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심만삼(沈萬三): 재부의 원죄

중은우시 2009. 9. 25. 18:31

글: 노담(老譚)

 

심만삼(沈萬三)은 중국역사상 아주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와 명나라의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과의 갈등은 세상사람들이 즐겨 얘기하는 이야깃거리이다. 그러나, 사료를 고증해보면, 심만삼은 확실히 원(元)나라 사람이고, 사실상 주원장을 도와서 성벽을 쌓았을 수가 없을 뿐아니라, 일생동안 주원장을 만나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명사>>에 여러번 나타나고, 부가 나라를 상대할 만하고, 주원장을 도와서 남경성을 쌓으며, 천자의 군대에 하사품을 마련해주었던 심만삼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살아서도 원나라 사람, 죽어서도 원나라 귀신

 

반금련은 <<금병매>>에서 여러번 이런 말을 한다: "남경의 심만삼(南京沈萬三), 북경의 고류수(北京枯柳樹), 사람은 이름(人的名兒), 나무는 그림자(樹的影兒)" 이를 보면 심만삼의 이름은 명나라때 시정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소, 절강, 복건, 안휘등지에는 지금도 거부들을 '심만삼'이라고 비유하여 부르는 습속이 남아 있다.

 

<<명사>>에는 여러 곳에 심만삼이 나온다. 그중 한 곳은 대각(大脚) 마황후의 전기에 분명히 쓰여 있다: 오흥(吳興)의 부자 심수(沈秀)는 바로 심만삼이다. 그는 주원장을 도와서 1/3의 남경성을 축조했고, 천자의 군대에 돈을 내겠다고 했다. 주원장은 화를 내며 말했다: '필부가 어찌 천자의 군대에 돈을 준단 말인가. 확실한 난민이다. 죽여 마땅하다." 마황후가 간언했다: "내가 듣기로 법률이라는 것은 불법을 저지른 무리를 처벌하는 것이지, 불상(不祥)한 자를 죽여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다. 백성으로서 부가 나라에 대적할 정도이면 그것은 그 백성 자신이 상서럽지 못한 것이고, 상서럽지 못한 백성이다. 하늘이 분명히 그에게 화를 내릴 것이다. 폐하가 굳이 그를 죽일 필요는 없다." 주원장은 그 말을 듣고 화를 풀어, 심만삼을 죽이지 않고 그냥 운남으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정사에 이렇게 적었으니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믿을 것이다. 백성들은 선량하여, 이 전설적인 부자가 변방에서 죽어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운남에서 도를 통해서 신선이 되었다고 하고, 강희연간(청나라)에 어떤 사람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운남에서 장생불사의 심만삼을 만났다고 떠들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설은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정사에서 얘기한 것이라도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니다. <<명사>>에는 몇 가지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적혀 있는데, 심만삼은 사실 확실한 원나라 사람이다. 원나라때 태어나서, 원나라때 죽었다.

 

건륭연간에 편찬된 <<오강현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장사성(張士誠)이 오(吳)를 점거했을 때 만삼은 이미 죽었다. 두 아들 무(茂),왕(旺)이 비밀리에 바닷길로 쌀을 연경까지 운송해왔다" 편찬자는 사료의 출처를 명나라사람 막단(莫旦)이 편찬한 <<오강지>>라고 하였다. 막씨와 심씨집안은 사돈간이다. 막단이 한 말이면, <<오강현지>>의 편찬자도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에서 쓴 정사가 이미 출판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이를 뒤집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저 뒷쪽에 주석으로 붙였다: 막단은 말하기를 장사성이 오지역을 점령했을 때 심만삼이 일찌감치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명사>>에서는 다시 심만삼이 고황제(주원장)을 도와 남경성을 쌓았고, 군대에 하사품을 내리고 싶다고 하여 고황제에 의하여 가산을 몰수당하고 유배갔다고 되어 있다.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리는지 우리는 잘 모르겠다.

