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애역사(最愛歷史)
1919년 1월 17일, 사회각계대표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상해 포동의 육가취(陸家嘴)의 한 소각로에 진한 연기가 피어 올랐다. 그후 3일 밤낮을 계속하여 태웠다.
코를 찌르는 냄새와 함께 상자당 가격 6,200원짜리 아편 합계 1,207상자가 대총통 서세창(徐世昌)의 명에 따라 소각되는 것이다.
이번 아편소각사건은 비록 그다지 환경친화적이 아니었지만, 민국금연운동의 대표적인 사건이 된다. 더더구나 중국의 "아편역사의 기념할만한 한페이지"라고 말해진다. 북양정부의 아편무역에 반대하는 결심을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민국시기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금연운동이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아편중독자가 아편을 끊는 것이 곤란한 것처럼 계속하여 아편문제는 반복되었고, 금지하면 할수록 더욱 퍼져나갔다.
아편의 해독은 시종 해결이 되지 않았다.
옛날 호문(虎門)에서 아편을 소각할 때는 외국에서 수입된 아편을 소각한 것이지만, 이번 아편의 폐해는 국내에서 온 것이 더욱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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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말기 아편에는 "양약(洋藥)"과 "토약(土藥)"으로 나뉘었다. "양약"은 외국에서 수입한 아편이고, "토약"은 국산아편이다.
아편전쟁이후, 청나라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열강들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했고, 거액의 전쟁배상금과 군수비용으로 청나라조정의 재정은 설상가상이 되어 아주 힘들었다.
재정압력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청나라정부는 하나의 묘책을 생각해낸다. 그것은 아편무역합법화로 양약에 관세를 징수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풍성한 세수를 거두게 된다. 1858년 <천진조약>에서 청나라조정은 "양약의 수입을 허용한다. 매 백근당 세금 30냥으로 정한다."고 규정하게 된다.
양약은 중국에 들어온 후 관세를 납부해야 했고, 관문마다 통과비를 내야 했다. 청나라정부는 이로 인해 많은 돈을 거둔다. 1908년, 청정부의 총세수는 2.92억냥인데, 그중 아편세수가 3,302만냥에 달한다. 전체 재정수입의 11.3%에 이른 것이다.
이와 동시에,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하여 청나라조정은 외국에서 기술을 도입하여, 민간에서 아편을 자체생산, 자체판매하도록 장려했으며, 전국각지에서 널리 아편의 원식물인 앵속(罌粟)을 심었다.
앵속은 비록 아름답지만 그 해는 무궁했다. 그러나 폭리의 유혹으로 농민들은 앞다투어 앵속을 심는다. 그리고 쌀등 곡물은 버려지고 돌보지 않았다.
19세기말에 이르러, 앵속은 대강남북에서 활짝 꽃을 피운다. 장성의 안과 바깥, 산서, 섬서, 감숙, 흑룡강, 강소, 절강, 복건, 운남, 귀주, 사천에서 가장 성행했다.
그중 귀주는 원래 농업이 발달하지 않았다. 소위 "지무삼척평(地無三尺平), 천무삼일청(天無三日晴), 인무삼푼은(人無三分銀)"(땅은 편평한 땅이 세자가 되지 않고, 하늘은 맑은 날이 삼일이 넘지 않으며, 사람들이 가진 돈은 삼푼이 되지 않았다)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온통 앵속을 심게 되고, 생산된 아편은 다른 성으로 판매되었다.
광서연간, 심지어 앵속을 너무 많이 심어서, 농업생산이 쇠퇴하여, "곡물과 쌀값이 날로 비싸졌으며, 먹을 것이 없어졌다. 흉년이건 풍년이건 가리지 않았다. 즉, 풍년이 들어 수확이 많더라도, 쌀값은 떨어지지 않았고, 농지에서 생산된 것으로는 국내백성들이 먹기에 부족할 정도였다."
