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병광(劉秉光)
명나라는 재자(才子)들이 많이 배출된 시대이다. 재자들은 대부분 고아하였지만, 그중에는 반역사상을 지닌 이도 있고, 풍류도당도 있으며, 언어가 광망했던 이도 있고, 행동이 괴이했던 이도 있다. 그렇지만, 동기창처럼 재물을 가지고 세도를 부리고, 동네에서 횡행하며, 야만적이고 패도적이며, 비열하여, 최종적으로 민란이 일어나 집안재산을 몰수당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동기창은 중국역사상 가장 패도적인 서화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기창(1555-1636)은 자가 현재(玄宰)이고, 호는 사백(思白)이며, 송강 화정(지금의 상해 송강) 사람이다. 명나라때의 저명한 서화가로, 송강화파(松江畵派)의 비조이다. 그의 작품은 명청시기에 수백년을 풍미했고, 강희, 건륭은 모두 그의 서화를 정통으로 삼았다. 당대에도, 그의 작품은 여전히 서화계에서 연구, 수장, 전시, 경매되고 있고, 가격도 계속 오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휘황하고 이렇게 인기있지만, 그것으로 당시 그의 추악한 인품과 패도적인 행동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
만력17년(1589년), 동기창은 진사에 합격한다. 그후 한림원 편수, 호광부사, 태상시경, 예부시랑등의 관직을 섭렵한다. 그동안에 황장자(皇長子) 주상락(朱常洛, 나중의 명광종)의 강연관도 맡는다. 백성을 위한 정치측면에서 동기창은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그는 "경관"과 "서화가"라는 이중신분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글을 써주고, 그림을 그려주고, 서화를 감정해주는 등의 일로 상당한 수준의 '윤필비(潤筆費)'와 '감정비'를 받아챙겼고, 개인재산은 급격히 불어났다.
동기창은 호색한이었다. 특히 지위가 생긴 이후로 명성도 있고, 돈도 있고, 세력도 있게 되자, 더욱 심하게 호색과 사치에 빠졌다. 그는 처첩을 여럿 거느렸을 뿐아니라, 방중술에도 열심이었고, 심지어 동녀를 간음하여 채음보양을 하기까지 했다. 나이가 환갑이 넘어서 자손이 집안에 가득한데도, 동기창의 미색에 대한 탐욕과 민중에 대한 탄압은 날이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여러가지 추악한 행적은 일찌감치 현지의 선비들과 백성들로부터 큰 불만을 샀다.
만력43년(1615년), 집안에서 놀고 있던 동기창은 민녀 녹영(綠英)을 강간한 후, 첩으로 들인다. 그리하여 다시 송강일대의 민중들의 분노를 산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이 사실을 근거로 한 소설 <<흑백전>>이 쓰여져서 널리 알려지게 된다. <<흑백전>>의 제1회는 "백공자는 밤중에 육가장을 치고, 흑수재는 융문에서 크게 소란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이렇게 그를 조롷하고 풍자했다. 동기창의 호가 사백(思白)이고, 얼굴은 검었기(面黑) 때문에 이는 결국 그를 향한 것이다. 동기창도 화가 났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만력44년(1616년) 3월, 동기창은 이야기꾼 전이(錢二)로부터 <<흑백전>>이 송강의 생원 범창(范昶)이 썼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집안노비들로 하여금 범창을 동기창의 집으로 붙잡아오게 시킨다. 그리고 재판정을 열어서 친히 심문한다. 범창이 인정하지 않자, 동기창은 사람을 시켜 갖은 방법으로 범창을 능욕한다. 그리고 강제로 성황묘에서 신령에게 맹서하도록 시킨다. 범창은 이런 큰 치욕을 당하자, 집으로 돌아온 후 억울함이 하늘을 찔렀고, 한을 품고 급사하게 된다.
범창이 죽은 후, 그의 모친 풍씨(馮氏)는 며느리 공씨(龔氏) 및 3명의 여종을 데리고 상복을 입은채로 동기창의 집앞에 가서 울며불며 소란을 부린다. 동기창이 이를 알고난후에 먼저 가노를 시켜서 그녀들이 타고온 가마를 모조리 부숴버린후, 그녀들을 집안으로 데려간 후에 문을 걸어잠그고 심하게 때린다. 풍씨는 구덩이속으로 떨어지고, 공씨는 옷이 모두 갈기갈기 찢긴다. 몇명 여종들은 아랫도리가 벗겨지는 치욕을 당하고, 방망이로 아랫도리를 쑤신다. 이어서 동기창은 대문을 열어서 주변백성들이 그녀들이 능욕을 당한 광경을 구경하도록 한다.
동기창의 폭행은 송강의 백성들의 공분을 산다. 하룻밤만에, 길거리에는 동기창을 "수환(獸宦)", "효얼(梟孼)"이라고 부르는 첩문이 붙는다. 현지의 부녀, 아동들에게는 "약요시미강, 선살동기창(若要柴米强, 先殺董其昌)"이라는 노래가 불려진다. 휘주, 호광, 천섬, 산서등의 객상들도 동기창의 악행을 폭로하는 대열에 동참한다. 심지어 기녀들과 유선에서도 이런 내용이 실린 소식지가 전해진다. 동기창의 악행은 실로 원성이 온 거리에 자자하고 하늘끝 땅끝까지 퍼져간 상태였다.
소장을 접수한 관리는 동기창의 명성과 권세에 겁을 먹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백성들의 분노를 못본 척 할 수도 없었다. 할 수없이 동기창의 가노 진명(陳明)을 먼저 체포한다. 관청의 이같은 졸을 버려 차를 지키고, 무거운 것을 피하고 가벼운 것을 취하는 태도로는 백성들의 공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분노한 백성들은 동기창의 집으로 몰려가서 동기창 집안의 기진이보를 모조리 가져간다. 그후 동씨집안의 수백간에 이르는 저택은 모조리 불태워진다. 이것이 바로 백성들이 동기창의 집안가산을 몰수한 사건이다.
당시 동기창은 놀라서 소주, 진강, 단양, 오흥 등지로 도망다닌다. 졸지에 상갓집 개와 같은 신세가 된다. 숭정9년(1636년), 동기창은 병으로 죽는다. 시호는 "문민(文敏)"으로 받는다. 그는 서화에 대한 성취에 있어서는 재주가 넘쳐 감히 중국내의 조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품이나 행동거지에 있어서는 하류이며 일대의 깡패라 할 수 있다. 이 악명이 높은 서화가는 그래도 생전에 여러번 기용되었고, 죽고나서도 여전히 좋은 명성을 남기고 있으니, 이는 명나라말기 상류사회의 황당함과 멍청함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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