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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의 "평생 두 가지 큰일을 했다"는 말에 관하여

by 중은우시 2024. 7. 7.

글: 모원신(毛遠新)

(초고 2009. 02, 수정 2024. 02)

모주석이 자신의 "평생 두 가지 큰 일을 했다(一生干了兩件大事)"는 말을 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임종유언이라고까지 말한다. 많은 친구들이 나에게 언제 어떻게 그런 말을 했는지 물어보았지만, 나의 대답은 항상 이러했다: "그 말을 나는 모른다. 1975년 10월 이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선양(瀋陽)에 있었으므로 알지 못한다. 그해 11월이후에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주석의 곁에서 보냈지만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나는 진성감옥(秦城監獄)에서 나온 후에 비로소 일부 자료에서 보게 된 것이다."

이 말에는 여러가지 버전이 있다. 그중 구체적인 시간, 장소, 참가자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다: 1976년 6월 15일 주석이 사망하기 얼마 전에, 그는 화국봉(華國鋒), 섭검영(葉劍英), 왕해용(王海蓉)등을 불러서 얘기했다. 나는 단지 이 견해에 대하여 그리고 오로지 이 견해에 대해서만 개인적인 생각을 얘기하고자 한다.

1

1975년 11월부터, 주석이 사망할 때까지, 나는 그와 정치국간의 연락원이었다. 만일 주석이 특별히 화국봉을 불러서 이런 말을 했다면, 그건 분명히 1976년초 주은래(周恩來) 총리가 사망하고, 화국봉이 대리총리를 맡은 이후의 일일 것이다. 그때 섭검영 원수는 몸이 좋지 않아 쉬고 있었고, 중앙에서는 진석련(陳錫聯)이 중앙군사위업무를 주재하도록 결정했다. 주석의 병이 위중해졌다가 좋아지고 나서, 정치국 구성원들이 집단으로 주석의 병석앞으로 모여 주석에게 인사를 한 것외에 주석은 섭검영 원수를 따로 불러서 얘기한 적이 없었다.

외빈들과 함께 주석을 만나고나서 화국봉이 단독으로 남아 주석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외에, 주석은 따로 화국봉을 불러서 얘기하지 않았다. 많은 일들은 주석이 모두 나를 시켜 화국봉에게 전달하게 했다. 당산대지진이후, 주석이 거처하는 유영지(遊泳池)에 여러 곳의 균열이 생겼는데, 화국봉이 나에게 주석을 설득하여 202호 새집으로 이사하도록 권하게 했다. 그는 주석의 말을 자신도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한번은 외빈을 배웅한 후, 주석에게 업무보고를 했는데, 보고후 주석은 그에게 "네가 처리하면 내가 안심하겠다(你辦事, 我放心)"이라고 말했는데, 이런 간단한 말도 화국봉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주석이 직접 글로 써서 보여주어야 했다. 나는 당시 화국봉의 말을 완전히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주석은 그가 정치국을 주재하면서 천안문 "4.5사건"을 처리한 것에 아주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석은 등소평(鄧小平)의 모든 직무를 취소하고, 화국봉이 총리, 당중앙부주석을 맡도록 제의했고, 정치국에서 논의후에 통과되었다.

왕해용에 관하여는 외사활동때 외빈을 모시고 주석을 만나는 경우는 있었따. 이는 그녀가 외교부에서 예빈업무를 담당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류의 대화에 참가할 수는 분명 없었다. 주석은 1975년 9월말 나에게 말할 바 있다. 바깥에 떠도는 많은 그가 강청(江靑)을 비판했다는 내용중 일부는 확실히 그가 말한 것이지만, 어떤 것은 그가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명의 소저(兩位小姐)"는 주로 왕해용의 말이다. 나중에 주석은 나에게 이런 말도 했다: "배가 가라앉으려고 하니, 쥐가 배를 떠나 다른 배로 옮겨가는구나. 그녀의 뒤에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부부장이 되었는지 나도 모른다." 그리고 말했다. "당(唐聞生)이 왕(王海蓉)보다 낫다. 너무 단순하다."

