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하억(何憶)
천황황(天皇皇), 지황황(地皇皇), 막경아가소아랑(莫驚我家小兒郞)
왜구래(倭寇來), 불요황(不要慌), 아유척야회저당(我有戚爺會抵攩)
높고높은 하늘이여, 넓고넓은 땅이여, 우리집 어린아이를 놀라게 하지 말라
왜구가 와도, 두려워 말라. 우리 척어르신이 막아줄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동남해안에서 널리 유행한 민요이다. 민요에 나오는 "척야"는 바로 명나라때의 유명한 항왜명정(抗倭名將)인 민족영웅 척계광이다. 척계광(1528-1588)의 자는 원경(元敬), 호는 남당(南塘), 말년의 호는 맹제(孟諸)였으며, 산동성 봉래 사람이다. 척계광은 장군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전쟁터를 누비면서 나라와 집안을 보호하겠다는 뜻을 세웠다. 일찌기,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싯구도 남겼다.
봉후비아의(封侯非我意)
단원해파평(但願海波平)
제후에 봉해지는 것은 내 뜻이 아니다.
그저 바다를 평정하고 싶을 뿐.
척계광은 17살때 조부와 부친이 역임했던 등주위지휘첨사(登州衛指揮僉事)의 직위를 물려받고, 25세때는 서도지위첨사(署都指揮僉事)로 승진하여 산동연해의 해상을 방어하고 왜구의 침략을 막는 임무를 맡는다.
왜구의 형성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원(元)나라때부터이다. 원나라말기, 일본이 호조 토키무네(北條時宗)는 두 번에 걸쳐 이국정벌령(異國征伐令)을 내리고, 전란을 틈타 조선을 침입한 다음, 중국을 노리고자 하였다. 이 정벌령으로 동원된 일본 사무라이들은 이때부터 중국의 동북연해를 교란시키기 시작하며, 왜구의 우환이 점차 형성된다. 중국고대에 일본을 "왜국"이라고 불렀으므로, 이들 중국연해르 약탈하는 일본사무라이와 낭인들을 "왜구"라고 불렀다.
명나라초기에 국가가 강성하여 해상방어가 완비되어 있어, 왜구는 큰 우환이 되지는 못했다. 정통연간이후, 조정이 부패하고 군비가 느슨해지면서, 왜구는 날로 창궐하게 된다. 정통4년(1439년), 왜구는 절강 태주의 도저촌에 침입하여 살인방화를 저지르고 재물을 약탈했으며, 심지어 어린아이를 막대기에 묶어서 끓인 물에 넣어서 죽이기도 했다. 가정연간이후, 왜구의 우환은 극도에 달한다. 그들은 해적 왕직(汪直), 서해(徐海)등과 결탁하여, 약탈을 했다. 한번은 전선 수백척을 모으기도 했다. 왜구는 동남해안일대에서 성을 공격하고 살인방화를 저지르며 간음약탈등 온갖 나쁜 짓은 다 했다. 그리하여 동남연해일대의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왜구의 우환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가정34년(1555년)에 일찌감치 위명을 떨치던 척계광은 왜환이 가장 심각한 절강으로 보내어 도사첨서(都司僉書)를 맡아 이 지역의 항왜전쟁을 책임진다. 척계광이 처음에 절강에 도착했을 때는 이 지역의 방어진지는 텅 비어 있었다. 사병은 노약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장군은 무예를 익히지 않았고, 병법을 몰랐다; 수군은 전선이 10개중 1,2개만 남아 있었고, 그나마 오랫동안 수리를 하지 않았다. 한번은 800여명의 왜구가 절강연해의 용산소(龍山所)로 침입했는데, 척계광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막으러 갔다. 다만 명나라군대는 늘고 겁이 많아서, 접전을 몇번 하기도 전에, 이미 궤멸상태를 보였다. 이 위기의 순간에, 척계광은 홀로 말을 타고 앞장서서, 적진을 뚫고 다니며 연속 몇 발의 화살을 쏘았다. 그리하여 왜구의 몇몇 두목이 활을 맞고 쓰러진다. 왜구는 명나라의 장군이 이처럼 용맹한 것을 보고는 황급히 도망쳤다.