1877년에서 1878년까지, 화북지구에서는 "정술기황(丁戌奇荒)"이 발생한다. 보기드문 특대형 재난이었다. 그리하여 1천만명이 굶어죽고, 2천여만명이 유리걸식했다. 산서순무 증국전(曾國荃)은 이렇게 상소를 올린다: "메마른 땅이 천리가 넘고, 굶주린 백성이 오육백만명에 이른다. 이런 엄청난 재난은 고대로부터 본 적이 없다."
이 비극의 원인은 계속되는 가뭄외에, 널리 아편을 심어 곡물파종면적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당시 산서의 전체 성의 530만무의 경작지 중에서 토질이 가장 좋은 60만무에는 모두 앵속을 심었다. 그러다보니 전체 성의 양식생산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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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은 먹는 것조차 문제되고 있는데, 그래도 앵속을 심으려 했다. 왜 그랬을까? 그건 이윤이 높기 때문이었다.
통계에 따르면, 청말민초의 귀주성에서 같은 토지에 앵속을 심으면 이윤이 소맥을 심는 것보다 4-6배에 이르렀다. 그리고 운남에서는 앵속 1계절의 수입이 토지가격의 1/4에 해당했다. 이렇게 되니, 가난한 백성들은 자연히 그쪽으로 마음이 움직이게 되고, 기근이나 재해는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소비는 모든 생산의 유일한 목적이다.
청말에서 민국까지, 아편흡입자는 날로 늘어간다. 연관(煙館)은 각지에 생겨나고, 온 나라가 미친 듯이 피워댔다. 남녀노소가 모두 중독자였으며 아편을 흡입하지 않으면 시대조류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되었다.
아편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것도 일상적인 습관이 되어버린다. 매파가 사람을 소개할 때 하루에 아편 몇전을 피운다는 식으로 말했다. 많이 피울수록 집안에 재산이 더 많다는 것이다. 부귀한 집안에서 혼레때 심지어 몇 개의 연탑(煙榻)을 놓아두는지를 따졌다. 아편흡입으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 전체 마을에서 가장 멋진 모습으로 여겨졌다.
아편흡입자는 각계각층이 모두 포함되었다. 앵속을 심는 곳중 하나인 감숙은 편벽한 곳이어서 상업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 어떤 때는 길거리에 음식이나 물건을 파는 상점도 없는데, 공개적으로 아편을 파는 가게는 적지 않았다. "일각(一角, 각은 원의 1/10)의 돈으로 좋은 아편을 구매할 수 있으니, 물미가렴(物美價廉)이었다."
당시 사람들의 보도에 따르면, 감숙은 비록 가난하지만, 보관하고 있는 아편은 전체 성이 15-20년간 쓸 수 있는 양이었다. 즉 뭐든지 부족한데, 오직 아편만은 부족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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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이 이처럼 창궐하면 언젠가는 끝장이 날 수밖에 없다. 신해혁명후 손중산은 도저히 그냥 두고볼 수 없었다.
1912년 3월, 손중산은 금연령을 반포하여, 민국금연의 첫 발이 울리게 된다.
런던 각 대사관에 보낸 공개서신에서, 손중산은 이렇게 썼다: "아편은 중국의 큰 해악이다. 그것은 우리 국민을 죽이고, 전쟁, 전염병, 기근보다도 심하다. 나는 지금 공화정체를 건설했으니, 이 독을 없애는데 성공하기를 바란다."
혁명당인은 손중산의 금연사상을 따라, 엄격한 법률로 아편고질을 뿌리뽑고자 했다. 심지어 아편판매를 계속하면 극형에 처하기까지 했다. 호남성 하나에서만 아편판매로 총살당한 사람이 수십명에 이르렀다.
어떤 성에서는 군대가 출동하여 금연운동을 추진했다. 예를 들어, 절강성의 제6사단 11여단의 여단장 장재양(張載洋)은 전성금연독판을 맡아, 병력을 보내 각지를 순찰했고, 일단 아편을 팔거나 피우는 것을 발견하면, 일률적으로 군법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섬서의 장봉망(張鳳罔)은 4개의 동찰(銅鍘, 작두)을 만들어 문앞에 진열했고, 아편판매자를 겁주고자 했다.
