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청백리 하이루이(海瑞)는 어떻게 처첩을 많이 두었는가?

중은우시 2009. 3. 25. 17:21

글: 침묵과담(沈默寡談)

 

하이루이(海瑞)는 자가 여현(汝賢), 국개(國開)이고, 호는 강봉(剛峰)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서경전을 읽고, 박학하였으며 재주가 많았다. 가정28년 즉 1550년에 과거에 합격한다. 처음에 복건 남평교유로 부임했고, 나중에 절강 순안과 강서 흥국의 지현(知縣)을 지낸다. 그는 세금은 낮춰주고, 억울한 사건을 바로잡았으며, 탐관오리를 혼내주어 민심을 얻었다.

 

가정41년, 즉 1562년, 해서는 제기지현으로 부임한다; 가정45년 호부운남사 주사가 된다, 그는 상소를 올려 명세종 주후총이 무술(巫術)을 미신하고, 생활이 사치하며, 조정을 돌보지 않는 폐단이 있다고 비판한다. 가정45년, 호부주사의 직에 있던 하이루이는 관(棺)을 사고, 처자와 이별하고, 노비들을 풀어주고나서, 죽기를 각오하고 상소를 올린다. 그 내용은 명세종에게 도중문(陶仲文)과 같은 방사(方士)들의 속임수에 당하지 말고, 조정을 잘 다스려달라는 것이었다. 이는 명세종의 분노를 불러와서, 명세종은 하이루이를 하옥시키고 사형에 처하려고 한다.

 

하이루이는 감옥에 갇힌다. 당시 재상이던 서계(徐階)는 하이루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황광승도 옥에 갇힌 하이루이를 보호하고자 애를 쓴다. 같은 해 12월 명세종이 사망하고, 명목종이 즉위하고나서야 비로소 하이루이는 석방된다. 융경3년, 즉 1569년 하이루이는 우첨도어사로 승진한다.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호족과 귀족에 타격을 가하며, 강물을 준설하고, 수리공사를 마쳤다. 그리고 일조편법을 실시하여 탐관오리들에게 밭은 백성들에게 돌려주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해청천(海靑天)"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나중에 다른 관리들에게 배척당하여 한직에서 16년간 보내게 된다.

 

만력13년, 1585년, 하이루이는 다시 기용된다. 남경 이부우시랑, 남경 우첨도어사가 되어 역시 탐관오리를 잡아내고, 뇌물수수를 단속한다. 하이루이는 나중에 황광승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아주 슬퍼하여 자신도 병든 몸이면서 진강까지 문상하러 간다. 나중에 남경에서 병으로 죽는다.

 

하이루이의 일생은 청렴하고, 강직했다. 그리하여 민중의 존경과 옹호를 받았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현지의 백성들은 마치 가족을 잃은 것처럼 비통해했다고 한다. 그의 영구가 남경의 수로를 통해 고향으로 운구될 때는 장강의 양안에 그의 영구를 보는 사람으로 가득 찼다고도 한다. 많은 백성들은 그의 유상(遺像)을 만들어 집에 보관하기도 했다. 그에 관한 전설과 이야기들은 민간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나중에 문인묵객들이 가공정리하여, 유명한 장편공안소설 <<해공대홍포>>, <<해공소홍포>>로 만들어지고, 희국 <<해서>> <<해서파관>> <<해서상소>>등이 만들어진다. 하이루이는 송나라때의 포증(包拯)과 마찬가지로, 중국역사상 청렴결백한 관리의 대표자이고, 정의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해청천"이라고 불리우는 하이루이에게 사생활에서는 남모르는 일면이 있었다. 관련 사료에 따르면, 하이루이는 회족(回族)이고, 조상은 복건 진강에서 해남 경산으로 이주한 해조(海)이다. 그는 4살때 부친을 잃고, 모친의 손에 자랐다. 해씨집안은 3대에 걸쳐 외아들로 내려왔고, 가족관계는 비교적 간단했다. 다만, 하이루이의 처첩문제는 불명확한 점이 있다. 아주 복잡하다.