병사들의 연약함을 바꾸고, 방비에 느슨한 현상을 시정하기 위하여, 척계광은 현지의 어민, 단호(蛋戶, 연안해변지역에서 차별대우를 받아 육지에 거주할 수 없고, 호적에 오르지 못하며, 배를 집으로 삼아 물고기를 잡거나 진주를 채취하며 살아가던 사람)중에서 신군을 모집하고, 엄격하게 훈련시켰다. 이 군대는 인원수가 많지는 않고, 겨우 3천여명에 불과했지만, 싸움을 할 때는 하나하나가 모두 열명은 당해냈다. 이 군대는 전투에서 용감할 뿐아니라, 규율도 엄격하여 백성을 괴롭히지 않았다. 현지인들은 모두 이 규율이 엄격하고 싸움을 잘하는 군대를 "척가군(戚家軍)"이라고 친근하게 불렀다.
척계광은 왜구와의 전투경험을 기초로, 남방지형에 소택(沼澤)이 많은 특징을 감안하여, 새로운 진법인 원앙진(鴛鴦陣)을 만들어서, 매12명의 사병을 1개 전투단위로 하여,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병기를 휴대했다. 화기와 냉병기, 장병기와 단병기가 상호 배합되어 전투력을 많이 끌어올렸다. 척계광은 이 전투를 잘하고 규율이 엄정한 군대를 이끌고 항왜전투에서 계속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척계광은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하면서 규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사병들에게 절대적으로 지휘에 복종하도록 요구했다. 지휘관이 전진을 명하면, 전면이 도산화해(刀山火海)라고 하더라도 용감하게 전진해야 하는 것이고, 후퇴하면 안된다. 명령을 어기는 자는 참형에 처하고 용서가 없다. 바로 척계광이 이처럼 군기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바로 척계광이 아들을 참해서 죽였다(戚繼光斬子)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척계광이 아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수백년동안 복건, 절강 일대에서 널리 퍼져있다. 복건의 포전에는 이 이야기를 가지고 민극(閩劇) <<척계광참자>>로 만들어서, 예술의 형식으로 민간에서 널리 전해왔다. 이외에, 복건 영덕, 연강, 민후, 절강의 의오등지에서도 유사한 전설이 전해져 온다. 척계광참자의 이야기는 도대체 역사적 사실인가 아닌가? 도대체 어느 곳에서 발생했는가에 대하여도 여러가지 설이 있어, 정설이 확립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척계광참자"의 이야기가 절강성 태주(台州) 지구에서 있었다고 한다. 척계광이 척가군을 이끌고 절강에서 왜구를 막아내고 있을 때, 몇번의 큰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왜구들이 이름만 들어도 겁을 먹게 되었다. 한번은 척계광이 군대를 이끌고 태주부를 포위한 왜구의 무리들과 싸우는데, 왜구는 척가군과 접전을 벌이나 곧 패퇴하였다. 그들중 잔당은 성의 북쪽에 있는 대석을 돌아 선거(仙居)로 물러가서 버텼다. 이들 왜구무리를 철저히 소탕하기 위하여, 척계광은 즉시 자신의 아들인 척인(戚印)을 선봉으로 하여, 군대를 이끌고 지름길을 달려 백수양 상풍령일대에 매복을 하도록 한다. 떠나기 전에 척계광은 척인에게 재삼 당부했다. "왜구와 접전을 하게 되면 급히 이기려고 하지 말고, 패배하는 것처럼 하여 적을 선거성 바깥으로 유인한 다음에 다시 반격하라. 그리하여 성안의 왜구들이 나와서 도와주도록 한 다음에 일거에 섬멸하라. 군령을 어기면 군법에 따라 처벌하겠다"라고.