<신보>의 편집자는 아주 유머스러웠다. <홍루몽>의 <호료가(好了歌)>를 모방하여 이런 타유시(打油詩)를 지었다: "세인도도혁명호(世人都道革命好), 유우연귀고사료(惟有煙鬼苦死了), 동타서장무외도(東躱西藏無外逃), 일경사출명몰료(一經査出命沒了)"(세상사람들은 모두 혁명이 좋다고 말하는데, 유독 아편쟁이는 괴로워죽을 지경이다. 이리 저리 숨겨도 도망칠 곳이 없네. 일단 조사해서 걸리면 목숨이 날아간다."
손중산이 하야한 후, 비록 정치적 견해는 달랐지만, 대총통에 취임한 원세개도 굳건한 금연인사였다. 1913년, 북양정부는 전국금연회의를 개최한다. 각성에서는 대표를 파견했고, 금연건에 대하여 논의한다. 그후 전국금연연합회가 성립된다.
"아편쟁이"에 대하여는 원세개가 전혀 용서하지 않았다.
한번은 북양군내에 한 병사가 민간연관으로 가서 아편을 피우다가 발각된 적이 있다. 원세개는 바로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고자 했다.
군대내의동료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리하여 오백여명을 모아서, 모두 자신도 아편쟁이라고 말하면서 파업항의를 하면서 원세개에게 용서해줄 것을 청했다.
원세개는 두 말하지 않고 아편을 피운 그 병사를 처형하고 이렇게 말한다: 나머지 공개적으로 항의한 '아편쟁이'들은 오는 대로 모두 처형하겠다고. 그러자 놀란 오백여명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북양시기, 여러 성에서 금연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둔다. 호남, 안휘, 산동, 직예와 광서등 십여개성에서는 앵속재배를 금지한다.
멀리 서남변방에 있는 운남성은 아편이 가장 성행했다. 도독 당계요(唐繼堯)는 중앙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아편금지조례와 순시규칙을 만든다. 그리고 부하들로 하여금 농민들에게 앵속을 심지 못하게 권유하고, 일단 발견하면 뽑아서 처분하도록 지시한다. 만일 지방관이 앵속을 심는 사람을 발견하면 심은 사람은 총살형에 처하고, 토지는 몰수하도록 한다.
당계요의 금연정책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다. 1917년에 이르러 중영쌍방의 금연대표가 운남을 조사할 때, 운남의 여러 곳에서는 기본적으로 아편을 심지 않고 있었다.
해악이 큰 앵속화는 이렇게 사라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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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속을 심는 사람은 손에 담뱃대를 들고 있을 뿐아니라, 실탄이 든 총도 들고 있었다.
원세개가 죽은 후, 국내정국이 혼란에 빠진다. 대소군벌들이 나타나고, 방대한 군비지출을 감당하기 위하여, 부득이 이윤이 큰 아편에 의존하게 된다.
1925년에 이르러, 길림, 산서 두 성에서 여전히 금연을 실시하는 외에, 나머지 성에서는 앵속이 다시 범람한다. 각성의 아편세금은 한때 군비총지출의 40-80%를 점했다.
1919년이후 어떤 성에서는 만일 현지정부의 계획에 따라 앵속을 심지 않으면 무당 13원의 세금을 "백지관" "공지세"로 내야 했다. 그리고 일부 성에서는 앵속을 심지 않는 농민에게도 "나연(懶捐)"을 거두었다. 결국 연세와 동등한 세금을 거둔 것이다.
아편은 심지어 거래시 화폐역할도 했다. 일반적으로 대출할 때 아편을 기준으로 했고, 노동자들도 급여를 아편으로 받았다.
중국서남의 운남, 사천, 서강과 귀주는 아편재배가 날로 성행하여, 세계제일의 생산규모가 되었다. 매년 아편을 수확하는 계절이 되면 이런 기묘한 현상이 벌어진다. 각 성의 백은은 모두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이동하고, 서남의 아편은 동쪽으로 이동한다.