천안문 "4.5사건"이후, 주석은 왕동흥(汪東興)에게 지시하여, 중앙판공실로 하여금 "두 명의 소저"가 연락원을 맡았던 기간동안 주석이 말한 모든 원시기록 및 주석이 말로 하기 힘들어 직접 글로 쓴 필적 원본을 모조리 회수하도록 한 후, 나에게 보관하도록 시킨 바 있다. 왕동흥이 직접 우리집으로 와서 나에게 주석의 지시를 전달했고, 중앙판공실에서 회수한 모든 자료를 나에게 넘겨줄 때, 나는 주석의 왕해용에 대한 신뢰는 이미 완전히 없어졌다고 여겼다. 자료중에는 주석이 당시 강청을 비판할 때, 직접 손으로 쓴 "사인방(四人幇)"이라는 세글자의 원본이 있다. 1975년 9월말, 주석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상해방을 하지 말라고 하는 동시에 북경방, 광동방도 하지 말라고 비판하고, 정치국이 단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문생의 원시속기기록에서도 그것은 확인되었다. 나는 주석이 나로 하여금 이들 자료를 보존하도록 한 것은 누군가 왕해용을 이용하여 그녀의 말을 빌어 강청에 대한 비판을 하고 강청을 타도하고 문화대혁명을 뒤집어엎을까봐 우려한 것이다. 그래서, 왕해용은 1976년 6월 15일의 담화에 참석했을 리가 없다.

2

내가 주석과 대화할 때, 1975년 9월말에는 아직 일부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당시 주석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인후부를 가리키며 나에게 말했다: "(여기가) 내 지휘를 듣지 않아" 그리고 두 손가락을 뻗어서 자신의 두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 눈이 실명하여 보이질 않아. 힘들어...." 그리고 또 말했다. "한쪽 눈을 수술하고나서 다시 보였어." 그후, 그는 안경을 쓰고, 그날의 <참고자료>를 들어 2페이지짜리 외전보도(外電報導)를 처음부터 끝까지 초등학생처럼 나에게 읽어 들려주었다. 그리고 득의하여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눈으로 보게 된 이후 흥분한 모습이었다.

내가 해성지진(海城地震)에 대해 보고했을 때, 주석은 말했다: "듣기로 예보가 있어서 손실이 크지 않다던데."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예보를 발령한 후, 나는 더욱 긴장했다. 지진이 만일 장시간 오지 않으면, 정상적인 생활이나 생산에 영향을 줄 뿐아니라, 동사하거나 동상을 입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성위는 지역사람들을 대한 면목이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그러자 주석이 말했다: "그건 대단한게 아니다. 어쨌든 뒷사람들이 너에게 요인우지(遼人憂地)"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그중 '요인우지'라는 네 글자를 나는 잘 알아듣지 못하여, '요녕유지(遼寧有地, 요녕에 지진이 있다)'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주석은 손을 흔들면서, "우천(憂天)이 아니라.."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다. 나는 그제서야 알아들었다. "말씀하신 것이 기인우천(杞人憂天)이 아니라, 요인우지(遼人憂地)라는 것입니까?" 그러자 주석은 미소를 띄우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1년여동안 주석을 뵙지 못했다. 나는 그가 말하는 것은 힘들어할 뿐아니라, 가래를 뱉는 것도 힘들어하며, 어떤 때는 물을 마시다가도 기침을 멈추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아직 명료했다. 단지 그것을 말로 분명하게 표현하지 못할 뿐이었다. 처음에 주석은 장옥봉(張玉鳳)을 불러서 해석하게 했는데, 구체적인 인명, 지명, 성어, 전고, 정치역사사건등의 단어가 나오면 그녀는 나만큼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주석은 더 이상 그녀를 부르지 않게 되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주석의 곁에서 자랐기 때문에, 비록 지금은 그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긴 하지만, 그의 입모양이나 항상 쓰던 손짓, 그리고 당시 얘기하던 주제를 감안하여 대체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판단할 수 있었따. 나는 장옥봉의 방법을 배워서, 주석이 한 마디를 하면, 나는 그가 했던 말을 다시 그에게 들려주면서 그런 뜻인지 물어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 확정했다.

