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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등소평)

등소평(邓小平)이 쫓아낸 15명의 "국가지도자"

by 중은우시 2024. 5. 29.

글: 간중국(看中国)

'문혁'이 끝난 후, 등소평은 중공의 제2대지도자에 올랐다. 모택동의 옛측근, '자산계급자유화'에 반대하거나, '6.4'기간동안 전후로 15명의 중공 '국가지도자'를 중앙주석, 중앙군위주석, 국무원총리, 중앙총서기, 중앙부주석, 중앙정치국상위, 중앙정치국위원, 중앙서기처서기, 국무원부총리, 전인대부위원장등의 자리에서 쫓아냈다. 모두 면직, 사직, 퇴직등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화국봉(华国锋): 중공중앙주석, 중앙군위주석, 국무원총리

화국봉은 중공 호남 상음현, 상담현위서기를 지냈고, 나중에 호남성위서기로 승진한다. 문혁때 승진을 거듭하여 전후로 중공9대중앙위원, 중공10대중앙정치국위원, 국무원부총리 겸 공안부장을 맡는다. 모택동이 죽기 전에 화국봉을 중공중앙제1부주석에 앉히고,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다. 그리고 "네가 처리하면, 내가 안심할 수 있겠다(你办事,我放心)"는 유언을 남긴다.

모택동의 사후, 화국봉은 왕동흥(汪东兴), 섭검영(叶剑英)과 힘을 합쳐 "사인방"을 체포하고, 문화대혁명을 끝낸다. 그리고 명목상의 중공 당, 정, 군의 최고지도자에 오른다. 나중에 등소평과 정치노선이 달라 하야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1981년 중공의 당정군대권을 철저히 등소평에게 빼앗기고, 중공의 핵심지도권에서 쫓겨난다.

왕동흥: 중공중앙부주석

왕동흥은 중공제9기중앙정치국 후보위원, 제10기 중앙정치국 위원, 제11기 정치국상위, 중앙부주석을 지낸다. 오랫동안 중앙경위국장을 맡아 모택동의 경호와 안전을 책임졌다. "사인방"을 체포하는 행동에서 의사결정자의 한명이고, 1978년 등소평이 권력을 장악한 후 사직하고 하야했다.

기등규(纪登奎): 중공정치국위원

기등규는 문혁 중후기, 그리고 포스트모택동시대의 중공정치인물이다. 그는 중공 제9기 중앙정치국 후보위원, 제10, 11기 중앙정치국 위원을 지낸다. 일찌기 국무원 부총리, 중앙정법소조 조장, 중앙궁사위 영도성원등의 직위를 맡았었다.

중공11기 3중전회이후, 정치적으로 배척당하고, 주변으로 밀려난다. 그리하여 1980년 2월 개최된 중공 11기 5중전회에서 모든 직위를 내놓고 물러난다. 1983년이후, 국무원 농촌발전연구센터에 부장급(장관급) 연구원으로 임명된다.

오계현(吴桂贤): 국무원 부총리

1975년, 중공 제4기 전인대에서 당시 섬서성 함양서북의 국면1창 부창장으로 있던 오계현은 국무원 부총리로 발탁 기용된다. 그녀는 중공역사상 최초의 여성부총리이다. 1977년 중공11대에 오계현은 대표자격심사조의 성원이고, 중공중앙위원 후보에 대한 토론때, 간보에 기재된 자료에 따르면 오계현은 주은래에 반대했다. 그후 오계현은 섬서 함양서북의 국면1창으로 되돌아가도록 요구받는다.

손건(孙健): 국무원 부총리

1975년, 중공제4기 전인대에서, 당시 천진시에서 공업을 담당하던 부서기 손건이 국무원 부총리로 발탁 기용된다. "사인방"이 타도된 후, 손건은 부총리의 자리에서 2년간 더 일했다. 1978년, 그가 외지에서 검사업무를 하고 있을 때 돌연 베이징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그의 업무를 정지시키고 조사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소문(李素文): 전인대 부위원장

1975년, 심양시 남탑상점 제1문시부 판매원 이소문이 베이징으로 와서 전인대 부위원장의 직위를 맡는다. 1976년, '사인방'이 타도된 후, 이소문은 '문제인물'이 된다. 이소문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문건도 없고, 그녀를 전인대 부위원장의 직위에서 파면했다는 문건도 없이 그녀는 심양으로 되돌아가서 일하라는 통지를 받는다.

