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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스포츠

룽궈퇀(容國團): 중국탁구 최초 금메달리스트의 비참한 최후

by 중은우시 2025. 2. 5.

글: houshankou

그는 일찌기 중국이 탁구에서 세계최초로 금메달을 딴 사람이며, "인생에 몇번이나 기회를 잡을 수 있겠느냐?"는 명언은 많은 중국인들의 마음을 분발하게 만들었던가? 1968년 6월의 어느 날, 그는 양압장(養鴨場)의 한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했고, 바닥에는 많은 담배꽁초와 3통의 유서를 남겼다. 룽궈퇀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1959년, 룽궈퇀은 제25회 세계탁구선수권전 남자단식 금메달을 획득한다. 이는 중국체육계에서 최초로 획득한 세계대회 금메달이다. 그는 이로 인하여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 영웅으로 자리잡는다. 같은 운동선수인 황슈전(黃秀珍)은 룽궈퇀이 명성을 날린 후 그와 인생을 함께 하게 된다.

룽궈퇀이 명성을 떨친 후 그를 따르는 여자들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그는 세계챔피언이 되기 전부터 황슈전과 알고 지냈다. 그녀는 룽궈퇀과 마찬가지로 광둥(廣東)출신이고, 당시 어느 정도 명성이 있던 룽궈퇀은 홍콩을 대표하여 광저우로 돌아와 시범경기를 가졌다. 황슈전은 육상대표팀내의 몇몇 동료들이 부추기는 바람에 그들과 함께 룽궈퇀의 경기를 보러가게 된다. 시합이 끝난 후 다시 팀동료들과 함께 스타인 롱궈퇀에게 다가가서, 악수를 하게 되고, 이때의 만남으로 룽궈퇀은 황슈전의 얼굴을 기억하게 된다.

황슈전과 룽궈퇀의 두번째 만남은 2년후이다. 그해에 룽궈퇀은 제25회 세계탁구선구권 남자단식 금메달을 딴 이후이고, 하룡(賀龍) 원수가 특별히 탁구선수들을 위해 댄스파티를 열었다. 탁구대표팀에는 인원수가 많지 않아서, 지도자는 훈련국의 각 국가대표팀에 대표를 댄스파티에 파견하도록 하였고, 황슈전도 그 중의 한명이었다. 댄스파티후에 룽궈퇀은 적극적으로 황슈전과 얘기를 나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룽궈퇀이 나를 향해 걸어왔을 때 가슴이 쿵쾅거렸다." 룽궈퇀의 첫마디는 이러했다: "어떻게 너도 여기에 왔느냐?"

같은 해 5월, 루마니아 육상팀이 중국을 방문하고, 황슈전이 있던 중국육상국가대표팀도 텐진으로 간다. 우연하게도 탁구국가대표팀도 그때 텐진에 있었다. 황슈전과 룽궈퇀은 다시 텐진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룽궈퇀은 황슈전의 코치를 통해 메모쪽지를 황슈전에게 전달하여, 저녁에 같이 시합후의 만찬에 참석할 것을 요청한다. 황슈전은 메모쪽지를 본 후에 주머니에 집어넣고, 오후 시합에 열심히 뛰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시합이 끝난 후, 룽궈퇀이 직접 그녀를 찾아와서 말한다: "만찬이 취소되었으니, 갈 필요가 없다. 우리 같이 나가서 시내구경이나 하자!" 그날 저녁, 여러 운동선수들이 시내구경을 하러 나갔고, 룽궈퇀과 황슈전이 연애한다는 소식이 금방 퍼지게 된다.

룽궈퇀과 황슈전은 연애를 시작한 후에도 생활이 아주 단순했다. 두 사람 모두 합숙훈련중이었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들의 데이트는 기본적으로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룽궈퇀과 황슈전

룽궈퇀은 스타운동선수의 허세같은 것은 없었다. 황슈전은 이렇게 기억한다: "그는 내향적이고,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쉽게 다가가기 어렵다는 착각이 들게 한다. 실제로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뭐든지 얘기하는 스타일이다. 그는 좋아하는 범위가 넓었으며, 음악도 좋아했다. 특히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좋아했다." 황슈전은 룽궈퇀과 결혼한 후에 생활이 단순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주 행복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갑작스러운 풍파가 닥친 것이다. 1966년 12월하순의 어느 날 룽궈퇀은 해외에서 시합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러나 그가 익숙한 훈련장을 찾았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예전에 활발하게 돌아가던 훈련장이 지금은 잡다한 물건이 쌓여 있고, 탁구대는 한켠에 세워져 있었으며, 탁구대위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고, 홍색 견장을 찬 홍위병들이 곳곳에 대자보를 붙여서, 불안한 분위가가 가득했다.

금방, 룽궈퇀에 관한 각종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당시의 말대로라면, 운동선수는 성적이 좋으면 좋을수록, 금메달을 따면 딸수록 반동이라는 것이다. 이는 룽궈퇀에게는 엄청난 타격이었다.

그외에, 룽궈퇀이 홍콩에서 성장한 경력이 문제가 되었다. "특무혐의"가 그에게 뒤집어 씌워진다. 그와 함께 곤란하게 된 사람은 그의 친구이자, 마찬가지로 홍콩에서 돌아와 국가대표팀의 총감독을 맡고 있던 푸치팡(傅其芳)과 북경팀의 총감독인 장용닝(姜永寧)이었다. 세 사람은 격리조사를 받게 된다. 조반파(造反派)의 모든 것을 때려부수는 미치광이행동은 롱궈퇀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게 만들었다. 당시는 제39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곧 개최될 예정이어서, 그와 팀원들은 출전신청서를 내서, 행동으로 자신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출전신청서는 감감무소식이고, 더욱 큰 풍파가 밀려왔다.

1968년 5월부터 체육계에서는 추가로 계급대오를 정리했으며, 룽궈퇀에게 반성문을 쓰도록 요구한다. 그에게 왜 출전신청서를 냈는지를 추구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룽궈퇀이 해외로 나가서 경기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탁구를 목숨으로 여기던 룽궈퇀에게 있어서, 탁구를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인생의 방향을 잃는 것이다.

나쁜 소식이 계속하여 전해지자, 그와 함께 홍콩에서 대륙으로 돌아온 두 친구인 푸치팡과 장용닝이 차례로 자살해버린다. 두사람의 죽음은 룽궈탄에게 더욱 큰 타격이 된다. 그때 룽궈퇀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고, 그는 계속하여 팀원들에게 물었다: "네 생각에 내가 잘못한게 있느냐?" 그리고 팀원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1968년 6월의 어느날 저녁, 룽궈퇀은 베이징시 충원구(崇文區) 싱푸다제(幸福大街) 9호루의 대문을 열고 나간다. 그날 저녁에는 비투회(批鬪會, 비판투쟁모임)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참석하지 않는다. 그는 처와 어린 딸, 그리고 연로한 부친을 남겨두고, 집에서 멀지 않은 룽탄후(龍潭湖)로 간다.....

자살현장의 "대전문(大前門)" 담배꽁초로 판단해보면, 룽궈퇀은 룽탄후의 호숫가에서 최소한 2,3시간을 배회했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은 이미 당시에 그가 마음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면서 괴로워했는지 알 수가없다. 결국 룽궈퇀의 생명은 이날로 끝이 난다. 신중국 최초의 세계챔피언이 이렇게 죽어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