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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시진핑)

시진핑이 중앙경위국장(中央警衛局長)을 4차례 교체한 내막은?

by 중은우시 2024. 7. 24.

글: 정효농(程曉農)

해외에서 중국고위층의 정치적미래의 변화에 대하여 얘기할 때, 정변이라는 단어가 출현하는 빈도가 적지 않다. 어떤 사람은 시진핑의 주위에서 정변이 발생할지여부에 대하여 추측하기도 한다. 다만, 왕왕 이런 추측시 왕왕 정변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브레이크'가 걸리게 된다. 도대체 중공내에서 어떻게 해야 정변이 발생할 수 있을까는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본문은 중공정권이 건립된 이래의 정변을 살펴보기로 한다. 중공내부에서 정변이 발생한 것은 실제 사례가 있다. 정변의 성패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기실 아주 간단하다. 즉, 누가 '총을 잡고 있느냐'이다.

  1. 시진핑 취임전 저우용캉(周永康)의 정변미수

최근에 일어난 중공고위층의 권력충돌은 2012년 3월 19일이다. 그때 시진핑은 아직 총서기에 취임하지 않았다. 당시 무경부대(武警部隊)에 대한 지휘권을 가진 정치국상위, 중앙정법위서기 저우용캉은 일찌기 무경을 동원하여 정변을 기도했다. 그러나 음모가 내부인에 의해 고발되었다; 후진타오(胡錦濤)는 38군을 동원하여 중앙정법위의 몇고 사무실건물을 포위했다. 여러 매체가 사후에 소개한 바에 따르면, 당시 38군에 하달한 임무는 "음모분자의 군사정변을 분쇄하라"는 것이었다. 사후 저우용캉은 체포되어 하옥되고, 저우용캉 일파의 인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루어진다.

무경부대는 단지 경량무기를 소지한 경찰이 아니라, 준군사부대이다. 1995년 5월 3일 국무원과 중앙군사위가 하달한 국발(1995)5호문건 <중국인민부장경찰부대지휘관리체계를 조정하는데 관한 결정>에 따르면, "무경부대는 국무원의 편제서열에 속하고, 국무원, 중앙군사위가 이중으로 영도한다." "무경총부는 공안부의 영도와 지휘를 받는다. 총대 및 그 이하 무경부대는 동급 공안부문의 영도를 받는다."

이렇게 하여, 무경부대의 지휘권은 공안부분이 제1지휘자가 된다. 중앙군사위는 단지 무경의 조직편제, 간부관리, 훈련등을 책임질 뿐이다. 무경부대의 일상임무, 규모와 편제정원, 지휘, 경비물자보급등은 모두 공안부가 결정한다. 1996년 10월 중앙군사위는 전후로 육군의 14개 을종보병사단을 무경부대로 소속전환시켜, 무경내위부대 기동사단으로 편제하고, 무경총부의 직속지휘와 관리를 받도록 한다. 중앙정부의 차원에서 직접 무경부대를 지휘하는 사람은 저우용캉이다. 이는 저우용캉이 2012년 무경부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원인이다.

2012년의 그 "3.19"사건은 그저 정변미수사건이다. 그것이 발생한 것은 중공의 일부군대에 이중지휘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시진핑이 취임한 후 군대체계를 바꾸어 다시 군권을 장악한 원인이기도 하다. 시진핑은 그후 군대의 주요 장군을 숙청하고, 중공이 오랫동안 총참모장과 총정치부주임이 군대의 핵심권력을 장악한 양두체제를 바꿔버린다. 원래의 총참모부, 총정치부, 총후근부와 총장비부라는 4개의 군사위내에 총부를 설치하고, 군사위의 각 총부의 2급부를 16개의 분관부문으로 편성하며, 각자 "군사위연합지휘부"에 직속하도록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시진핑은 '무경부대'라는 상대적으로 독립된 군종을 취소한다.

역사적으로, 중공의 군사위주석이 군대에 대하여 지휘감독하는 것은 형식이었고, 군사위주석은 군대의 일상운용유지를 책임지지 않았다. 그저 총참모장과 총정치부주임이라는 두 사람의 개인적인 충성으로 군대를 장악했다. 시진핑은 군사위주석을 실제 군대의 일상운영을 장악하는 직위로 바꾸었다. "군사위연합지휘부판공실"을 통하여 직접 군대를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2. 화국봉이 사인방을 체포한 것은, 중공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정변이다.