1975년 12월이후 나와 얘기한 주요내용은 기본적으로 주석이 편지지에 연필로 직접 썼다. 당시 주석의 병이 위중해서 말하는 것도 힘들어했고, 나는 마음이 아프고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나중에 내가 진성감옥에 갇힌 후, 억지로 등소평을 비판한 것은 내가 강청과 함께 꾸민 음모이고, 내가 주석의 지시를 날조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나의 금고 안에는 대량의 주석과 내가 얘기할 때 그가 직접 쓴 친필원본이 있었다. 결국 나를 재판할 때는 더 이상 그 죄명을 들먹이지 않았다.

만일, 주석이 1976년 6월 15일 나는 "평생 두 가지 큰 일을 했다"고 말했고, 그때 무슨 '개관정론(蓋棺定論)', '혈우성풍(血雨腥風)'같은 말까지 했다면, 당시에는 아마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말한 내용이 일백여자에 이르렀다면, 분명 주석은 편지지에 10여페이지는 적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6월중순, 주석은 말하는데 힘들어했을 뿐아니라, 연필을 들고 글씨를 쓰는 것조차 아주 힘들었다. 그래서, 당시 주석이 친필로 쓴 원본이 없으면, 그 이야기의 진실성은 증명될 수가 없아고 할 것이다.

3

1976년 6월하순, 주석은 심근경색으로 위기에 빠졌다가 살아난 이후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의료팀의 업무편의를 위해, 겨우 10여평방미터의 심실에서 서재겸 거실로 쓰는 대청중앙으로 옮겨왔다. 당시, 주석은 화국봉, 왕홍문(王洪文), 장춘교(張春橋), 왕동흥의 4명을 지정해서 유영지에서 그의 곁에 윤번제로 당번을 서게 했다. 나도 풍택원(豊澤園)에서 유영지로 이사왔다. 나는 그의 곁에서 멀지않은 '갱의실(更衣室)'에 임시로 침상을 놓았다.

개략 6월말, 의료전문팀이 회의를 거쳐, 화국봉, 왕홍문, 장춘교, 왕동흥의 4명 및 나에게 주석의 병세와 다음 단계의 치료방안에 대해 보고했다. 화국봉이 전문가팀의 의견을 주석에게 보고하자고 제안했고, 우리 5명은 대청으로 가서 주석의 병상우측에 섰다. 나는 주석의 머리쪽에 섰다. 먼저 화국봉이 전문가팀의 의견을 보고했다. 그는 산서(山西)사투리가 심했다. 주석은 알아들으면 고개를 끄덕였고, 못알아들으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럼 내가 화국봉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고, 주석은 고개를 끄덕여 알아들었다고 표시했다.

화국봉의 보고가 끝난 후, 주석은 그들 4명의 앞에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면서, 손가락으로 그들 4명을 가리키며 나에게 말했다: "...해라" 그는 오른손 손가락 5개를 펴서 다섯손가락을 모은 후 아래위로 두번 흔들었다. 나는 주석에게 물었다: "당신 말씀은 '너희가 단결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까?" 그러자 주석은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후 그는 손바닥을 들어 좌우로 흔들면서 말했다. "....하지말라" 이이서 다섯손가락을 모은 오른손을 뻗고, 손바닥을 위로 향하면서 다섯 손가락을 펴더니 아래 위로 두번 흔들었다. 나는 주석에게 물었다: "당신의 말씀은 '분열해서는 안된다'입니까? 그렇습니까?" 주석은 다시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끄덕였따. 그후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손가락을 다시 그들 4명에게 향했다. 나는 주석이 그가 금방 한 말을 그들 4명에게 전하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들었다. 나는 그들 네 명에게 말했다: "주석이 말하기를 '너희는 단결해야 하고, 분열해서는 안된다'" 주석은 미소를 띄고 그들 네명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화국봉이 먼저 말했다: "주석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우리는 반드시 단결을 견지하고, 분열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화국봉의 말을 주석에게 다시 반복했다. 주석은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세 사람도 단결을 견지하고 분열하지 않을테네 주석께서 안심하시라고 말했다.