 

장사성의 군대가 오를 점령한 것은 원나라때인 지정16년(1356년)이다. 주원장은 1368년에 비로소 명나라를 건립했다. 이것은 바로 막단의 주장에 따를 때, 주원장이 등극하여 황제가 되었을 때는 심만삼이 죽은지 12년이상 지났다는 말이다. 죽은 사람이 묘를 뚫고 나와서 성을 쌓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가산을 몰수당하고 유배갈 리도 없다.

 

문제는: 막단의 주장이 정확한지 여부이다.

 

답안은: 정확하다는 것이다. 최소한 <<명사>>보다는 정확하다

 

먼저 간단한 숫자를 보자.

 

심만삼은 최소한 3명의 아들이 있다. <<오강현지>>에 언급한 두 아들 "무, 왕"을 제외하고도 심영(沈榮)이라는 아들도 있다. 심영에게는 다시 심삼(沈森)이라는 아들이 있다.

 

원말명초때 사람인 왕행(王行)은 심영 부자의 묘지명을 써주었는데, 거기에 명확히 쓰여 있다: 심영은 명나라 홍무9년(1376년) 가을 팔월에 죽었다. 향년 71세이다; 심삼은 부친과 같은 해에 죽었다, 향년 48세이다

 

이를 가지고 추산해보면, 주원장이 1368년에 명나라를 건립할 때, 심만삼의 아들인 심영이 이미 62세이다. 손자인 심삼은 이미 39살이다. 이렇게 보면 심만삼은 80세가 넘는 고령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당연히, 심만삼이 80세까지 살지 못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명나라의 건국을 보지 못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숫자를 보면, 최소한 정사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심만삼이 주원장에게 미움을 샀다는 것이나 운남에 유배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알 수 있다.

 

명나라군대는 홍무14년(1381년)에 정식으로 운남에 병사를 보낸다. 다음해에 그 곳을 평정한다. 운남이 정식으로 주원장의 판도에 들어온 것이다. 심만삼이 이때까지 살아있었고, 그리고 명나라군대가 운남을 평정한 같은 해에 그 곳으로 유배를 갔다고 하더라도, 나이는 최소한 이미 100세가 넘어버린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백세노인을 유배보내는 것은 중국역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효를 기초로 하고 충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에서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심영의 묘지명에는 이런 말도 있다: "처음에 심영의 선군자(先君子, 즉 심만삼)는 고 시강 원문청의 집안에서 놀았다...." 심영이 홍무9년에 사망할 때, 묘지에 심만삼을 언급하면서 '선군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므로, 이는 곧 심만삼이 홍무9년이전에 이미 사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묘지명에는 이런 말도 더 추가되어 있다: 심영이 집안일을 처리하면서 적선당을 건립하여 '부친의 선지를 이었다(承夫先志)"고 하였다. 즉, 돌아가신 분의 뜻을 잇기 위하여 돈을 내어 지었다는 말이다. "선지"라는 것은 심만삼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준다. 심씨가 적선당을 지은 것은 원나라말기이다. 이는 곧 심만삼은 심영이 적선당을 건립하기 전, 즉, 원나라 말에 이미 사망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보면 결론은 분명하다. 심만삼의 아들 중 하나인 심영인 1306년에 태어났으므로, 심만삼은 적어도 1286년이전에 출생했다; 막단의 기록과 심영의 묘지명에 따르면, 심만삼은 원나라가 망하기 전에 이미 죽었다; 전체적으로 심만삼은 개략 6,7십세까지 살았다.

 

즉, 살아서도 원나라 사람이오 죽어서도 원나라 귀신이다. 전설에 나오는 주원장에 의하여 운남에 유배된 심만삼은 주원장의 백성이었던 적이 없다. 심지어 주원장과 만나본 적도 없고, 주원장이 어떤 인물인지도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심씨집안 쇠락의 진실한 경위

 

원나라말기에 이미 사망한 심만삼은 자연히 주원장의 처분을 받거나 유배를 갈 수 없다. 그러나 지방최고부호였던 심씨집안은 주원장시대에 황제로부터 타격을 받아서 몰락했다.