운남산은 국산아편중의 상품(上品)이었다. 색과 향, 그리고 맛이 모두 뛰어났다. 일찌기 운남에서 아편을 금지시켰던 당계요는 군사비지출을 위하여 다시 금지를 해제하고 아편을 심도록 강요한다. 1923년, 운남의 앵속재배면적은 70만무에 달한다. 2년후, 운남의 아편세수는 300만원에 이르고, 전체 재정수입의 30%를 차지했다.
운남에 이웃한 귀주도 아편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
1922년, 원조명(袁祖銘)이 귀주를 다스린다. 직접 연세를 징수하는 주향국을 사령부로 이동시킨다. 그리고 "염연(鹽煙)을 위주로 하는" 재정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연세를 배로 올려 통관세를 담(擔)당 120원으로 했다.
당시 귀주의 아편세수는 800만원에 달했다. 아편이 외성으로 판매되면 가격이 10배로 뛴다. 원조명은 매번 군대를 보내 한구까지 운송하고, 돌아올 때는 군수물자를 가득 싣고 왔다. 이를 통해 실력을 크게 키운다.
당계요는 원조명의 아편사업을 보고는 눈이 벌개진다. 그리하여 1923년 전검지전(滇黔之戰, 전은 운남, 검은 귀주)을 일으켜, 군대를 이끌고 귀주로 쳐들어간다. 서남버전의 아편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우세한 병력으로 전군은 원조명의 검군을 사천경내까지 쫓아낸다. 그리고 이 아편밭을 차지한다.
원조명은 이에 불복하여 주서성(周西成)이 이끄는 또 다른 검군과 결맹을 맺고, 두 사람은 정략결혼을 시키며 힘을 합쳐 전군을 공격한다.
1925년 주서성, 원조명이 이끄는 검군의 반격으로 전군은 귀주에서 쫓겨난다. 원조명은 다시 귀주의 앵속밭을 차지한 것이다.
다음 해, 주서성이 귀주성장이 된다. 그는 공개적으로 "땅이 있으면 반드시 심어라. 아편이 아니면 부자가 될 수 없다" "아편을 피우는 것은 허용하나, 성매매와 도박은 허용하지 않는다." 귀주의 아편사업은 잘 나갔고, 돈을 세느라고 팔의 근육이 아플 정도였다.
나중에 골든트라이앵글의 마약두목들은 마약거래를 통하여 지방무장세력을 건립했는데, 그것은 중국군벌들에게 배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관련자료통계를 보면, 1929년에서 1933년까지의 사이에, 중국의 앵속재배면적은 약 8000만무였다. 매년 생산되는 아편은 6000킬로그램, 약 120만해관담이었다. 그중 섬서, 감숙, 운남과 사천이 4대아편생산지역이었다.
당시, 중국에서 생산하는 아편총량은 전세계 아편총량의 5/6였다. 다른 각국에서 생산하는 아편 합계의 5배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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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을 심는 사람들은 배경이 만만치 않다. 아편은 판매 운송하는 사람들도 간단한 사람들이 아니다.
방회(幇會)의 발전은 아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남의 가로회(哥老會), 장강하류의 청방(靑幇)은 모두 아편의 고액이윤이 필요했다. 농촌경제의 쇠퇴에 따라, 1920년대, 많은 유민들이 방회로 유입되고, 방회세력은 날로 커진다. 1927년 국민정부 농민부의 추산에 따르면, 전국의 유민수는 2천만명에 달했다.
상해는 근대 중국흑사회세력이 가장 집중해있고, 가장 방대했던 지방이다. 또한 극동최대의 아편판매중심이기도 했다.
20세기초,. 조주(潮州)의 연상(煙商)이 성립한 공평공사(公平公司)는 일찌기 전체 상해 아편업계의 대표였다. 조주연상의 지도자는 정사태야(鄭四太爺)와 곽자빈(郭子彬)이었다.