나는 진성감옥에서 나온 후, 여러 버전의 소위 주석의 임종유언에 대하여 보게 되었다. 심지어 무슨 중앙지도부 예정구성원명단같은 류까지 있었는데 ,모조리 날조한 것이다. 주석의 병이 위급할 때, 병석에 누워서, 화국봉, 왕홍문, 장춘교, 왕동흥의 4명에게 말한 "너희는 단결해야 하고, 분열해서는 안된다"가 주석의 임종전 마지막으로 그가 직접 지정한 중앙의 주요지도자집단에게 정식으로 전달한 지시이자 요구였다. 이것을 주석의 마지막 유언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4

나 개인적으로는 만일 주석이 살아계실때 확실히 평생 두 가지 큰 일을 했다라고 하셨다면, 그것은 현재 전해지는 것과 같은 말투나 방식이 아닐 것이다. 주석은 중국혁명역사를 얘기하면서 일부 구체적인 일에 대하여 자신이 어떤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을 제외하고, 중대역사사건 예를 들어 항일전쟁, 해방전쟁같은 류의 중대역사단계에서 나는 한번도 그가 그 '자신'이 그런 일을 해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항상 '우리당'이 그런 일을 해냈다고 말했었다.

1971년 5월, 중앙에서 비진(批陳)정풍보고회의를 개최한 기간동안 주석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을 만든지 50년이다. 50년동안, 우리당은 민주혁명의 임무를 완성했고,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의 임무를 시작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장개석을 대만으로 쫓아낸 것은 민주혁명의 아주 작은 부분 즉 해방전쟁승리라고 본다.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것은 단지 사회주의혁명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래서 만일 그가 "두 가지 큰 일을 해냈다"고 한다면, 주석은 아마도 하나는 우리 당이 중국의 민주혁명의 임무를 영도하여 완성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당이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의 임무를 개시한 것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1966년 8월중순, 주석은 나를 운남에서 전쟁준비를 하고 있던 유도탄삼영(導彈三營)에서 북경으로 불러, 나로 하여금 문화대혁명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당시 나는 문혁초기 여러 현상에 대하여 이해하질 못했다. 같은 해 11월 중순에서 12월 중순까지, 주석은 중남해의 집에서와 조어대 8호루에서 나와 여러 차례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사회주의혁명은 합작화(合作化)에서 시작하여, 현재 단지 소유제개조임무만 완성했다. 전체 상층구조, 문화, 교육등 이데올로기 각분야의 사회주의혁명은 이제 막 시작했다. 만리장정이 이제야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부터 대학졸업때까지, 주석은 한번도 나에게 건국후 당내의 노선분쟁과 투쟁에 대하여 얘기한 적이 없다. 나는 그저 중공과 소공(蘇共)간에 심각한 노선분쟁과 투쟁이 있다고만 알고 있었다. 내가 처음 그가 당내의 노선투쟁을 언급하고, 당내에 두개 사령부가 존재한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

