, 그러나 항우는 왜 말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위하여는 후사를 안배해주지 않았는가? 아마도 그것은 우희가 여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남자의 이기심이고 항우의 이기심이었다.
이 각도에서 본다면 우희는 자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녀는 분명히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인 항우에게 핍박받아 자결한 것이다. 비록 간접적이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이것은 타살과 구분된다고 할 수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타살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항우의 사람됨에 대하여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사마천은 이를 숨기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함축적인 글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암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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