 

액운은 심만삼의 후손들에게 닥쳤다. 홍무26년 남옥(藍玉) 모반사건에 밀접하게 연루된다.

 

이전에도, 심씨집안은 고생을 겪었다. 홍무19년, 심만삼의 두 손자인 심지(沈至)와 심장(沈庄)이 감옥에 갇힌 적이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풀려나온다.

 

같은 해, 심만삼의 사위인 육중화(陸仲和)에게 화가 닥친다. 호유용(胡惟庸)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그리하여 '호당(胡黨)'이라는 죄목을 받아 멸문지화를 당한다. 주원장이 친히 쓴 <<대곡삼편>>에는 육중화의 죄행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자는 18년간 양장(糧長)을 지내면서, 오중의 최고부자였다. 수재, 황년, 숙년등을 허위보고하는 외에, 원고와 관리를 돈으로 매수해서, 자신이 '호당'이라고 고발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나 영명한 황제의 명찰(明察)은 벗어나지 못하여, 그 자신도 죽고 집안도 망한다. 온 집안이 깨끗이 죽임을 당했는데, 유일하게 나이어린 손자만 남겨두었다.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남옥 모반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강남에서 첫째, 둘째가는 부자였던, 심씨집안은 아직 황제로부터 실질적인 심각한 타격을 입지는 않았지만, 아주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홍무21년, 조정은 명령을 내려, 소주지방정부에 현지의 인재를 추천해서 경사로 와서 관리를 지내게 한다. 추천받은 사람중에는 심만삼의 조카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심마삼의 친척인 막례(莫禮) - 즉, 막단의 조부도 있었다. 조정의 봉록을 사양하면서 심만삼의 조카는 주원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의 일가는 황은을 여러번 입어서, 처자식과 전답을 보전할 수 있었고, 이것만해도 기대수준을 훨씬 넘어섭니다. 이제 관직까지 영예롭게 맡아서, 조상을 빛내게 되었는데, 어찌 조정의 봉록까지 받아챙기겠습니까"

 

이 전전긍긍하는 말 속에 심씨집안이 아침저녁으로 우려하는 흔적이 드러나 있다.

 

초초하고 불안하기는 했지만, 이 기간동안 심씨집안의 부귀는 전혀 감해지지 않았다.

 

홍무23년, 조정에서 관직에 있던 막례가 고향으로 친척을 만나러 돌아온다. 친척으로써 주장(周莊)에 있는 심씨집안을 방문하고,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막단은 이때의 성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각사로 연회석을 깔고, 자정기(紫定器) 12탁자를 설치하고 매 탁자별로 양지옥 2매를 두었는데, 길이기 1척여이고, 너비가 1촌여이며 가운데에는 홈을 두어, 젓가락을 놓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심씨집안이 얼마나 호화롭게 살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명사>>의 기록을 뒤집는 증거이다: 홍무15년에 마황후가 사망하는데, 홍무23년까지 심씨집안은 여전히 거부로 남아있었다. 확실히 마황후가 주원장에게 간언해서, 심만삼을 유배보냈다는 것은 허구임을 알 수 있다.

 

홍무26년, 주원장이 기획한 남옥 모반사건이 발발한다. 강남의 거부인 심씨집안이 철저히 몰락할 시기가 마침내 도래한 것이다.

 

남옥사건의 동기는 홍무25년 황태자 주표의 때이른 죽음과 관련있다. 황손인 주윤문이 황태손에 봉해지고, 합법적인 황위승계인이 된다. 주원장은 손자의 나이가 어려서 명망이 없는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경험이 적은 것도 걱정했다. 그리하여 천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가 만일 '호걸'이 나타나면, 명나라제국이 그의 손에 넘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남옥사건이 일어난다. 늙은 황제는 호유용사건을 이어 다시 한번 주씨왕조에 위해를 가할 여지가 있는 세력들은 뿌리를 뽑겠다고 결정한다.

