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공무기(申公无忌)
풍보에 관하여 <<명사>>에 <<환관전>>이 있는데, 풍보도 거기에 수록되어 있다. 명나라를 살펴보면, 당쟁으로 망했고, 환관으로 망했다. 이것은 역사학계에서 컨센서스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환관 중에서 왕진, 위충형과같이 황당하게 권력을 농단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풍보와 같이 인품있는 환관도 있다. 여러 평가들 중에서 한가지 평가를 그는 받을만하다: 명나라때의 저명한 정치개혁가. 그렇지만 그의 신분은 환관이다.
풍보는 하북성 심현 사람이다. 가정제때 사례감병필태감이 되고, 융경원년(1567년), 동창 제독이 된다. 만력원년(1573년), 신종의 고명대신이 되어 사례감장인, 동창제독 겸 장어마감이 된다. 그는 만력제의 수보(首輔) 장거정과 정치동맹을 결성하여, 공동으로 '만력신정'을 펼치어, 역사서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명나라때 환관의 권력농단은 심했다. 환관의 정치간여는 만력연간에 이르러 이미 정치에서 통상적인 모습이 되었다. 아무도 이를 바꿀 수 없었다. 풍보는 글을 읽었고, 문화수준이 있었다. 그리고 자질도 뛰어났다. 예를 들어 그는 일찌기 <<계몽집>>, <<제감고설>>, <<사서>>의 편찬을 감독했다. 이는 초기 주원장이 태감은 글을 알아서는 안되고, 정치에 관여해서도 안된다는 규정과 천양지차이다.
풍보가 장거정과 결맹을 맺은 것에는 원인이 여러가지이다. 그중 중요한 요소 하나는 그들이 모두 같은 정적을 맞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수보를 맡고 있던 고공(高拱)이다. <<풍보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융경원년 동창제독겸 장어마감사를 맡고 있었다. 당시 사례장인이 비어있었는데, 풍보가 다음 서열이어서 이를 차지해야 했다. 그런데 목종이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대학사 고공은 어용감 진홍을 대신 추천했다. 황보는 이로 인하여 고공을 싫어하게 된다. 나중에 진홍이 파직당하자, 고공은 다시 맹충을 추천한다. 맹충은 장상선감을 맡던 자이다. 선례에 따르면 사례감이 될 수가 없다. 풍보는 고공을 더욱 미워하게 된다. 그리하여 장거정과 깊이 결맹을 맺어 고공을 제거하고자 한다." 확실히 고공은 풍보를 싫어했다. 사례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고공때문에 모두 놓쳐버렸다. 한번은 진홍이 대신 차지하고, 다음에는 고공이 다시 맹충을 추천한다. 풍보는 이로 인하여 풍보를 미워했다. 명사에는 두 마디로 이를 적고 있다. '질공(疾拱)'. '질공미심(疾拱彌甚)'. 이것은 원한이 쌓여가는 과정이다. 이때 총명한 풍보는 정치적 맹우를 선택한다. 바로 장거정이다. 왜냐하면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거정도 역시 고공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공동의 목표는 그들로 하여금 교분을 더욱 공고하게 해주었다.
융경6년, 목종이 붕어하자, 풍보와 장거정에게 기회가 왔다. 풍보는 유조를 위조하여 '각신과 사례감이 함께 고명을 받으라'고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이는 사실일 것이다. 명사에는 '목종에게 병이 생기자, 풍보는 몰래 장거정에게 유조를 초안하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목종의 병이 위중했을 때, 풍보와 장거정은 사전에 준비를 한다. 이 일을 고공이 발견하였고, 장거정은 할 수 없이 '얼굴을 붉히며 과오를 사과했다' 그리하여, 나중에 '사례감이 같이 고명을 받으라'는 유조는 역사학자들이 위조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목종이 이미 죽었으니 대질할 방법이 없다. 풍보는 내각수보 고공, 차보 장거정, 고의와 함께 신종황제의 고명대신이 된다. 만력원년(1573년), 나이 겨우 10살된 신종황제 주익균이 등극하고, 풍보는 중용된다. 신종이 등극하고, 풍보는 시종 어좌의 곁에 서 있었다. 조정의 문무대신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이에 대하여 고공은 아주 크게 불만이었다. 그는 즉시 각신으로 하여금 '내각에 정무를 돌려주라'는 구호를 내고, 풍보를 탄핵학 한다. 그러나, 풍보는 이때 사례감을 장악하고 있어서, 상소문을 보고는 그냥 묵혀둔다. 그리고 장거정과 대책을 논의한다. 결국 풍보가 나서서, 고공이 목종이 병사한 후에 '10살된 태자가 어찌 천하를 다스리랴'고 했던 말을 꼬투리로 잡는다. 이를 황후와 황귀비에게 알린다. 그 결과는 알만할 것이다: '황후와 황귀비는 크게 놀랐고, 태자는 이를 듣고 얼굴색이 변했다." 고공의 최후는 결정된 것이다. 그는 파직당하고, 고향으로 쫓겨났다. 풍보는 고공에 대하여 안심하지 못하고, 나중에 '왕대신사건'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고공을 사지로 몰고자 했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이 나서서 말리는 바람에 그만두게 된다. 그러나, 장거정과 풍보는 이번 사건에서 대승을 거두고, 둘은 내외에서 결탁하여 조정을 장악한다.