척인은 군대를 이끌고 상풍령에 도착한 후, 군대를 산길의 양측 숲 속에 매복시킨다. 이때, 왜구의 무리가 이 산길을 따라 오고 있었다. 앞에는 약탈한 부녀와 소양을 내세웠다. 척인은 이를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화를 참지 못하고, 즉시 군대에 총공격령을 내린다. 일시간에 화살과 돌이 나르고, 칼과 창이 춤추며 고함과 비명이 하늘을 울린다. 척인은 용감하게 적을 죽이는데만 신경을 썼지, 부친이 한 당부는 잊고 있었다. 부친은 처음에는 패배하여야 하고 승리하여서는 안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삽시간에 적들을 산길에서 전멸시킨다. 나중에 척인은 군대를 이끌고 군영으로 되돌아왔다. 장사들은 모두 척인이 용감하게 싸웠고 적을 섬멸하는데 공로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척계광은 아들의 보고를 다 들은 후에, 대노한다. 그가 군기를 위반하고, 지휘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를 헌문밖에 묶고서 처벌을 기다리게 한다. 여러 장수들이 용서해달라고 말했다. 척인이 비록 군령을 어겼지만, 그는 왜구를 대패시킨 공로가 있으니, 그 공으로 속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척계광은 척인이 명령을 일부러 어기고, 군기를 망쳤으므로, 주살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만일 죽이지 않으면 군기가 처음처럼 엄정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아들을 참한다. 나중에 현지백성들은 척공자를 기려서, 상풍령에 태위전을 세운다. 이 대전의 잔적은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주장에 따르면, 척계광참자의 이야기는 절강 상풍령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복건 기린산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참한 아들도 척인이 아니라, 척적평(戚狄平)이라는 것이다. 명나라 가정연간에 왜구가 복건연해에서 약탈방화를 저지른다. 조정은 여러 대장을 바꿔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백성들의 고통소리가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 나중에 척계광이 8천의 의오(義烏)병을 이끌고, 복건으로 와서 왜적을 막는다. 첫번째 전투는 바로 해상왜구의 소굴인 횡서(橫嶼)였다. 횡서는 해상의 외딴 섬이다. 영덕 장만촌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이곳은 밀물 때는 망망대해가 되고, 썰물 때는 진흙탕이 된다. 지형은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렵다. 왜구는 섬 위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척계광은 오래 살펴본 후에 중추절의 한밤중에 왜구들이 방어를 소홀히 하는 틈을 타서, 조수가 낮을 때, 얕은 진흙탕을 건너 적의 의표를 찌르기로 하였다.
척계광은 먼저 장간(張諫), 장약(張岳)에게 명하여 횡서의 서, 북의 육상에 포진하게 하여, 왜구가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방비하게 한다. 그리고 장한(張漢)에게 명하여 수군을 이끌고 횡서의 동쪽해면에서 대기하게 한다. 왜구가 바다로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자기는 척가군의 주력을 이끌고 남쪽에서 진공하기로 했다.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척계광은 전군에 말한다: "조수가 낮을 때, 시간을 다투어야 한다. 그저 앞으로 나가기만 해야지, 망설여서는 안된다. 명령을 어긴 자는 참하겠다." 척계광은 자신의 아들인 척적평을 선봉장으로 삼아, 3천의 정예병사를 이끌고 선봉에 서게 한다.