 

심씨집안은 불행히도 '남당(藍黨)'에 엮여 들어갔다. 연결고리는 왕행이라고 부르는 교관선생(敎館先生)이었다. 이 왕행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심만삼의 아들인 심영과 손자인 심삼을 위하여 묘지명을 써준 사람이다.

 

왕행은 관직에 오르지 않았지만, 학문이 깊었다. 강호를 돌아다니며, 권문세가와 교분이 있었다. 일찌기 심씨집안에서 여러해동안 교관선생을 지낸다. 나중에 남옥의 집으로 가서 여러해동안 교관선생을 지낸다. 이 관계로 인하여, 남옥세력이 중천에 떠오른 태양처럼 부풀어오를 때, 심씨집안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왕행을 통하여, 직접 남옥이라는 인물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왕행이라는 중개인을 통하여 홍무26년 심씨집안은 직접 남옥을 소개받았고, 그 결과는 멸문지화로 끝난다.

 

누가 심만삼인가?

 

강남 심씨집안이라는 거부의 몰락사를 사관들이 잘못 알고 있을 리는 없다. 심씨집안은 당시에 일반백성들이 보기에 부자의 상징이었고, 최고지도자인 주원장의 관심도 끌었다. 심씨집안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친척 막단이 이미 세상사람들에게 심만삼은 명나라건립전에 죽었다고 분명히 말했고, 전국에서 읽히던 <<대곡>>에서도 심씨집안의 결말을 약간 언급했다. 어찌되었던 후세 사관들이 <<명사>>를 쓰면서 심만삼이 주원장을 도와서 남경성을 쌓았다든지, 천자의 군대에 하사품을 내렸다든지, 운남으로 유배갔다든지 하는 기괴한 이야기를 날조해낼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이를 날조할 뿐아니라 여러 전기에 반복해서 강조할 필요까지는 없다.

 

명나라사람들의 필기에서도 심만삼과 주원장간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반복하여 얘기하고 만들어내고 있다. <<칠류수고>>에서는 <<명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더욱 생동감있게 구체화한다. 군대에 물자를 내리는 것과 관련하여 심만삼과 주원장의 당시 대화까지도 만들어낸다:

 

주원장이 물었다: "짐은 백만대군이 있는데, 네가 모두 도와줄 수 있느냐?"

심만삼이 말했다: "군인 1명당 금1냥씩 내릴 수 있습니다"

주원장이 말했다: "네 뜻은 갸륵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

 

유사하게 덧붙이는 이야기는 아주 많다. 당시의 저명한 학자인 왕세정까지도 그 대열에 가담한다.

 

일대의 "거부"이고 원나라사람인 심만삼은 원나라때는 별로 이름이 나지 않았다. 어느 명사가 그의 이름을 언급한 적은 없다. 홍무12년에 편찬된 <<소주부지>>는 50권에 달하는데, 소주현지의 명사들은 모조리 망라되었다. 그러나, 심만삼은 나오지 않는다. 심씨집안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를 보면, 주원장의 통치전기까지는 심만삼이 유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나라 중후기에 들어서, 반금련의 시기에 이르러서는, 명나라사람들에게 심만삼이라는 이름은 아주 익숙해진다. "사람의 이름이고 나무의 그늘인 것이다"

 

심만삼은 원나라와 명나라초기까지는 이름이 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돈많은 사람일 뿐이었다. 관료사회의 업적도 없고, 문인아사도 아니다. 명나라가 건립될 때, 그는 일찌감치 죽어버렸다. 그런데, 그 이후에 그의 명성이 폭발적이 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확실히 심만삼에 관한 각종 요란한 '사적'은 정사에 나오는 것이든 야사에 나오는 것이든 아니면 필기소설에 나오는 것이든, 모두 와전일 뿐이다. 역사의 진상은 아니다. 다만, 각도를 바꾸어 보자면, 이런 와전이 지속되고 갈수록 심해졌다면 그것도 역사의 하나가 아닐까? 심만심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일까? 누가 만들어 낸 것일까? 어떤 힘이 있길래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전설이 갈수록 커지고, 갈수록 진실같아지고, 엄숙한 학자인 왕세정 마저도 이를 진실로 믿고, 엄숙한 정사인 <<명사>>에도 진실로 적었을까?