기억하기로 당시 주석은 말했다: "민주혁명의 임무는 손중산(孫中山)이 영도하는 국민당이 제기한 것이다. 즉 반제반봉건이고, 열강을 타도하고, 평균지권(平均地權)하는 것이다. 이건도 우리 당의 초급강령이고, 국공양당의 제1차합작으로 북벌을 진행했다. 장개석과 국민당우파의 배반으로 우리당에 대해 4.12대도살을 진행했고, 그래서 우리 당이 국민당을 대체하여, 중국의 민주혁명을 이끄는 임무를 책임지게 된 것이고, 10년의 토지혁명을 진행한 것이다. 노구교사변후, 8년의 항일전쟁을 진행했다. 항전승리후, 장개석은 양당이 달성한 연합정부건립과 평화건국의 합의를 찢어버렸고, 내전을 일으켰다. 우리 당은 다시 지주계급과 제국주의이익을 대표하는 관료매판자산계급정권을 타도하는 것을 이끌었고, 해방전쟁을 진행했다. 우리는 그것을 신민주주의혁명이라고 부른다. 신중국이 건립된 후, 확실하게 말해서, 대륙에서 티벳을 제외하고, 토지개혁운동을 완성한다. 조선에서 미제국주의를 삼팔선이남으로 쫓아냈고, 항미원조전쟁에서 승리했다. 이는 반제반종건의 민주혁명임무를 완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석은 말했다: 민주혁명임무를 완성한 후, 사회주의혁명을 진행해야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합작화부터 시작하여, 당내에 어떤 사람들은 반대했었다. 그들의 사상은 여전히 민주혁명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정권을 탈취하면, 토지개혁이 완성되고, 당의 혁명임무도 완성되었으며, 남은 것은 생산력을 건설, 발전시키는 것뿐이라고 보고, 사회주의혁명을 진행하는데 찬성하지 않는다. 당내의 노선분쟁은 바로 합작화부터 시작된 것이다.

민주혁명의 승리는 그저 우리가 국민당을 대체하여 반제반봉건의 혁명임무를 완성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당의 초급강령을 실현한 것일 뿐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다. 그리고 토지개혁은 그저 소수지주가 많은 토지를 점유하는 사유제를 다수의 농민이 각각 소규모토지를 점유하는 사유제로 바꾼 것일 뿐이다. 역사의 경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토지등 생산자료의 사유제는 반드시 양극분화를 불러올 것이고, 새로운 착취계급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며, 많은 노동자, 농민,노동군중은 다시 소수자들에게 착취당하는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다. 앞장서서 토지개혁을 완성한 산서, 동북등 노근거지는 이미 중앙에 이런 류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대다수노동인민의 근본이익을 위하여는 오직 생산자료의 소유제를 개조하고, 계급착취와 압박을 없애야 한다. 즉, 사회주의의 도로를 가야 하고, 장래 공산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당이 건당때부터 세운 분투목표인 것이다.

주석은 말했다: 일찌기 20년대, 장위원장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회주의의 그 마르크스주의는 중국의 국정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산당에 대한 대도살을 시작한다. 만일 민주혁명을 완성한 후, 더 이상 사회주의혁명을 진행하지 않는다면, 국공양당이 수십년간 싸워오고, 그렇게 많은 열사들이 희생한 것이 그저 역사상 왕조교체를 이룬 것에 불고하게 될 것이다. 권력자들만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이고 환탕불환약(換湯不換藥)이 되는 것이다. 결국 소수인들이 다수인을 착취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장위원장의 말이 맞는다. 도살한 것도 맞는다. 그러면 중국공산당은 탄생한 날부터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 해야 한다.

국공양당의 이견은 생산력을 발전시키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하한 계급의 정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모두 생산력은 발전시킨다. 양당의 근본이견은 바로 각각 서로 다른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는데 있다. 중국대다수의 노동자농민의 이익을 꾀할 것인가, 아니면 소수의 돈있고 권세있는 사람의 이익을 꾀할 것인가. 대다수의 이익을 꾀한다면, 오직 사회주의의 길을 가야 한다. 사회주의혁명을 진행해야 한다. 민주혁명임무를 완성한 후, 계속혁명을 해야할 것인가 아닌가는 국공양당투쟁의 연속인 것이다.