척적평은 부대를 몰아 기린산 아래의 궁문취 산입구에 도착했을 때 부친이 나이가 많아서 체력이 모자라 따라오지 못할까 우려하여, 말머리를 돌려 장만을 바라본다. 이때 뒤따르던 장병들은 선봉장이 무슨 명령을 내릴 것이 있다고 생각하여, 부지불식간에 발걸음을 멈춘다. 척계광은 부대를 이끌고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는데, 돌연 앞에 가던 부대가 걸음을 멈추자 무슨 변고가 생긴 줄로 알았다. 즉시 사람을 보내어 물어본다. 나중에 장교가 되돌아와서 보고하여 말하기를 "앞에는 아무 일도 없다. 그저 척선봉이 고개를 돌려서 병사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을 뿐이다"라고 한다. 척계광은 이 말을 듣고 대노한다. 즉시 사람을 시켜 척적평을 묶어서 말앞으로 끌고 오게 한다. 그리고는 질책하여 말하기를: '너는 선봉장의 몸으로, 앞장서서 질서있게 전진하라는 명령을 준수하지 않고, 오히려 앞장서서 명령을 어겨서, 군사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만일 군법에 따라 처리하지 않으면, 어찌 사람들이 따르겠는가?" 말을 마치고 수하장교로 하여금 척적평을 끌고 나와 군대앞에서 참하게 한다. 척계광의 곁에 있는 장수들이 속속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중에, 척가군이 성공적으로 횡서를 점령한다. 왜구 2천6백명을 참살하여 횡서의 왜구소굴을 말끔히 소탕한다. 척계광이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올 때, 기린산을 지나는데, 자기가 그곳에서 참살한 아들을 생각하니, 상심의 눈물이 흘렀다. 나중에 현지 사람들이 척장군 부자의 공로를 기려서, 척계광이 당시에 아들을 생각했던 자리에 육각양정(六角凉亭)을 세우고, "사아정(思兒亭)"이라고 이름짓는다. 척공자를 참살한 기린산에는 하나의 석비가 세워지는데 이름은 "은택단(恩澤壇)"이다. 이로써 영원히 척계광과 척적평이 왜구를 막아내고 백성을 지킨 만세의 은덕을 기리는 것이다.
이외에 어떤 사람은 <<선유현지>>에 "척계광이 보전에 왔다. 군대를 출발시키려는데, 구름과 안개가 사방을 막았다. 그 아들 척인이 선봉이었는데, 말머리를 되돌려 뒤를 보고, 부대를 멈추자고 하였다. 척계광은 그가 명령을 어긴 것에 노하여 그를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근거로, 척계광참자의 이야기는 복건 보전에서 발생했고, 참살한 아들은 척인이라고 말한다.
이상의 여러가지 척계광참자의 이야기에 대하여 사학계에서는 다르게 보고 있다. "척계광참자"의 이야기는 <<명사>> <<죄유록>. <<명서>>와 왕도곤의 <<맹제척공묘지명>>, 동승조의 <<척대장군맹제공소전>>, <<민서>>중의 <<척계광전>>등 비교적 신뢰할만한 사료에는 모두 기록이 없다. 척계광의 후인이 편찬한 <<척소보연보기편>>에도 이 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척계광묘지명>>의 기록에 따르면, 척계광의 본부인인 왕씨는 일생동안 딸 하나만을 낳았다. 전설상의 장남 척인이라는 사람은 없다. 척계광이 취한 첩인 진씨, 심씨, 양씨등은 그와의 사이에 척조국(戚祚國), 척안국(戚安國), 척보국(戚報國), 척창국(戚昌國), 척흥국(戚興國)등 몇몇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이들 아들은 척계광이 왜구와 싸울 때는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였다. 아예 군대를 이끌고 싸움을 할 장수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여러 역사학자들은 척계광참자의 이야기는 순전히 허구라고 말한다. 민간에서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척계광 장국니 군대를 다스림에 군기가 엄정했다는 특징을 생각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일 것이라고 한다. 척계광참자의 전설은 역사고증의 각도에서 보자면 명확한 증거가 없다. 전설에 나오는 척인, 척적평등이 척계광의 의자(義子)는 혹시 아닐까. 이는 그저 필자의 추측일 뿐이다. 사실이 그러한지 아닌지는 사학계의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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