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해서(海瑞)는 처첩을 많이 거느렸는가?

중은우시 2009. 12. 22. 19:30

글: 진령신(陳令申)

 

해서는 송나라때의 포증(包拯)과 함께 중국역사상 청백리의 전형이며, 정의의 표상이다.

 

그러나, 바로이 '해청천'으로 불리우는 해서에게 사생활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면이 있었다. 해서의 조카사위인 양운룡(梁雲龍)은 일찌기 <<해충개공행장>>이라는 글을 썼는데, 거기에 해서는 "삼처양첩(三妻兩妾)"을 두었다는 말이 나온다. 이 책을 근거로, 사학자 황인우는<<만력십오년>>에서 해서는 "일찌기 3번 결혼했고, 두 명의 첩이 있었다"고 적었다. 이 주장은 많은 저작에서 인용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해서가 6번, 7번 처첩을 맞았다고 하고, 심지어 9번 처첩을 맞이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해서가 80대의 나이에 젊은 여자를 부인으로 들였다"는 말까지 나온다.

 

해서의 첫째부인은 허씨(許氏)이다. 그녀는 해서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둔다. 가정25년, 즉 1546년 해서가 32살이 되었을 때, 이 허부인은 해서에게 버림받는다. 허부인이 무슨 이유로 버림받았는지, 도대체 칠거지악중 무엇에 해당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저 '큰 잘못을 저질러서 허씨부인을 내보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허부인이 큰 잘못을 저지르긴 저지른 것같다. 그러나 큰 잘못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사내아이를 낳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해씨집안은 3대독자로 내려왔으므로, 후손을 두지 못하면, 조상을 대할 면목이 없다. 이것이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이유이다. 그러나, 실제 그러했는지는 지금으로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허부인은 아직 젊었으므로, 생육문제가 이유는 아닐 것같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아마도 해서의 모친과 그녀간의 고부갈등이 꼽힌다.

 

해서는 다시 왕씨(王氏)를 둘째부인으로 맞이한다. 왕부인은 해서가 순안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아들을 낳는다. 이름은 중지(中砥)라 한다. 해서가 순안에 부임한 그 해에, 왕부인은 다시 아들은 낳는다. 이름은 중량(中亮)이라고 한다. 왕부인은 딸도 낳았다.

 

가정43년, 1564년 10월, 해서는 북경의 호부로 발령이 난다. 해서의 모친은 북방의 추운 곳에서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해서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왕부인으로 하여금 두 아들, 세 딸을 데리고 해서의 모친과 함께 강서 흥국현령으로 있던 곳에서 바로 남쪽으로 고향에 가고, 해서는 두 종을 데리고 북상하여 북경으로 간다. 이때 해서의 나이가 52세이다.

 

3년후, 즉 융경2년, 1568년 7월 24일, 왕부인이 돌연 병사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살했다고 한다. 왕부인이 죽기 11일전에, 해서의 첩인 한씨(韓氏)도 목을 매어 자살한다. 이 두 사건을 연결시켜보면, 해서의 가정생활에 수수께끼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씨는 왜 자살했을까? 왕부인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죽었을까? 이들은 이제는 역사의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해서는 관직에서 이로 인하여 아주 나쁜 명성을 얻게 된다.

 

해서에게는 구씨(邱氏)라는 첩이 하나 더 있었다. 사료에 따르면, 그녀는 말년에 해서와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낳는다. 그러나, 3살도 되기 전에 요절한다. 해서는 융경4년, 즉 1570년 4월에 은퇴를 신청하고, 허락을 받은 후 남경을 떠나 고향인 경산으로 돌아가서 거주한다. 이때부터 관직에서 15년간 떨어져 있는다. 만력13년, 1585년 정월, 이미 73세가 된 해서는 다시 관직으로 되돌아온다. 남경으로 가서 도찰원우도어사 및 이부우시랑의 직을 맡는다. 구씨는 아마도 해서가 고향에서 한가롭게 쉬고 있을 때 들인 첩일 것이다.

 

당시, 해서의 곁에는 최소한 첩 하나가 있었다. 그가 또 다시 젊고 예쁜 첩을 들인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대를 잇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첩을 들이려면 돈이 든다. 그 돈은 어디서 났을까? 첩을 들일 때만 돈이 드는 것이 아니라, 첩을 들인 후에도 돈이 든다. 청백리인 해서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 첩을 들였을까?

 

명나라때 첩을 들이려면 얼마나 돈이 들었을까? 명나라때 만일 용모와 재주가 뛰어난 기생을 첩으로 들이려면, 통상적으로 천냥백은의 몸값을 내야 했따. 명나라말기의 유명한 진회명기들은 그보다 훨씬 비쌌을 것이다. 명나라때 소설 <<금병매>>를 보면, 여종을 첩으로 들이는데 백은 오십냥이 들었다고 한다. 만일 첩을 하나 들이려면 분명 100냥이상은 들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300냥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해서가 첩을 들이는데 들인 비용은 분명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세번이나. 아무리 적데 보더라도, 3,4백냥은 족히 된다. 이것은 국가에서 정한 녹봉을 받는 청백리인 해서에게 있어서, 아주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생활이 빈곤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이들 비용은 당시 7품현령에게 있어서 10년간 녹봉을 모아야 하는 돈이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해서는 가정32년 즉 1552년 십이월에 복건 남평현교유를 맡은 때로부터, 융경4년 즉 1570년 사월에 은퇴하기까지, 모두 17,8년간 조정의 관리로 있었다. 고향인 경산에 돌아갔을 때 '녹봉수입' 120냥을 가지고 집을 한 채 산다. 해서는 집도 사고 첩도 들였다. 그렇다면 그는 청백리로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을까? 이것도 아마 역사의 수수께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