정사태야는 민국시대 저명한 영화인이자, 상해명성전영제편공사의 오너인 정정추(鄭正秋)의 할아버지이다. 그가 창업한 정흡기(鄭洽記)는 상해 최대의 아편업체중 하나였다. 아편을 영국인에게 판매하여 부를 쌓았고, 상해 조주방의 우두머리가 된다.
적지 않은 조주연상들은 정사태야와의 관계를 통해, 해외와 아편무역을 진행한다. 혹은 도매, 소매의 방식으로 상해의 영국조계, 중국지역 및 포동등에서 판매를 진행하거나 혹은 아편을 장강유역의 각성으로 운송하여 판매한다. 모든 조주연상은 모두 자신의 운송판매노선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전문적으로 안휘노선을 뛰었고, 어떤 사람은 진강노선을 뛰고, 서로간에는 최대한 협력을 했다.
주방장출신의 곽자빈은 친민(親民)노선을 걷는다. 곽자빈은 최초로 상해에 곽홍태연토점(郭鴻泰煙土店)을 연다. 그는 직접 매대앞에 서서 손님을 끈다. 그는 아편쟁이들 사이에서 명망이 있었다.
곽자빈의 매대에는 항상 흰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많은 고객들은 흰고양이를 가지고 다른 아편쟁이들과 만날 약속을 잡았다. 아편을 살 때는 흰고양이가 있는 곽자빈의 매대에 와서 사갔다. 그렇게 곽자빈의 사업은 날로 흥성한다.
조주연상은 상해탄에서 한때 풍운을 질타했다. 아편을 널리 영국, 프랑스, 일본까지 판매한다.
그러나, 제1차새계대전이후, 복잡한 국제형세로 인하여 조주연상은 일본,이란등 나라와의 무역에서 연이어 큰 손해를 본다. 그리고 군벌혼전에 말려들어 금방 쇠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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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연상이 점차 쇠락할 때, 상해조계에 또 다른 아편판매와 운송을 독점하는 "삼흠공사(三鑫公司)"가 출현한다. 창시자는 그 유명한 황금영(黃金榮), 두월생(杜月笙), 장소림(張嘯林)의 삼대형(三大亨)이다.
처음에, 삼흠공사는 청방이 아편이 속속 절취되고 강탈당하는 난상을 막기 위하여 만든 조직이다. 주요 업무는 아편상에게 운송, 판매등을 보호해주고 보호비용은 화물총액의 10%를 받았다.
그러나, 회사를 개설한 후, 신속히 전체 상해탄의 아편운송과 판매를 독점하게 된다. 그리고 상해에서 아편을 판매하려면 반드시 삼흠공사의 인화(印花)를 붙여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판매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편판매를 독점하는 초대형아편회사가 되고, 나아가 상해 아편사업의 번영을 촉진하게 된다.
1923년 8월 <자림서보(字林西報)>에서 공개한 바에 따르면, 이 회사의 1년수익은 3,000만원에 달했다. 이 숫자는 당시 중앙정부 재정수입의 10분의 1에 상당한다.
삼흠공사가 상해아편사업을 통일한 후, 상해군경, 조계당국의 지지를 받는다. 그들이 참여한 아편의 운송과 판매에 대하여는 군경도 건드리지 않고, 검사를 하지 않았다.
군정인사들과의 결탁을 통하여, 삼흠공사는 수하들과 아편판매상을 극력 보호한다.
한번은, 상해경비사령부의 사령관 대극(戴戟)의 수하가 아편을 제조하는 '백면대왕(白面大王)" 진곤원(陳坤元)을 체포한다. 진곤원은 청방 구성원이고, 두월생이 보호하고 있었다.
두월생이 이 일을 알고 즉시 감옥을 급습하여 진곤원을 구출해 낸다. 그러나, 이 사건은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된다.