신중국이 건립된 후, 유일하게 성공한 한 차례의 정변은 바로 "사인방"체포이다. 비밀리에 체포해야 했던 것은 회의에서 다수를 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당내고위층내에서 반대편에 선 인물들을 체포하면 정변이 성공하는 것이다.

중앙당교 교수인 심보상(沈寶祥)이 2010년 <영도문췌(領導文萃)> 제5기에 발표한 <호요방과 화국봉>이라는 글에 따르면, 화국봉은 일찌기 호요방과 2차례 긴 대화를 나누었으며, 1977년 12월 대화한 주요내용은 이 정변의 원인에 관한 것이었다. 화국봉은 이렇게 말했다: "무슨 방법을 써서 전체회의를 개최해도 안되었다. 여론도구는 그들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었다. 오직 그들을 체포하는 수밖에 없었다."

범석(范碩)이 쓴 <왕진이 본 섭검영>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당시 군대의 통제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던 섭검영이 사전에 왕진(王震)을 보내 여러번 진운(陳雲)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진운은 여러가지고 고민한 후, 직접 섭검영과 면담을 갖는다. 진운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하나는 중공10기 3중전회를 개최하여 합법적으로 '사인방'을 끌어내리는 것, 다른 하나는 특수수단을 취하여 '사인방'을 체포하는 것."

섭영렬(葉永烈)의 <그는 중국에 영향을 끼쳤다 - 진운전전(陳雲全傳)>에는 중요한 세부사항이 보완되어 있다: "진운은 집안에서 10기중앙위원회명단을 반복해서 연구했다. 계산해 보니, 중공10기3중전회를 개최하여 참석자에게 거수로 투표하게 하면, '사인방'을 타도하는 목적을 정치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완전한 자신은 없었다. 섭검영은 무력해결을 주장했다. 진운은 섭검영의 태도가 확고한 것을 보고 명확히 찬동을 표시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번 투쟁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확실히 당시 군대측의 의견을 대표할 수 있던 섭검영이 이번 정변 막후의 주요의사결정자이다. 그리고 중앙경위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던 왕동흥(汪東興)은 정변의 주요집행자였다. 왜 진운이라는 당시 중공고위층내에서 가장 경력이 높은 원로가 직접 정변의 조직과 지휘에 참여할 수 없었을까?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그는 문관이고 군대를 지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섭검영이 결심을 내리자, 화국봉은 군대의 지지를 획득하였고, 정변은 성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실제 군대를 장악한 군대의 주요인물이 기실 이번 정변의 관건이었다. 반대로, 만일 섭검영이 정변을 반대했다면, 화국봉과 왕동흥은 감히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군대와 맞서야 하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설명해주는 것은 만일 군대를 실제 지휘하는 사람의 묵인이 없이는 최고지도자가 단순히 중앙경위국의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을 이용하여 정변을 시행하더라도, 내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3. 화국봉이 공개한 중앙경위국의 비밀

중공고관의 신변에는 모두 경위(警衛)가 있다. 만일 그중 어떤 사람을 체포하고자 한다면, 경위라는 관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다만,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지만, 중공이 고위층인원에 제공하는 경위제도는 사실 정치국위원급이상의 국가급, 부국급고관이 언제든지 체포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전 중공중앙주석 화국봉은 유일하게 비밀정변을 조직하여 성공한 인물이다. 모택동의 사후, 화국봉은 모택동의 뜻에 따라 중공의 최고권력을 승계했다. 그후 즉시 모택동파의 핵심골간("사인방")을 체포하는 정변을 일으킨다. 이 정변은 왜 쉽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화국봉이 죽기 전에, 일찌기 중공고위층 경위제도가 정변때 어떤 역할을 했는지 말한 바 있다.

2005년 1월 12일 오전, 여러번 화국봉을 찾아가서 만났던 창사시위(長沙市委) 비서장(秘書長) 장신치(蔣新祺)는 다시 한번 화국봉의 집을 찾는다. 화국봉은 장신치와 30년전 '사인방'을 체포했던 경위를 이야기하면서 중공 고위층의 경위제도를 언급했다. "우리의 경위제도는 통일영도이고, 경위원은 수장의 안전을 책임지며, 나머지는 모두 경위국의 지시를 받는다. 수장의 지시와 경위국의 지시가 충돌하면, 반드시 무조건 경위국의 명령을 집행해야 한다. 수장이 외출하면 경위원은 매일 경위국에 수장의 안전과 행적을 보고해야 한다. 회의개최시, 경위원은 수장을 회의장소로 호송해야 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회의실주둔경위에게 총을 건네주어 보관시키고, 수장의 회의가 끝나면 다시 총을 수령한다." 이 말은 당시 정변성공의 비밀을 말해주고 있다.