주석은 말했다: 사회주의혁명의 임무는 민주혁명의 임무보다 더욱 힘들고 더욱 곤란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생산자료의 소유제를 개조하는 것뿐아니라, 상층구조와 이데올로기분야의 혁명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고, 수천년동안 사람의 두뇌속에 박혀 있는 사유관념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진정한 공산당원이라면, 특히 당의 간부라면, 너와 나를 포함해서, 앞장서서 자신의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사유관념과 투쟁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많은 인민군중을 이끌고 교육하여 사상을 계속하여 개조하여, 점차 사유관념과 결별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당내의 소수인들이 오직 생산력발전만 애기하고, 소수인 특히 당내권력파소집단과 개인의 이익을 보호해야한다고 하면서, 계속혁명을 반대하는 수정주의노선을 가고 있다. 사회주의혁명은 사유제와 싸우고 수정주의를 비판해야 한다.

사회주의혁명은 우리당도 겨우 소유제의 개조만 완성했고, 전체 상층구조, 문화, 교육등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각 분야, 무산계급과 자산계급의 두 계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 길의 투쟁,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의 문제는 아직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당내에서는 사회주의혁명을 진행할지 말지의 두 가지 서로 다른 노선의 투쟁인 것이다. 만일 공산당이 계속혁명을 하지 않는다면, 소유제개조로 취득한 성과는 도퇴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지주자본가가 나타나고, 당내에 새로운 관료매판자산계급이익집단이 나타날 것이다. 중국은 다시 제국주의의 부용으로 전락할 것이고, 많은 노동인민은 국가의 주인에서 다시 자본가와 관료매판자산계급의 착취대상이 될 것이고, 돈있고 권세있는 소수인이 부리는 노예가 될 것이다.

주석은 말했다: 스탈린은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다. 1936년 소련이 생산자료소유제개조를 완성한 후, 그는 잘못을 범했다. 소련의 착취계급은 이미 소멸되었으며, 다시는 나타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계급모순이 없어졌으니, 혁명임무도 없는 것이다. 소련공산당이 임무는 오직 과학기술읠 발전, 생산력발전에만 있는 것이다. 스탈린은 말년에 이미 이 잘못을 알아차렸다. 후르시쵸프가 취임한 후, 한편으로 철저히 스탈린시기의 위대한 성취를 부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스탈린의 잘못을 이용하고 확대하면서, 상층구조, 문화 교육등 이ㄷ[올로기를 포함한 분야에 여전히 계급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소련공산당지도부가 점차 특수이익집단으로 변모한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제국주의의 화평연변(和平演變)음모에 대한 경계심도 완전히 풀어놓으면서 자본주의 길로 되돌아갔다. 내가 보기에, 소련공산당의 앞날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소련공산당 자신이 혁명을 통해 다시 광대한 노동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사회주의의 길로 돌아가거나, 다른 하나는 소련인민들이 소련공산당을 혁명으로 쫓아내는 것이다. 우리 전체당의 동지들도 소련공산당지도자집단의 변화변질하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우리의 일부 원로동지들은 항상 토지혁명, 항일전쟁, 해방전쟁 즉 민주혁명시기에 자신이 어떤 공로를 세웠는지를 얘기하기 좋앟나다. 그러나 자칭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앙하고, 광대노동인민군중의 근본이익을 위해 봉사한다고 선서한 공산당원이면서 왜 사회주의혁명에서 어떤 공로를 세웠는지는 얘기하지 않은 것인가. 객관적인 현실을 이러하다. 당내 일부 관직이 높을 수록 특권이 많다. 그래도 만족하지 않고, 심지어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권력으로 사욕을 탐한다. 그들은 인민군중에게서 갈수록 멀어지고, 심지어 인민민주중의 반대편에 선다. 곤란과 좌절이 닥치면, 합작화이래의 사회주의혁명을 부저할 생각을 하고, 되돌아가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잘 모르고 있다. 만일 상층구조 문화교육등이데올로기를 포함한 분야에서 사유제와 투쟁하고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주의혁명을 계속하지 않는다면 자산계급사상이 범람하고, 당내 소수의 지도자들은 변질되어 특수한 이익집단을 형성하여 새로운 자산계급이 될 것이다. 제국주의의 화평연변이 침투하는 상황하에서 중국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위성상천(衛星上天), 홍기낙지(紅旗落地)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희들의 그 공로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죄과로 취급되어 청산당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