나중에 국민정부가 금연정책을 시행하면서, 두월생은 다시 변신하여, 상해시 금연위원회의 3명의 상임위원중 한명이 된다. 삼흠공사는 계속하여 상해 및 전체 강남지역의 아편업을 장악하고 있었다.
상해는 전국 아편업의 판매, 운수의 총본산이 된다. 전성기때는 하급연관만 2만여곳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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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의 범람에 대하여, 민국의 역대정부는 모두 대책을 취했다. 예를 들면 첫부분에 말한 것처럼 1919년 북양정부가 상해에서 아편을 소각한 일이 있다.
1927년, 남경국민정부가 성립된 후, 손중산의 금연유훈을 받들어, "금연위원회"를 설치한다. 장지강(張之江)이 주석을 맡는다. 그는 한때 민중들에 의해, "제2의 임칙서"로 불린다.
1928년 11월, 전국제3차금연회의에서 장개석이 직접 참석하여 치사를 한다: "금연의 일은 국가사회 및 민족생존에 관련된다. 금연위원회는 뇌려풍행(雷厲風行)해야 하고, 파제정면(破除情面)해야 하고, 현지로 가서 해야 한다. 먼저 중앙부터 시작하여 모범을 보여야 한다. 아편을 피우거나 운송하는 자에 대하여는 중앙이 철면무사로 엄격히 처리하고 절대로 봐주어서는 안된다."
난감한 일은 겨우 반년후에 "강안륜(江安輪)(아편밀수사건"이 벌어진다.
1928년 11월 22일 새벽, 상해시경찰은 남경에서 상해로 운행하는 강안륜여객선에 대량의 아편이 실려 있다는 정보를 얻는다. 그리하여 경찰을 보내 수색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 아편은 상해경비사령부의 군대가 호송에 참여하고 있어서 제지할 수가 없었다.
경찰과 군대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 결국 팔이 다리를 이길 수는 없다. 쌍방의 다툼이 시작되었고, 군대는 오히려 경찰을 체포하여 경비사령부에 가둔다. 그후 엄청난 수량의 아편이 조계로 운송된다.
사건발생후, 국내외신문은 신속히 이를 보도한다. 각계인사들은 이 사건을 엄격히 조사하도록 요구한다. "이 사건은 중국정부, 국민의 금연에 대한 성의와 능력에 대한 시험이다."
장개석은 장지강에게 전보를 보내, 그로 하여금 모든 범인을 남경으로 압송하여 수사하도록 지시한다.
장지강은 상해로 간 후, 이 사건의 배후는 너무 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밀수자의 배경은 국민정부의 재정부장 송자문(宋子文)이었다.
비록 장지간이 사건사실을 파악했지만, 기자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이 사건은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다만 조사결과를 보면, 본인은 공안국의 이유가 더 맞다고 본다." 그러나 최후의 처리결과는 사실과 완전히 반대되었다.
얼마 후, 장지강은 사직한다. "제2의 임칙서"는 그와 같은 강골은 아니었던 것이다.
상해시공안국장 대석부(戴石浮)는 정직당한다. 이유는 놀랍게도, "공안국장 대석부가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군대측이 무장하여 아편을 운송했다는 내용이 신문에 실리게 하여 혁명군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1929년, 이 사건은 상해지방법원에서 심리를 거친 후 아편이 모조리 소각된다. 그리고 강안륜의 3명의 선원을 희생양으로 삼는데, 가장 큰 형을 받은 사람이 "유기징역 1년 6개월"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된다.
대형사건이 이렇게 종결되었고, 막후의 주모자는 털끝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이는 금연위원장의 뺨을 세게 때린 샘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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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신생활운동이 전개되면서 장개석은 다시 "양년금독, 육년금연"의 계획을 내놓는다.
내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그후 2년간 전국에서 체호한 아편,마약사건이 9만여건에 이른다. 사형에 처해진 사람이 2,378명에 달한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현지관리들에게 아편을 금지할 생각이 있더라도, 각방면의 세력들로부터 여러가지고 견제를 받았다.