먼저, 수장의 경위들은 무조건적으로 그들이 명을 받아 보호하는 수장이 내린 명령을 듣지 않는다; 반대로, 경위들은 반드시 무조건적으로 먼저 그들의 상급영도인 중앙경위국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 만일 경위국이 그들의 원래 보호해야하는 수장을 체포하라고 명령하면, 그 경위들의 총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그 수장을 겨냥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고관의 경위들은 명에 따라 자신이 책임지는 수장을 보호하는 외에 매일 경위국에 수장의 행적을 보고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런 보고제도는 동시에 신변경위를 통하여, 언제든지 보호받는 고관에 대한 감시감독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 고관은 기실 행동의 자유가 없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고관들이 거처나 사무실을 벗어나서 중남해, 인민대회당, 조어대, 옥천산 혹은 경서빈관같은 고위층회의장소로 가면, 그들의 신변경위는 반드시 회의장소에서 권총을 풀어서 보관시키고, 경위휴식실에서 대기한다. 고관들의 회의장소에서의 운명은 기실 중앙경위국의 회의장경위들이 장악한다. 그래서, 만일 이들 회의장에서 정변이 발생하면, 아마도 고위층중 어느 사람을 체포하는 것일 것이다. 다만 중앙경위국을 지휘하는 최고지도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가 만일 경위국에 어느 고관을 체포하라고 명령하면, 그것은 아주 손쉬운 일인 것이다.

중앙고위층 경위제도의 이 세 가지 특징은 중앙고위층의 인신안전은 기실 언제든지 최도지도자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특징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4. "총을 가진 자"와 "종이를 가진 자"중 누가 정변을 실행할 수 있을까?

중공고위층에 만일 정변이 발생하면, 반드시 총이 결정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중앙위원 혹은 정치국위원의 사전투표로 고위층의 어떤 사람 혹은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을 결정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체포행동이 있다면 먼저 비밀리에 체포하고, 사후에 회의를 개최한다. 형식적으로 중앙위원 혹은 정치국위원의 거수찬성을 받는다. 회의개최시에는 국면이 정리된 다음이다. 만일 어떤 정치국위원이 체포에 반대하고 나서면 아마도 그가 다음 차례에 체포되는 인물일 것이다.

그러므로, 중공고위층의 정변을 얘기하게 되면 누가 누구를 체포할 수 있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 답은 분명하고 간단하다. 당연히 "총을 가진 자"가 "종이를 가진 자"를 체포한다. "종이를 가진 자"가 "총을 가진 자"를 체포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총을 가진 자"는 군권을 장악한 고위층을 가리키고, "종이를 가진 자"는 나머지 고위층을 가리킨다. 그들의 권력은 그저 문건에 동의같은 류의 서명을 하는 것 뿐이고, 손아귀에 총이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쥐고 있는 총이 그들의 등뒤에 겨눠지고 있을 뿐이다.

"총을 가진 자"는 군권을 장악한 사람이다. 만일 당수가 동시에 군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고, 중앙경위국에 대한 지휘권을 통제하고 있다면, 그는 바로 유일하게 '총을 가진 자'이다. 나머지들 '총을 가질 수 없는' 고위층은 단지 '종이를 가진 자'가 될 수밖에 없고, 정변을 당할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중공고위층중에서 군권을 장악한 최고지도자외에 나머지 사람의 개인행동, 보건과 통신연락은 언제든지 감시감독을 당할 수 있다. 정치국상위간의 전화도 감청되고, 핸드폰은 사용이 허가되지 않는다. 문을 나서면 경위, 비서가 바로 곁에서 감시한다. 그래서 최고지도자는 다른 고위층이 일거일동, 일언일행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 누구든지 시진핑의 정적이 되고자 한다면, 시진핑은 바로 알게 될 것이고 언제든지 대응할 수 있다. 시진핑 이외의 정치국위원들의 경우는 "다른 사람이 가진 총이 등뒤를 겨누고 있는" 형국이다. 만일 이들 고위층이 서로 연락하고, 방문하거나 혹은 언제든지 내부전화로 통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5. 시진핑이 4차례 중앙경위국장을 교체한 내막