요연위(姚连蔚): 전인대 부위원장

요연위는 1975년 중공 제4기 전인대 부위원장이 된다. 1979년에 쌍개(双开, 정부와 당의 직위를 모두 박탈당함)당해 생산노동자로 되돌아간다.

오덕(吴德): 중공정치국위원

오덕은 천진시장, 길림성 제1서기를 지냈다. 1966년 6월 4일, 오덕은 북경시위 제2서기로 임명된다. 그후, 오덕은 북경시혁명위원회 부주임이 된다. 1973년 중공10대때 오덕은 중공정치국위원이 되고, 북경시위제1서기, 시혁명위원회 주임이 된다.

1976년 "4.5" 천안문사건때, 오덕은 엄히 진압할 것을 주장한다. 이로 인하여 베이징시민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고, '무덕(无德, 오덕과 중국어 발음이 같음)'이라고 조롱당한다. 1976년 10월 6일, 화국봉과 섭검영등이 사인방을 체포할 때, 오덕은 전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1977년, 오덕은 전인대 부위원장이 된다. 다만 화국봉이 점차 권세를 잃어가고, 등소평등이 다시 등장하면서, 오덕은 1978년 12월 중공11기 3중전회에서 비판을 받는다. 그후 중공정치국위원의 직무를 박탈당한다. 1980년 4월 오덕은 전인대부위원장을 사임한다.

진석련(陈锡联): 중공정치국위원

1950년, 진석련은 제3병단사령원 겸 중공충칭시위제1서기, 시장 및 천동군구 사령원을 지낸다. 1950년 해방군포병사령원 겸 포병학원 원장이 된다. 1955년 상장의 계급을 받는다. 1959년부터 심양군구사령원이 되고, 1973년부터 북경군구사령원, 중공중앙군위상위, 국무원부총리등의 직을 맡는다. 9, 10, 11기 중앙정치국위원이 된다. 1980년 2월, 중공11기 5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위원 진석련은 사직한다.

진영귀(陈永贵): 중공정치국위원, 국무원 부총리

1980년 8월 중공제5기 전인대 제3차회의에서 중앙정치국위원은 진영귀의 국무원부총리 직위를 면직할 것을 요구한다. 1980년 9월, 진영귀는 국무원 부총리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중공12기 1중전회이후 중공중앙정치국위원의 직위에서 물러난다.

호요방(胡耀邦): 중공중앙총서기

문혁이 시작된 후, 중공중앙주석 모택동은 1966년 8월 공청단중앙을 심하게 질책하며, 호요방, 호극실(胡克实), 호계립(胡启立)등 공청단중앙의 '삼호(三胡)'가 잘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1975년에 이르러 호요방은 업무에 복귀하고, 중국과학원 당의 핵심소조 제1부조장, 중국과학원 부원장이 된다. 1977년 3월, 중공중앙당교 상무부교장이 된다. 그해 12월, 중공중앙조직부장으로 승진한다. 1981년 6월부터 1982년 9월까지 중공중앙주석을 맡는다. 1982년 9월부터 1987년 1월까지 중공중앙 총서기를 맡는다.

1986년 연말부터 1987년 초까지, 중국각지에서 학생운동이 일어난다. 무한, 상해, 북경, 곤명, 광주, 천진등 17개 대중도시에서 엄청난 항의시위가 벌어진다. "민주를 원한다. 자유를 원한다. 인권을 원한다. 관료주의에 반대한다. 부패에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쳐 중남해를 깜짝 놀라게 만든다. 중공원로들은 학생운동을 자유화지식분자가 선동하고, 호요방이 종용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호요방의 부하였던 임목((林牧)은 <습중훈이 토로한 호요방 하야전후의 정치내막>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1987년 1월 16일, 호요방은 중공총서기의 직위를 사임한다. '민주생활회'에서 은퇴한 원로와 일부 젊은 고위지도자들이 돌아가며 호요방을 비판했고, 전회가 끝나기도 전에 사임절차를 마친다.