 

심만삼은 그의 이야기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심만삼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재부에 관한 집단기억

 

전설은 대부분 위조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전설에 얽힌 역사적기억은 상당히 진실된 경우가 많다.

 

심만삼의 전설은 판본이 아주 여러가지이다. 그러나 대체로 한 가지 주제를 벗어나지 못한다: 거액의 돈을 내서 주원자을 도와 남경성을 쌓고, 군대를 위문했지만, 가산을 몰수당하고 본인은 유배당했다.

 

원나라의 부자인 심만삼은 당연히 남경성건설이라는 공사에 참가할 수 없다. 더더구나 주원장과 '절반을 나눠서 쌓거나' 혼자서 1/3의 공사를 도급받아 완공할 수는 없다. 남경성의 건축을 심만삼과 연결시킨 것은 사실 주원장이 강소절강지역의 부자들을 대거 이주시켜 '도성을 충실하게 한 것'과 관련있다.

 

일찌기 오왕으로 있을 때, 즉 아직 황제를 칭하지 않고 있을 때, 주원장은 강소절강지역의 부자들에게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소주의 부호들을 강제로 호주(濠州)로 이주시켰다. 명나라를 건립한 후, 이 정책은 더욱 강화된다; 홍무3년, 소주, 항주, 가주, 호주(湖州)등지의 4천여명의 부호를 집단으로 호주로 이주시켰다; 홍무13년에는 더욱 기세가 컸다. 소주절강지역이 4만5천의 부호가 주원장에 의하여 강제로 남경으로 이주당한다. 그 명목은 '수도를 번영시키는데 공헌한다'는 것이다.

 

유사한 강제이주는 더 많다.

 

대량의 부호들은 강제로 고향에서 뿌리가 뽑히는 동시에, 남경성의 건설도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부자들은 남경성으로 대량의 재물을 가지고 온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수도건설을 지원한다' 많은 명나라의 야사, 필기는 남경성의 여러 건축들 철교, 주루, 수관등등을 모두 심만삼이 돈을 내서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바로 여기서 연유한다.

 

심만삼의 이야기의 구체적인 내용은 위조이다. 이들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 역사적인 배경은 진실이다.

 

마찬가지로, 운남의 군대 사병으로 편입시켰다는 이야기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홍무15년 운남이 평정되고, 주원장은 내지의 인원을 운남으로 이민보낸다. 그 명목은 '변방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들 이민들 중에는 강소절강지역의 부자들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명나라때 사람은 사조제가 쓴 <<전략>>이라는 책에서는 '고황제(주원장)이 운남을 안정시킨 후, 강좌(강소)의 양가여우(良家閭右)들로 이 곳을 채웠다. 그 땅에는 토착인들이 아주 적었고, 옮겨온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의관, 예법, 언어, 습속이 대체로 건업(남경)과 유사했다..."

 

고대인들은 고급주택지에 사는 부자들을 '여우(閭右)'라고 불렀다. 그리고 빈민촌에 사는 가난뱅이를 '여좌(閭左)'라고 불렀다. '건업'은 남경이다. 사조제의 위 글의 대체적인 의미는, 주원장이 운남을 평정한 이후에, 대량의 강소절강지역에 사는 '여우' 즉, 부자들이 옮겨갔고, 그들이 변방에 뿌리를 내리고 국가를 지켰다. 토착민들이 오히려 현지의 소수인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다보니 현지의 습속이 모두 '건업' 즉 남경과 같아졌다는 것이다.

 

허구적인 전설 속에는 부호인 심만삼이 주원장에 의하여 운남으로 유배간 것이라고 한다. 진실한 역사속에서는 많은 강소절강의 부호들이 천리먼길을 떠나서, 가족을 이끌고 가축들처럼 변방으로 쫓겨났다. 심만삼의 이야기는 가짜이지만 진실도 숨어 있다.