 

하이루이의 고향사람이면서, 조카사위인 양운룡(梁雲龍)은 일찌기 <<해청개공행장>>을 썼는데, 거기에는 하이루이가 "삼처양첩(三妻兩妾)"을 두었다고 되어 있다. 이 글에 따라, 사학자인 황인우는 <<만력십오년>>에서, 하이루이는 "일찌기 3번 결혼했고, 두 명의 소첩(小妾)도 두었다"고 적었다. 이 주장은 여러 책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이루이가 여섯번, 일곱번 처첩을 취했다고 하고, 심지어 "아홉번 결혼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하이루이가 늙은 나이에, 젊은 여자를 처로 맞이했다"는 기록도 있다. 비록 이런 주장들이 좀 심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하이루이에게 처첩이 많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하이루이의 첫째부인은 허씨(許氏)이다. 그녀는 하이루이와의 사이에 딸 둘을 낳는다. 가정25년, 즉 1546년에 하이루이가 34살이 되어, 이 허부인은 하이루이에게 버림받는다. 그 당시 여자가 이혼당한다는 것은 커다란 치욕이었다. 하물며 이미 두 딸을 낳았는데, 두 딸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것 역시 큰 고통이다. 그리고 허부인은 이혼당하면서 경제적으로 아무런 이득을 보지 못한 것같다. 그리하여 그녀는 하이루이를 법정에 제소한 적도 있다.

 

허부인이 무슨 원인으로 이혼당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기록을 보면 "대고(大故)"로 허씨를 내보냈다고 되어 있으니, 허씨에게 무슨 큰 잘못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소위 "대고"가 도대체 무엇인지는 불명확하다. 사내아이를 낳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해씨집안은 3대를 독자로 내려왔으므로, 후손이 없다면 조상을 볼 면목이 없다. 이것이 아마도 가장 이치에 맞는 이유일 것이다. 다만, 그런지 아닌지는 이미 알아볼 길이 없다. 그러나, 허부인이 아직 젊었으므로, 생육문제가 이유가 되지는 않았을 것같다.

 

또 다른 원인이라면, 여러 사람들이 추측해본 것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그녀와 하이루이의 모친과의 고부갈등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유명한 한나라때의 장시 <<공작동남비>>에 상세히 묘사된 바 있지만, 외동아들을 둔 가정에서 비교적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문제는 허부인은 불행했던 유란지와 마찬가지로, 하이루이도 초중경과 같은 감정을 가졌던가? 역사자료를 보면, 하이루이는 비록 초중경은 아니지만, 역시 유명한 효자였다. 그는 영원이 모친의 편에 섰다. 이리하여 해씨집안의 며느리들은 아주 난감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하이루이와 허부인이 이혼한 후, 다시 반씨(潘氏)를 부인으로 들인다. 다만, 반부인은 해씨집안에 들어온지 1달도 되지 않아 이혼당한다. 이혼의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어서 하이루이는 다시 왕씨(王氏)를 부인으로 맞이한다. 하이루이가 순안에 가기전 2년전에 하이루이는 아들을 낳는다. 이름을 중지(中砥)로 짓는다. 하이루이가 순안에 부임한 그 해에 왕부인은 하이루이와의 사이에 또 다른 아들을 낳고, 이름을 중량(中亮)이라고 한다. 왕부인은 딸도 낳았다.

 

가정43년, 즉 1564년 십월, 하이루이는 북경으로 가서 호부에 부임한다. 모친은 추운 북방에서 생활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하이루이는 방법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왕부인에게 2남3녀를 데리고 모친을 모시고 강서 흥국현령으로 있던 곳에서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하이루이는 혼자 노복 2명을 데리고 북경으로 부임한다. 이때 그의 나이 이미 52세였다.

 

가정44년, 즉 1565년 십월 하이루이는 조야를 깜짝 놀라게 한 바로 그 상소문을 올린다. 가정을 날카롭게 비판한 "직언천하제일사소(天下第一事疏)"인 "치안소(治安疏)"이다. 그리고 다음해 2월에 그는 하옥된다. 두 아들은 이 해에 연이어 사망한다. 하나는 11살이고 하나는 9살이었다. 하이루이의 나이는 이때 이미 54세였다.

