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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옹정제)

옹정제(雍正帝)의 죽음

by 중은우시 2024. 5. 21.

글: 무풍각기념(无风却起念)

1735년 8월 20일, 대청제국의 옹정제가 돌연 병으로 쓰러지고, 3일후 총총 세상을 떠난다. 영명하고 냉혹한 것으로 알려진 이 황제의 사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왜 그의 죽음에 대하여 <청세조실록>에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그저 간단한 몇마디만 남겼을까?

옹정제의 병이 발발하고나서 붕어할 때까지 짧으 3일동안 자금성의 안팎은 혼란에 휩싸인다. 시종 권력의 최고봉에서 정국을 조종하던 옹정제가 어찌 돌연 병사하게 되었을까, 그것도 이렇게 빠르게? 황제의 돌연한 사망은 어느 왕조에서이건 작은 일이 아니다. 세부적인 사항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궁중시위의 말에 따르면, 옹정제는 병이 발발하기 전에 조정업무로 계속 바빴다. 비록 몸이 피로한 상태이긴 하지만 여전히 문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밤을 새워 일했다. 그가 발병하기 며칠 전에는 옹정제가 변방의 중요한 업무에 관한 상소문을 처리했고 조그만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러나, 병마는 그가 근면하다고 하여 피해가지 않는다. 돌연한 질병은 이 제왕의 몸에 신속히 침입한다.

설마 정말 민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옹정제의 돌연한 사망은 그의 도교의 장생불로술에 집착한 것과 관련이 있을까?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옹정제는 연단술(炼丹术)에 큰 흥미를 나타냈고, 궁안으로 계속하여 수은이 함유된 광물이 들어와서, 단약(丹药)을 제조하는데 쓰였다. 수은과 기타 중금속이 장기간 축적되면 급성중독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이미 신체가 허약해진 황제에게는 치명적인 것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옹정제의 죽음은 아마도 궁정의 내부권력투쟁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옹정제가 즉위하는 길은 평탄하지 않았고, 탈적지쟁에서부터 등극후의 정적제거까지 모든 걸음걸음은 피비린내가 충만했다.

비록 직접적인 증거는 부족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점은 모든 황제의 죽음이 조정의 권력구조를 바꾸게 된다는 것이다. 옹정제의 돌연한 죽음은 많은 구세력이 다시 판갈이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황사자(皇四子) 홍력(弘历, 나중의 건륭제)는 부친이 사망한 후 신속히 국면을 장악한다. 이는 일찌감치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 사료기재에 따르면, 홍력은 옹정제의 병이 위중할 때 항상 곁을 지켰다. 이 총명하기 그지없는 황자가 어찌 부친의 병세에 대해 전혀 모를 수 있겠는가?

옹정제의 죽음은 아마도 한가지 질병으로 인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급격한 병세악화에서 후궁의 여러가지 심상치 않은 모습들을 취합하면 아마도 수수께끼를 푸는 단서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상이 어떠하든 간에, 옹정제의 죽음이 대청제국에 미친 영향을 아주 심원하다. 그의 사망은 건륭제의 등극을 초래하고, 나중의 정치개혁의 바탕이 된다.

옹정제가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홍력은 아들이자 신황제로 용상에 안정적으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신속히 대청제국의 조정대권을 장악한다. 이같이 신속한 권력교체는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하고 질서있게 이루어진 것같지만, 그 배후의 음모와 권모술수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옹정제의 통치를 되돌아보면, 그의 정책과 개혁은 중앙집권을 공고히 하는 것이고, 국가의 재정과 군사역량을 증강시키는 것이었지만, 이는 적지 않는 반대와 불만의 목소리를 불러왔다. 옹정제의 생전 최대의 적수는 외적이 아니라, 조정내의 권력투쟁과 정치음모였다. 그의 혹정과 의심은 거의 전체 황족과 관료시스템에 미쳤다. 이러한 장기적인 고압정치는 많은 정치적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죽음은 특히 명확한 흔적이 없던 상황하에서 돌연 발생하였으므로, 더더욱 궁중에서 적지 않은 풍파를 몰아왔다. 황위를 승계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황자는 부득이 자신의 입장과 전략을 다시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찌감치 암중으로 움직이던 정적 혹은 맹우는 아마도 이 순간에 이빨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외에 옹정제는 도교와 단약에 대한 미신을 가졌고, 이는 그의 내심 깊은 곳에서의 불안과 장생불로에 대한 집착과 추구를 엿볼 수 있다. 이런 심리상태는 그의 말년에 최고조에 달한다. 그리하여 그의 의사결정과 생활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불행하게도 이런 추구는그를 장수할 수 없게 만들었고, 오히려 그의 죽음을 재촉했다.

결론적으로, 옹정제의 죽음은 한 통치자의 생명의 종결일 뿐아니라, 대청제국의 중요한 한 역사단계의 종결을 의미했다. 그가 남긴 정치적 유산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역사학자와 후인들이 연구할 중요한 이슈가 된다.

옹정제같은 역사인물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그의 일생과 죽음을 평가해야 할까? 그의 정치적 성취와 그의 개인적인 비극은 또 후세에 어떻게 기록하고 평가해야 할까? 이들 문제는 아마도 청나라역사를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이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마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역사의 조각을 모아서 더욱 전면적인 진상을 복원해보려고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