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로민(陳魯民)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에 공신들을 대거 죽였다. 공신들이 거의 다 죽었는데, 오직 신국공(信國公) 탕화(湯和)만은 살아남았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임금을 모시는 것은 호랑이를 모시는 것과 같다(伴君如伴虎). 이 말은 딱 맞는 말이다. 중국봉건사회에서 역대왕조가 모두 이러했다. 명나라때는 특히 심했다. 의심이 많으면서 각박했던 주원장은 황제가 된 후에 공신들을 대거 죽이는데, 당초에 그와 함께 의거에 참가했던 옛친구들도 거의 모두 죽임을 당했다. 서달(徐達), 이선장(李善長), 유기(劉基), 호유용(胡惟庸), 남옥(藍玉), 섭승(葉昇), 풍승(馮勝), 송렴(宋濂), 부우덕(傅友德)... 오직 신국공 탕화만이 이를 피하여 살아남았다. 거기에는 무슨 오묘함이 숨어 있을까?
주원장이 공신들을 많이 죽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먼저 세웠던 태자 주표(朱標)이건 나중에 세웠던 태손(太孫) 주윤문(朱允炆)이건 사람됨이 후덕하고 성격이 무른 편이었다. 주원장은 당연하 자신의 사후에 전공이 혁혁한 공신들이 남아있게 되는 것을 걱정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물러나기 전에,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이들 옛신하들을 죽여없앤 것이다. 그렇게 하여야 자신의 자손들이 강산을 굳건히 지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송나라의 조광윤이 진교병변을 일으켰던 것과 같은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번은 태자 주표가 진언했다. "폐하께서는 대신들을 너무 많이 죽이시는 것같습니다. 군신간의 화기가 깨지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러자, 주원장은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랫동안 침묵했다. 다음 날, 주원장은 태자를 불렀다. 그리고는 가시나무의 가지를 땅바닥에 던지고는 태자에게 주워오라고 시켰다. 가시가 가득 나 있는 가지를 보고 태자는 주저주저했다. 주원장이 말했다: "이 가시나무를 네가 줍지 못하겠으면, 내가 너를 위해서 가시를 모두 제거해 주겠다. 그게 뭐 대수로운 것이냐. 지금 내가 죽이는 자들은 모두 장래 네가 황제가 되는데 위협이 될만한 사람들이다. 내가 그들을 제거하는 것은 너에게는 큰 복이 될 것이다."
원래, 탕화도 바로 가시나무의 '가시'에 해당했다. 반드시 죽여야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기민하고 스스로를 잘 억제하여, 적시에 물러나고, 권세를 탐하거나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과 가족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가 스스로를 보호한 경험은 배울만하고, 살펴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는 주원장에 대하여 황제로 추대한 공로가 크다. 그는 일찌기 주원장과 함께 곽자흥의 휘하에서 일했고, 주원장보다도 경력은 더 많았다. 나주엥 주원장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점차 우두머리로 자리잡았다. 그와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장수들은 주원장을 큰형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마음 속으로 불복하는 측면이 있었따. 그러나, 탕화는 비록 "태조(주원장)보다 3살이나 많았지만, 혼자서 태조를 두령으로 모시고,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래서 태조가 아주 좋아했다." 중요한 순간에 그는 앞장서서 주원장을 우두머리로 모셨다. 이 공로는 주원장이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는 공로를 다투지도 않았다. 평상심을 가지고 불공정한 대우를 참아넘겼다. 천하를 얻은 후에 공신들에게 상을 내릴 때, 주원장은 일부러 탕화의 공로를 1등 낮추었다. 핑계거리를 찾아서 그에게는 그저 '후(侯)'의 작위만을 주었다. 다른 동등한 조건의 사람들은 모두 '공(公)'의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탕화는 아주 조심했고, 전혀 화를 내거나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다. 계속하여 자기의 할 일만 하고, 얇은 빙판 위를 걷듯이 황제를 모셨다. 그리고 적시에 황제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나타내고 스스로의 잘못은 반성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몇 년후에 신국공에 봉해진다.
탕화는 황상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 그에 맞추었다. <<명사. 탕화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명나라가 들어선 후 천하에 전쟁을 할 일이 없어지자, 신하들이 병권을 잡고 있는데 대하여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탕화는 미리 주원장의 마음을 헤아려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서 병권을 내놓고 고향에 돌아가서 쉬겠다고 말한다. 주원장은 아주 기뻐하면서 그가 금의환향하게 해주었다.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탕화는 조용히 지냈다. 스스로 공신이라고 뻐기고 다니지도 않았다. 그리고 집안 자손들과 노비들도 잘 단속했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책잡힐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주원장의 눈과 귀가 한순간도 그를 감시하지 않는 적이 없다는 것을.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조리 주원장에게 보고되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그는 하루종일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두며, 산과 물을 놀러 다녔고, 좋은 음식을 먹고 손자들과 놀았다. 지방관리나 호족들과는 어룰리지도 않았고, 국가대사를 논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저 만년에 향락을 누리는 인물로 비쳐졌다. 그래서 주원장은 그에 대하여는 안심을 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놀랍게도 홍무28년까지 살다가, 70세의 고령으로 사망한다. 그는 명나라초기에 드물게 보는 천수를 누린 노신이다. 그는 사후에 동구왕(東甌王)에 봉해지고, 시호는 양무(襄武)로 받는다. 주원장이 공신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데, 그 혼자서 그 망을 벗어나서 천수를 누릴 수 있었으니, 하나의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로써 볼 때 <<명사>>에서 탕화는 말이 없으나 기민하고 지혜가 많았다고 하였는데, 조금도 틀림이 없는 것같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그는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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