 

3년후, 융경2년, 1568년 칠월 이십사일 저녁, 왕부인이 돌연 병사한다. 어떤 사람은 왕부인이 자살했다고 말한다. <<만력십오년>>에서는 왕부인이 "아주 의심스러운 상황하에서 죽었다"고 적었다. 왕부인이 죽기 11일전에, 하이루이의 첩인 한씨(韓氏)도 목을 매어 자살한다. 이 두 사건을 연결시켜보면, 하이루이의 가정생활은 수수께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씨는 왜 자살했는가? 왕부인은 또 왜 죽었는가? 이 일은 비록 이미 역사의 수수께끼가 되어 버렸지만, 하이루이는 관료사회에서 명성이 급전직하하게 된다. 이때의 하이루이는 남경에서 정4품의 통정사 우통정의 직에 있었고, 반년전쯤에 남경에 도착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하이루이와 그 가족에게 가한 타격은 잔혹하고 무정했다. 처가 죽고, 첩도 자살하고, 하이루이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그가 친구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하이루이는 "생각할 때마다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다"고 적었다. 이런 것들을 보면 그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무정한 사람만은 아닌 것같다. 처첩에 대하여도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가정비극을 초래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미 팔십이 넘은 하이루이의 모친에게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이루이에게는 구씨(邱氏)라는 첩이 하나 더 있었다. 사료에 따르면 그저 그녀가 만년에 하이루이와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낳았다고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아들도 세살때 요절해버리고 만다. 하이루이는 융경4년 즉 1570년 은퇴를 신청한다. 허락을 받은 후에 남경을 떠나 고향인 해남 경산에 은거한다. 이때부터 관료사회를 15년간 떠나있는다. 만력13년 즉 1585년 정월이 되어 이미 73세가 된 그는 다시 관료사회로 되돌아온다. 남경으로 가서 도찰원 우도어사와 이부우시랑의 직을 맡는다. 구씨는 아마도 하이루이가 고향에서 한가하게 지내던 시절에 맞이한 첩일 것이다.

 

만력15년 십월십사일, 하이루이가 죽었을 때, "이잉사복(二四僕)"이 있었다고 한다. "잉()"은 측실 즉, 첩을 말한다. 이 두 첩중에 하나가 구씨일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아마도 어떤 사람이 말한 "늙은 나이에 젊은 여자를 첩으로 맞이했다"는 바로 그 젊은 여자일 것이다. 만일 이렇게 본다면, 하이루이에게는 3명의 첩이 있었던 것이다.

 

하이루이는 이때 이미 칠십여세의 나이였다. '일생칠십고래희'인데, 머리가 반백이 되고, 나이가 들고 힘은 딸릴텐데, 그런 나이에 젊은 여자를 첩으로 맞이한 것이다. 비록 당시에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라고 할 것이지만, 어쨌든 자랑할 일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정적들에게 좋은 구실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정적들은 속속 이것을 가지고 공격했다. 이에 대하여는 조정에서 그를 비호하던 사람들도 언급을 꺼렸다.

 

당시, 하이루이의 곁에 최소한 이미 첩이 하나 있었다. 그가 다시 젋은 여자를 첩으로 맞이해야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대를 잇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첩을 들이려면 돈이 필요하다. 첩을 들일 때 돈이 들 뿐만 아니라, 들인 후에도 돈을 많이 써야 한다. 그런데, 청백리인 하이루이가 어떻게 이렇게 돈을 들여서 첩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명나라때 첩을 들이려면 돈이 얼마나 들었을까? 명나라때, 만일 재색을 겸비한 기녀를 첩으로 들이려면 통상 백은 천냥이 필요했다. 명나라말기의 진회명기들은 아마도 이 가격 수준이 아니었을 것이다. 명나라때의 소설인 <<금병매>>를 보면, 비녀를 첩으로 들이는데 백은 오십냥이 필요했다고 한다. 만일 첩을 들이려면 백냥이상은 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삼백냥은 들었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하이루이가 첩을 들이는데 드는 비용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세번이라고 치더라도, 최소 삼사백냥은 들지 않았을까? 정부로부터 받는 녹봉이 한정된 청렴한 관리인 하이루이에게 있어 이는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그가 빈곤하게 생활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 비용은 당시 7품 현령의 건 10년간 녹봉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관련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하이루이는 가정32년, 1553년 십이월에 복건 남평교유로 부임한 이래 융경4년 즉 1570년 4월 은퇴를 신청할 때까지, 17,8년간 조정관리를 지냈다. 고향인 경산에 돌아갈 때 녹봉소득인 120냥으로 집을 샀다. 하이루이는 집도 사고 첩도 들였다. 그렇다면, 그가 청렴한 관리로 지내면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쓸 수 있었을까? 이것도 아마 역사의 수수께끼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