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전황후(錢皇后): 사상 최강의 치정황후

중은우시 2010. 3. 28. 20:27

글: 노위병(路衛兵)

 

역사는 5천년을 흘렀다. 그동안 치정에 얽힌 사람들도 많았다. 위로는 황궁대내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백성의 집안에까지, 세상 그 어디에 정이 없을 것인가? 남자와 비교하자면, 여인의 치정은 좀더 유미(柔美)하고, 처량(凄凉)한 점이 있다. 많은 치정의 여인들은 수많은 감동적인 순간을 만들어냈고,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역사상 가장 치정적인 여인을 얘기하자면, 필자가 보기에, 명영종(明英宗)의 황후인 황후 전씨(錢氏)를 꼽지 않을 수 없다. 한번 상상을 해보자. 시공을 넘어서 500여년전의 그 탄식이 절로 나오는 토목보의 변을 생각해 보자. 명나라역사의 방향을 바꾼 이 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금과철마(金戈鐵馬)의 정치투쟁뿐만이 아니다. 그 뒤에는 가슴아픈 사랑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상심도 있기 마련이다. 사랑이 깊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상심의 정도도 다를 것이다. 역사상 아마 그 어느 여인도 전황후처럼 가슴아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황제가 오이라트군에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한밤중에 하늘에 닿을 정도로 슬프게 울었다.' 그리고, 전황후는 '몸을 웅크리고 땅바닥에 앉아있다가 다리 하나를 못쓰게 되었다' 오랫동안 땅바닥에 꿇어앉아있다보니 다리 하나를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된 것이다. 그녀의 치정은 자신을 자학하여 폐인이 될 지경이었다. 이뿐 아니라, 전황후는 매일 울고, 밤마다 눈물을 흘리다보니, 다시 '눈 하나를 못쓰게 되었다.' 남은 눈 하나도 시력이 좋지 않았다. 사랑이 이 정도 깊다니 정말 전율이 일 정도이다. 한편에서는 전쟁터에서 도검이 부닥치며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에서는 후궁에서 그리움으로 눈물이 마르고 뼈가 삭는 깊은 정을 느낄 수 있다. 생명과 사랑이 이렇게 부닥치니 서로를 극한으로 몰아갔다.

 

사랑은 사람을 감동시킨다. 진정한 사랑은 여하한 잡물도 허용하지 않는다. 필자가 보기로, 인간세상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무슨 이유도 필요없고, 무슨 수식도 필요없다. 사랑은 상호적인 것이다. 사랑과 사랑은 서로 융합하고 부딪치면서 진정한 사랑의 불꽃을 일으킨다. 쌍방의 애정이 계속 깊어야만, 사랑은 무한히 승화될 수 있고, 진정한 사랑의 극치에 도달할 수 있다. 전황후가 단지 일방적으로 사랑했더라면, 사랑의 감정을 이렇게 모조리 드러내고 이렇게 철저하게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명영종이 전황후를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대하여 지금은 남아있는 자료가 없다. 다만, 우리는 또 다른 각도에서 명영종이라는 사람을 살펴볼 수 있다. 아마도 거기서 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먼저 말해야할 것은 명영종은 성공적인 정치가가 못된다는 점이다. 아주 성공한 황제도 아니다. 그의 정치적 업적은 아마도 그가 인의(仁義)를 베풀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인(仁)은 백성에 대한 관대함과 부하에 대한 인자로 나타났다. 그는 여러번 세금을 줄여주고, 재해을 구조했다. 이를 보면 명영종의 인간성이 선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영종은 피와 살이 있고 사랑이 있는 황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명영종은 아주 피끓는 황제였다. 승패가 어찌되었건간에 토목보의 전투에 그는 친히 전쟁터에 나섰다. 이것은 우선 그가 철골과 혈성의 기질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당시 명영종의 웅자영발한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명영종이 무모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친히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고 하여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영종이 성숙한 정치가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가 피끓는 사나이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만으로도 후세인들이 존경할 만하다.

