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만군(程萬軍)
범문정(范文程)은 대명왕조의 신민(臣民)들의 눈에는 확실히 "한간(漢奸, 매국노)"이다. 그러나, 민족절개를 별론으로 하고, 재주만을 보자면 그는 인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그의 상대방, 적수들까지도 이 질문에 부정적인 답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확실히 인재이다.
"한간" 범문정은 대청왕조의 기반의 절반을 닦아주었다. 그는 중국의 사정을 잘 알고, 문제에 대한 조치방법에 대한 '악독한 아이디어'를 많이 냈다. 그리하여 후금(後金, 나중의 청나라)이 완전히 탈태환골하여, 유목의 나라에서 중원대지를 통일한 대청제국으로 변모하게 만들었다.
비록 범문정의 "한간"으로서의 악명은 높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아주 뛰어나다. 명나라의 원숭환와의 대치에서 범문정의 반간계는 청태종으로 하여금 전혀 싸우지도 않고 명나라의 군대를 물리치게 만들어 주었다; 한족들이 항복하도록 하면서, 살길을 열어주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머리카락을 깎으면 머리는 남겨준다'는 악독한 아이디어가 또 나온다. 청나라가 이자성을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멸망시킨데에는 범문정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이 '한간'은 이민죽 주인 밑에서, 대단한 재능을 마음껏 펼쳐 보였다. 사람이 그 재능을 모두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범문정은 진정한 한족 인재이다. 그런데, 왜 후금을 위해서 일하고, 대명을 위하여 일하지 않았는가?
정치망명자의 후손으로서, 그는 본국에서 기용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의 신세내력부터 얘기해보자. 그의 조상을 얘기하자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바로 "정치가, 군사가, 문학가"의 신분을 모두 한 몸에 지녔던 북송의 명신 범중엄(范仲淹)이다. 범분정은 범중엄의 17대손이다. 범중엄의 조부인 범홀(范鍃)에 이르러 일찌기 병부상서(兵部尙書)까지 지낸다. 그러나 범홀은 나중에 당대의 권신 엄숭(嚴嵩)의 미움을 받아 배척당한다. 할 수 없이 관직을 버리고, 온 가족을 이끌고 이사를 가게 된다.
범문정은 요동(遼東)의 심양위(瀋陽衛)에서 태어난다. 1597년의 일이다.
50년후인 1644년. 이 특수한 해에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오삼계는 청나라군대로 하여금 산해관을 넘게 한다. 이같이 풍운의 변화는 예측불가능이었다. 이 50년간은 바로 범문정의 전반기 50년이었고, 가장 빛나는 반생이었다.
난세에 태어나서, 불세출의 재능을 지녔다. 이쪽에서 쓰이지 않으면 저쪽에서 쓰인다. 우리측에서 안쓰면 적에게 쓰이게 된다. 후금진영에 투신한 후, '한간'이라는 악명을 등에 짊어진 범문정은 자신의 재능을 모두 발휘했다. 후금에서 명나라를 침략할 전략을 세우거나, 한족 관리의 반란을 책동하는 것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이외에 후금을 청나라로 바꾸고, 새로운 국가제도를 건설하는 것도 모두 범문정의 손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적국'에서, 범문정의 관직은 갈수록 높아지고, 성과는 갈수록 커졌다. 마지막에는 외족을 도와서 본족정부인 대명왕조를 멸망시킨다.
범문정의 재능은 역사가 증명했다. 절대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적국'의 진영에서, 그는 완전히 '개국공신'으로 자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대명의 본국에서 기용되었다면, 기우는 나라를 완전히 되돌려놓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지혜로 적국을 도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범문정은 대명왕조의 '인재유실'의 하나의 축소판이다. 범문정의 공로는 실로 대명왕조의 '인재유실'의 통한이다.
강산사직은 인재에 의하여 떠받쳐진다. 숭정재는 조정의 인재를 한편으로 기용하면서 한편으로 망쳤다. 고굉지신 중에서 최후를 좋게 맞이한 경우가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숭정황제를 위하여 계산을 한번 해보자. 숭정제가 집권한 이후, 노상승에서 원숭환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고굉지신을 없애버렸던가? 숭정은 17년간 재위하면서, 앞뒤로 50명의 내각을 바꾸고, 14명의 병부상서를 바꾸었다. 죽이거나 자살하게 만든 독사 혹은 총독이 11명이다. 죽인 순무가 11명이고, 자살하게 핍박한 경우가 1명이다. 감옥에 갇치고 구타당하여 간접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전사하게 하거나 자살하게 하거나 사형을 받게 한 고급관리들이 수십명이다.
숭정14년, 즉 멸망 3년전, 감옥에 갇혀있던 대신자격의 관리가 145명에 달했다. 이 숫자는 당시 대신의 자격을 갖춘 인물의 10%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숭정제의 시기를 되돌아보면,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원숭환, 조대수, 노상승, 손전정등등이 모두 걸출한 인재이다. 문관으로는 문진맹, 유종주 등등이 있다. 이들도 괜찮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결말은 모두 비극이었다. 청태종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원숭환과 직언을 한 한림원서길사 정만은 천도만과의 혹형을 받고 죽었다. 농민반란군토벌과정에서 고영상을 포로로 잡고, 이자성을 거의 전멸의 지경으로 몰고갔던 노상승과 손전정은 참언으로 하나는 중벌을 받고 하나는 3년간이나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감군태감의 위세와 조정의 엉터리지시때문에 두 사람은 모두 전사한다. 사망시에 노상승은 39세, 손전정은 51세에 불과했다.
변덕이 심하면서 부지런한 숭정제의 괴롭힘 아래에서 인재들은 두 가지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희생이고, 다른 하나는 투항이다. 결국 숭정제와는 오래 함께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뿐이다.
숭정제의 시대에 최고지도자의 치명적인 결함에다가 관외의 강력한 경쟁자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바람에, 대명왕조의 인재유실은 극심했다. 이 시기에 최고조에 이른다.
대명왕조는 범문정을 버렸고, 결국 망했다. 결국 스스로 뿌린 씨에 자신이 당한 것이다. 가장 심각한 결과는 결국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원래 자신에게 속했던 인재를 매장해버리는 것이다.
원래 대명왕조에게 속했던 인재가 대명왕조의 무덤을 파게 만들었다. 이는 첫째는 대명의 인사체계에 대한 실망이고, 둘째는 대명의 정치체제에 대한 절망이다. 뿌리깊은 관료체계는 '중국식 역도태'를 반복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이것은 바로 '역향도태' 즉 '인재도태'가 중국관료사회에서 이천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원인이다.
만일 범문정이 그의 조부와 마찬가지로 대명왕조에 중용되었더라면, 그가 창을 거꾸로 들고 오히려 다른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을까?
이렇게 보면, 인재들이 반란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은 나라가 그를 그렇게 몰아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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