 

심만삼의 전설에는 명나라사람들의 주원장에 대한 불만섞인 정서가 드러난다. 이런 불만의 연유는 주원장이 강소절강의 부자들에게 대거 몰수 내지 탄압하는 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심만삼 전설에는 심만삼의 집안이 가산몰수당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혹은 중과세를 견디다 못해서 파산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 이야기가 나온 것은 당시 강소절강의 부자들의 비참한 운명과 관련이 있다.

 

강제이주, 중과세는 주원장이 부자들을 탄압하는 상용수단이었다. 죄명을 붙여서 '무슨 당'으로 몰아버리는 것은 비상수단이지만, 탄압의 효과는 훨씬 크다. 홍무13년, 호유용사건이 발발하자, 3만여명이 죽는다. 강소절강의 부자들이 많이 연루되었다. 심만삼의 사위이며 부에 있어서 심씨집안에 뒤지지 않던 육중화도 불행히 '호당'의 무리가 되어, 온 집안이 깡그리 죽임을 당한다. 홍무18년의 곽환 사건, 26년의 남옥 모반사건에서도 온 천지에 목이 달아난 사람들로 가득했따. 많은 강소절강의 부자들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남당'의 무리가 되어 있었다.

 

당시의 여론은 이런 사건에 대하여 감히 직접 뭐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모든 것은 황제가 결정한 것을 따라야 했다. 방효유는 뼈대있는 사람이다. 그는 나중에 이 시기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언급한다: "당시에 절동, 절서의 거실고가(巨室故家)는 많은 경우 죄를 받아 집안이 무너졌다" 비록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주원장의 진실한 의도는 말했다. 네가 정말로 같은 무리이든 아니든간에, 정말로 죄가 있든 업든 간에, '거실'이거나 '고가'이면 횡액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주원장은 부자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지 못했던 인물이다. 한편으로는 어려서의 경력때문일 것이다. 거지짓을 하고, 중으로 지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부자들로부터 백안시당했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본인의 명나라제국에 대한 전체설계와도 관련이 있다. 소농출신인 그는 자신의 제국이 절대다수를 소농이 차지하도록 하기를 원했다; 유민이었던 적이 있던 그는 유민의 위력을 잘 알았다. 그들은 방대한 원제국도 무너뜨렸다. 자연히 그가 원하는 사회는 정태(靜態) 사회였다. 이 설계도면에, 부자들이 차지할 위치는 없었다. 부자들은 지주이고,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소농사회를 파괴하려는 욕망을 지닌 자들이었다. 소농들이 토지를 읽고 유민이 되면, 정태사회가 파괴된다. 부자들은 상인이 되고, 상업의 유동성은 정태사회에 위협적이다. 농민이 아니고 상인이 아니더라도, 그저 권력에 의존하여 치부를 한 자들도 주원장이 용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통치에 위해를 가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재부는 주원장이 보기에 원죄가 있는 것이다.

 

주원장이 강소절강의 부자들을 소탕한 전과는 혁혁하다. <<우보잡기>>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주원장통치의 중후기에 이르러, 삼오(三吳)의 대호거성(大戶巨姓)들은 '혹은 죽고, 혹은 이주당하여, 하나도 남은 자가 없었다" 원래 번화하고 요라나던 강소절강지역은 '마을 안이 조용하고 생계가 힘들어졌다" 죽음의 기운이 내려앉고, 생기가 없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슴아파했다.

 

어떤 시대이든, 발언권은 지식인들이 장악한다. 농업사회의 지식인은 대부분 출신가정이 비교적 좋은 곳이다. 부자계층이 비교적 많다. 그래서, 심만삼과 주원장간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널리 유행했다. 이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심만삼이라는 몸을 빌려서 이런 이야기를 만든 것은 비록 심만삼 본인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전체 주원장시대에 강남부자들의 집단적으로 당한 이야기인 것이다.

 

심만삼은 이 이야기에서 그저 아주 적합했던 플랫폼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