 

토목보의 변의 원인을 따져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왕진에게 책임을 미룬다. '오이라트의 사신 삼천명이 왔는데, 하사한 물건이 예전만 같지 못해서, 그들이 일을 벌인 것이다.' 오이라트에 대한 하사품은 왕진이 책임자이고, 그것에 불만을 품은 오이라트가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아주 가소로운 이야기이다. 하사품이 많고 적고가 어찌 전쟁의 원인이겠는가?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것이고 그것은 단지 핑계일 뿐이다. 명나라때 환관의 정치간여는 왕진부터 시작해서, 위충현에서 끝난다. 왕진이 총애를 받은 것은 바로 명영종때부터이다. 명영종은 주원장이래로 전해내려온 '환관(내신)은 정무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유훈을 깨트린다. 환관을 총애하는 선례를 남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명영종에게만 책임을 묻기는 힘들다. 명영종의 부친인 명신종때부터 '내서당을 만들어 어린 내시를 뽑았다.' 이때부터 환관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진 것이고, 왕진은 명영종의 곁에서 같이 글을 읽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환관들이 나라를 망친 것에 대하여 통박하는 경우가 많다. 감정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그러나, 황궁내의 권력투쟁은 원래 항상 있는 일이지 이것을 가지고 옳다, 그르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명영종과 왕진은 어려서부터 함께 지냈으니, 자연히 감정이 남달랐을 것이다. 명영종은 '항상 왕진에게 마음이 기울었고, 자주 선생이라고 불렀다." 당시의 명영종은 겨우 십여세의 아이이다. 지금으로 말하더라도, 중학생 정도인 것이다. 그에게 무슨 권모술수를 부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명나라가 멸망한 원인을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범주에 속한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왕진을 총애한 것은 바로 명영종이 정을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정치에 옳고 그름은 없다. 정에도 옳고 그름은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명영종에게서 황제라는 겉옷을 벗겨내고 나면, 그도 보통사람일 뿐이다. 그는 인자하고 선량하고, 혈성이 있고 정이 있었다. 그는 아낄줄 알고, 깊이 사랑할 줄 아는 남자였다. 아마도 그의 유일한 잘못이라면, 제왕가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또 하나의 전형적인 사례가 있다. 전황후는 평생 자식을 낳지 못한다. 이것은 후궁에게 큰 문제이다. 그러나, 영종은 이로 인하여 전황후를 멀리하지 않았다. 이처럼 정을 중시하고 의리를 중시하는 남자라면 절대로 전황후에게 박정하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 고귀한 것은 명영종과 전황후의 사랑에는 여하한 이익이나 투쟁이 섞여있지 않다는 것이다. 명영종은 황후의 친척들이 벼슬도 낮고 집안이 한미한 것을 보고는 그들에게 작위를 주고자 한다. 그러나 황후가 완곡하게 거절하여 실현되지 못한다. 모든 외척들 가운데 황후의 친척들만 작위를 받지 않았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보기 드문 경우이다. 권력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애정이야말로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그래서 전황후는 슬퍼서 울고, 그리워서 울고, 속시원히 울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다.

 

전황후의 사랑은 명영종이 되돌아온 후에는 아주 세심하게 보살피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사랑의 또 다른 경지이다. 명영종의 동생인 경태제는 명영종이 황제위를 다시 빼앗아갈까봐 걱정했다. 그리하여 명영종을 남궁에 유폐시킨다. 명영종은 당시에 처지가 아주 곤궁했고, 분명히 마음은 우울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장애인이 된 전황후는 그를 아주 잘 보살펴 주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예전에 후궁의 화려함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몸과 마음에 크게 상처를 입은 여인 하나만이 그의 곁에서 그에게 위안을 주었고, 갖은 방법으로 그를 기쁘게 해주고자 했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영원한 사랑이고, 위대한 사랑이다.

 

전황후의 통곡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그 동기와 규격을 무한히 확대하여, 그녀는 국가를 위해서 울고, 사직의 존망을 위해서 울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투기꾼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사람을 전형화시키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보지를 못한다. 사실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필자가 보기에 전황후의 통곡은 명영종을 위한 것이고, 자신의 남자를 위한 것이고, 자신의 사랑을 위한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사랑의 감정을 배출하는 것은 바로 사랑에 대한 일종의 집착이다. 우리는 그 앞에 숙연해진다. 명영종은 임종전에, 후사를 부탁하면서, "전황후가 나중에 죽은 후에 짐과 같이 묻어달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