안휘성 교통중심지 임회관의 경찰국장 게각안(揭覺安)은 열혈청년이었다. 그는 부임한 후 치안과 금연을 잘 하겠다고 결심한다.
안휘성 주석 유진화(劉鎭華)는 그에게 걱정그러워하며 말한다: "네가 이번에 임회관에 부임하면 거기에 두묵림(杜墨林)이 있다. 그는 임회일대 청방의 우두머리이다. 너는 그 자를 특히 주의해라."
두묵림은 현지의 유명한 아편판매업자이다.
게각안은 부임후, 경찰을 데리고 두공관으로 두묵림을 방문한다. 겉으로는 점잖았지만, 실제로는 그에게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후, 게각안은 현지의 연관을 폐쇄하고, 아편흡입, 판매를 금지했다. 이를 어기면 중벌에 처했고, 엄중한 경우에는 사형에 처한다.
회하양안이 깜짝 놀란다. 담량이 작은 아편쟁이아 아편판매업자들은 경찰을 보면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오직 두묵림의 일당들만에 원래와 마찬가지로 기세좋게 공개적으로 아편을 판매했다. 경찰에 잡힌 후 그들은 이것이 두묵림의 물건이라고 말하면서 협박했다.
게각안은 알고 있었다. 아편을 금지시키려면 두묵림이라는 심복대환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 게각안은 민국버전의 "파빙행동(破氷行動)"을 벌인다. 부하를 이끌고 두공관으로 쳐들어가서 두묵림을 그 자리에서 죽여버린다.
얼마 후, 게각안은 성회로 가서 업무보고를 하면서, 유진화에게 이 일을 보고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큰 공을 세웠다고 여겼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유진화는 그 말을 듣고 탄식한다: "일을 너무 크게 벌였구나!" 그후 그는 게각안에게 사직하고 임회관을 떠나라고 한다.
과연 그가 말한대로, 게각안이 임회안으로 돌아오자, 두묵림의 부인이 보낸 사람에게 맞아죽는다. 그후 임회관의 아편은 이전보다 더욱 창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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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고압적인 정책하에, 금연은 왜 이렇게 어려웠을까? 아마도 장개석도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1939년까지, 그는 사천성주석을 겸직하면서 직접 사천금연독판공서를 주재했다. 그러면서 금연업무의 어려움을 직접 느낀다.
사천은 바로 당시 아편의 중요생산지였다.
1940년, 국민정부의 "육년금연계획"의 마지막 1년이다.
의빈(宜賓)현성에서는 "아편이 완전히 금절되었다"고 경축대회를 열었다. 현장이 연설을 하고, 대회장에서 2,000여냥의 아편을 소각한다. 회의후에는 북문밖에서 두 명의 아편판매업자를 총살한다. 나중에 이 현장은 금연의 공로로 승진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진상은 이러했다. 경축대회 당일, 대회장에서 불과 수십미터 떨어진 연관에서는 아편쟁이들이 여전히 아편을 피우고 있었고, 현장의 연설원고는 그의 비서가 쓴 것이었는데, 그 비서는 현내에서 모두가 알고 있는 유명한 아편쟁이였다.
사천의 거부 증준신(曾俊臣)은 아편으로 성공한 "아편대왕"이다. 사천 11개 은행과 수십개 회사를 가지고 있었고, 사천, 호북, 운남, 귀주등에서 호풍환우했다.
사천의 금연운동에서, 적지 않은 아편판매업자들은 파탄났지만, 막후거물 증순신은 전혀 다치지 않았다. 아편사업은 여전히 잘 되었고, 중경경비사령관 하국광(賀國光)등 국민정부 요인들과는 호형호제하면서 지냈다.
나중에, 사천금연독판공서 과장을 지낸 이화(李驊)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무기력하게 썼다: "사천, 서강의 아편을 절대로 근절할 수 없었던 원인은 당연히 여러가지 요소가 있다. 중앙에서 지방을 안정시키려는 고심때문에 끼리던 점도 있었다."
이렇게 하여 해답이 없는 문제가 되어버린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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