명나라때, 여러 권력을 장악한 환관중에 공통된 스타일이 있다. 즉, 어린 황제가 좋아하는 일을 해주어서 총애를 더욱 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왕진은 9살된 명영종이 좋아하는 일을 해서 총애를 얻고, 위총현은 어려서부터 황장손 주유교가 좋아하는 일을 해준다. 그들의 성공은 거의 모두 이와 관련된다. 다만, 풍보는 어린 황제에게 다르게 대했다. <<풍보전>>에는 몇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알수 있다. 첫째, 궁내의 태감 손해등이 여러번 황제에게 권하여 밤에 별궁으로 놀러가게 했고, 작은 옷과 좁은 소매의 옷을 입고, 말을 타고 칼을 들게 했고, 여러번 기이하고 재미있는 물건을 바쳐서 황제가 깊이 총애했다. 풍보는 이를 태후에게 알렸고, 황후는 황제를 불러 질책한다. 황제는 오래 꿇어앉아서 가르침을 들었고, 아주 당황하고 두려워했다." 솔직히, 어린 황제가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이 별 것은 아니다. 기이한 물건을 가지고 놀고, 궁녀와 장난치는 것등은 별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풍보는 이를 이태후에게 고하고, 황제로 하여금 오랫동안 꿇어앉아서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장거정으로 하여금 '죄기조(罪己詔, 황제가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조서를 내려 인정하는 것)"를 초안하게 한다. 그런데, 그 내용이 심해서, 만력황제 스스로 그것을 읽으면서 쑥스러워했다고 한다. 둘째, 장거정이 "내각에서는 백련(白蓮)이 나왔다고 바치고, 한림원에서는 쌍백연(雙白燕)을 바쳤다. 그러나 풍보는 장거정에게 '황상은 한창 나이인데, 이물을 가지고 놀아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풍보는 또한 '그의 자제들을 단속하여,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하였고 경성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찬했다' 이를 보면, 풍보는 아주 괜찮은 환관이다.
당연히 환관에게는 공통된 약점이 있다. 모두 탐욕스럽다는 것이다. 권력을 가지면 모두 자신의 이익을 탐한다. 풍보도 그러했다. 이점은 장거정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하여는 굳이 다루기를 피할 필요가 없다. 풍보는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정적에 대하여는 조정에서이건 궁내에서이건 절대로 손속을 봐주지 않았다. 이것은 풍보가 독랄한 정치수완을 지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장거정과도 비슷하다. <<풍보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풍보가 싫어하는 자는 모조리 쫓아냈다" 이것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만력10년(1582년), 장거정은 사망한다. 만력제는 그 후에 장거정을 청산한다. 당연히 풍보도 그가 어려서부터 싫어했던 인물이다. 풍보도 피하지 못했다. 만력10년 12월, 강서도어사 이식이 상소를 올려 풍보를 탄핵한다. <<만력소초>>에는 이식이 풍보를 탄핵한 주살해야할 12가지 죄가 실려있다. 절강도감찰어사 왕국칙도 상소를 올려 풍보가 군주를 속이고 나라를 어지럽힌 10가지 죄를 올리는데, 하나하나 극악한 내용이어서, 중벌을 받아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신종황제는 뿌리뽑을 생각은 없었다. 이것은 그의 성격과 사람됨과 관련된다. 그는 최후로 풍보에게 살길을 터준다. 명사에 따르면, '결국 풍보를 귀양보내어 남경에 안치시키고, 오래 후에 죽었다" 신종황제는 아마도 이태후의 체면을 봐준 것같다. <<풍보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풍보를 남경으로 유배보냈다. 이태후가 이유를 물었다. 황제는 '늙은이가 장거정에게 미혹된 것입니다. 그의 잘못은 없습니다. 얼마 지나면 다시 부르겠습니다."라고 답한다.
풍보는 북경에서 남경으로 쫓겨난 후, '여전히 수십명을 데려 가고, 이십대의 물건을 가져갔다" 이를 보면 풍보가 적지 않은 보물도 가지고 간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는 그가 발문을 쓴 <<청명상하도>>도 있다. 이 내용은 모두 <<만력소초>>에 보인다. 풍보의 죽음에 대하여 확실한 기록은 없다. 풍보가 쫓겨난 후, 여러 해를 살았다고 한다. 한가지 주장에는 그가 만력48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30년을 더 산 것이다. 아마도 편안히 늙어죽은 것같다. <<풍보전>>에는 그냥 '오래 있다가 죽었다'고만 적었다. 이를 보면 아마도 위의 견해가 맞는 것같다. <<취중지>>에서는 풍보가 '유배가서 남경유도에서 죽었고, 황창에 묻혔다. 나무가 많고, 높고 아름다운 성이 있었다" 이를 보면 그의 무덤은 상당한 규격이었던 것같다. 황제의 암묵적인 허가가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명사에는 풍보가 '유가의 풍도'가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대체로 맞는 말이다. 그는 환관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것도 악명이 아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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