조자양(赵紫阳): 중공중앙총서기

'문혁'기간 조자양은 '도주(陶铸)의 광동에서의 대리인'으로 지목되어 가장 중요한 공격목표가 된다. 그에게 '8대죄상'이 씌워지고 감호심사를 받는다. 1971년 5월 조자양은 내몽골로 보내어진다. 1972년 다시 광동성위 제1서기, 성혁명위원회 주임 겸 광주군구정위가 된다. 1975년 등소평은 조자양으로 하여금 사천성을 책임지도록 명한다.

조자양은 1978년 2월부터 1983년 6월까지 중공정협부주석을 맡고, 1980년 2월 중공11기 5중전회에서 중공중앙정치국상위에 선임된다. 1980년 4월 국무원 부총리가 되고, 1980년 9월, 국무원총리가 된다. 1981년 6월 중공11기 6중전회에서 중공중앙부주석에 당선된다.

호요방이 하야한 후, "6.4"사건에서 조자양은 학생을 동정하고 무력진압에 반대하는 바람에 등소평, 진운, 이선념과 이붕등의 불만을 사 당내외의 모든 직무를 박탈당한다. 최종적으로 연금상태로 이후 15년의 여생을 지내다가 2005년 사망한다.

호계립(胡启立): 중공중앙정치국상위

호계립은 공청단중앙서기처서기, 천진시위서기, 시장, 중앙판공청주임, 중앙서기처서기를 지내며 중공지도자층에 정식으로 진입했다. 1985년 9월 개최된 12기 5중전회에서 호계립은 전기운(田纪云), 교석(乔石), 이붕(李鹏)등과 함께 중앙정치국위원으로 보선된다. 1987년 11월 2일 거행된 13기 1중전회에서 호계립은 중공중앙정치국상위에 선임되고, 동시에 중공중앙서기처의 서열1위인 서기가 된다.

1989년 "6.4"사건을 전후하여, 학생운동을 동정하여, 호계립은 조자양과 함께 하야한다. 호계립은 정치국위원, 상위, 중앙서기처서기의 직위를 면직당한다.

예행문(芮杏文): 중공중앙서기처 서기

예행문은 상해시위서기를 맡았을 때 당시 상해시장이던 장쩌민(江泽民)과 업무상 뜻이 맞지 않아 불화가 있었다. 예행문은 나중에 13기 중앙서기처서기가 되어 이데올로기를 주관한다. 일찌기 중공중앙선전사상공작영도소조의 부조장을 지냈으며, 당시 중공중앙총서기 조자양의 심복이었다.

1989년 "6.4"사태가 발생한 후, 예행문은 조자양, 호계립, 염명복등과 함께 하야한다. 1991년 4월 다시 기용되어 국가계획위원회 부주임(정부장급)이 된다. 1993년 3월에는 제8기 전국정협 상위에 당선된다. 2005년 6월 5일 북경에서 사망하니 향년 78세이다.

염명복(阎明复): 중공중앙서기처 서기

염명복은 제기 전인대상무위원회 비서장, 중공중앙 통전부장을 지낸다. 13기 1중전회에서 중공중앙서기처 서기로 당선된다. 1988년에는 제7기 정협부주석이 된다.

1989년 5월 14일 오전 염명복은 왕단(王丹), 우얼카이시(吾尔开希)등을 만나 일련의 대화를 한다. 대화는 5월 16일까지 계속되었고, 염명복은 조자양의 동의를 받은 후 광장으로 가서 학생들에게 얘기한다. 그리고 학생들과 함께 연좌시위에 참석하고 학생들의 인질이 되겠다고 말한다.

1989년 6월 중공 제13기 4중전회에서 염명복은 호계립, 예행문과 함께 중앙서기처서기의 직무를 면직당한다. 1990년에 그는 중공중앙 통전부장, 정협부주석 및 정협전국위원회 당조부서기등의 직무를 면직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