중앙경위국을 장악하는 것이 중공의 최고지도자에게 이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중공의 영도모델이 집단지도체제이건 개인독재이건 매번 최고지도자가 바뀔 때마다 전임이 남겨놓은 중앙경위국장은 교체되었다. 시진핑은 더욱 교체를 자주 했다. 7년간 4번이나 교체한 것이다. 이는 마치 정변을 방지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같다.

시진핑이 취임했을 때, 중공중앙판공청 경위국장은 후진타오시대에 발탁된 차오칭(曹淸)이었다. 시진핑은 취임 2년이 지난 후에 기회를 잡았다. 경위국이 시진핑의 전용기를 가지고 아프리카에서 상아밀수를 한 사건이 발생하자, 먼저 뉴욕타임즈, BBC에 알려 해외매체에서 폭로하도록 한다. 그후에 차오칭을 전보시켜, 북경군구 부사령관으로 내보낸다.

이어서 시진핑은 차오칭의 부하로 중앙경위국 부국장이던 왕샤오쥔(王少軍)을 중앙경위국장에 앉힌다. 몇년이 지나, 2020년 11월, 시진핑은 푸젠(福建) 장저우(漳州)의 육군제31집단군 91사단 정위(政委)인 천등뤼(陳登鋁)를 중앙경위국 부국장으로 데려온다; 2021년 7월, 다시 북부전구 육군 부참모장 저우홍쉬(周洪許)를 중앙경위국장에 앉히고, 왕샤오쥔의 직무를 면직한다. 다만 금년 1월초, 왕샤오쥔은 다시 시진핑에 의해 복귀하여, 다시 중앙경위국장을 맡았다.

시진핑이 중앙경위국장의 인선을 이렇게 자주 바꾸게 된 것은 아마도 다음의 몇 가지 이유때문일 것이다:

첫째, 시진핑은 원래 부국장에서 승진하여 경위국장이 된 왕샤오쥔에 대하여 안심하지 못했고,야전군에서 데려온 장군으로 교체하고자 했다. 야전군의 장군이 일거에 어림군의 중추위치에 앉게 되는 것은 그 본인도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니 은혜에 감사하며 시진핑의 말이라면 뭐든지 따를 터였다.

둘째, 비록 이런 야전군장군에 대하여 사전에 여러가지로 평가, 검토하였겠지만, 그들은 하층부대를 지휘하는 습관에 물들어 있다. 두뇌회전이 비교적 단순하다. 일단 중앙경위국국장이라는 임무는 아주 복잡하다. 그리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일을 하면서 전수받는 것이지 말로 전수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들 야전군의 장군들이 이런 직무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셋째, 중앙경위국의 국장자리는 항상 내부에서 발탁했다. 그런 사람은 경위업무를 비교적 잘 알기 때문이다; 동시에 여러 해동안 같이 일한 부하들도 잘 안다. 지휘가 잘 이루어진다. 그러나, 야전군 장군이 경위국장을 맡으면, 경위국의 중간간부들이 못마땅하게 여길 것이고, 암중으로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 취임한 국장의 지휘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게 된다. 그래서, 시진핑은 결국 할 수 없이 면직시켰던 전국장을 다시 불러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면직과 재임명을 거치면서 왕샤오쥔도 어느 정도 영리해졌을 것이다.

최근 중공고위층의 베이다이허 휴가부터 시작하여 중국정변론의 촛점은 다시 그곳으로 옮겨갔다. 기실, 베이다이허의 경위제도는 베이징과 같다. 누가 어떻게 정변을 시행한단 말인가?

동아시아국가중에서 정변에서 암살에 성공하고 실패한 사례가 있다. 그것은 바로 1979년 10월 26일 한국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궁정동의 안기붕안가에서의 연회장소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그는 바로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이다. 암살후, 군대측의 협조를 얻지 못해 김재규기 기획한 정변은 실패하고, 그는 교수형을 당한다. 한국의 정치역사드라마 <제5공화국>의 첫 3편이 바로 이 쿠데타 실패의 경위이다. 이것도 정변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