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장삼풍(張三豊)의 역사적 진실

중은우시 2008. 12. 23. 13:01

글: 천행운(天行雲)

 

장삼풍이라는 이름은 요즘도 지명도가 높다. 김용 선생의 소설에서 그의 성격이 자상하고 다정하며, 무공이 심오하다는 이미지로 그려, 사람들이 아주 친근하게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 <<태극장삼풍>>과 같은 류의 영화도 우리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역사상 장삼풍의 진실한 몸매와 용모가 이연걸(李連杰)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상 기록된 장삼퐁은 "기이위(而偉), 귀형학배(龜形鶴背), 대이하목(大耳賀目), 수염여극(鬚髥如戟)"이라고 되어 있다. 키는 이연걸보다 컸을 것이고, 모습도 굉장히 웅장하게 생겨서, 이연걸처럼 청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신조협려>>에서 묘사한 것이 대체로 비슷하다. 거기에는 소년 장군보(즉, 장삼풍)의 용모를 묘사하면서: "몸매와 용모가 아주 기이했다. 이마는 좁고 목은 가늘었으며, 가슴은 넓고 다리는 길었고, 두눈은 동그랗고 귀는 컸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전설에서는 장삼풍이 어려서 소림사에서 소사미로 지내다가 나중에 절에서 도망쳐나와서 수도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자료에는 이런 기록이 없다. 이는 순전히 소설가들이 지어낸 말이다.

 

장삼풍의 어렸을 때의 상황에 대하여, 현재 비교적 확실한 자료는 드물다. TV드라마 <<소년장삼풍>>과 같은 류의 이야기는 순전히 마구 지어낸 이야기이다.

 

비교적 엄격하고 정규적인 사료를 보자면 당연히 <<명사. 장삼풍전(明史, 張三豊傳)>>을 보아야 한다. 다만, <<명사. 장삼풍전>>에는 그저 그가 요동(遼東) 의주(懿州) 사람이라고만 썼다. 어렸을 때의 다른 내용은 전혀 언급이 없다. 그저 장삼풍이 이름을 얻은 후의 행적만 기록되어 있다. 전설상의 장삼풍은 춥거나 덥거나 항상 낡은 옷 하나로 바람과 추위를 막았고, 낡은 도롱이로 서리와 비를 막았다고 되어 있다. 장삼풍은 겉모습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고, 위생도 신경쓰지 않았다. 자주 아무렇게나 입고 다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장랍탑(張)" 혹은 "랍탑도인"이라고 불렀다(랍탑은 더럽고 지저분하다는 뜻임)

 

장삼풍은 식사량이 많았다. 한꺼번에 한되 또는 한말의 쌀도 먹어치웠다. 다만 어떤 때에는 며칠간 겨우 한끼만 먹기도 했다. 심지어 몇달간 아무 것도 먹지 않기도 했다. 그의 또 다른 취미는 사방을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상주하는 곳이 없었다. 기분이 내키면 산을 넘어 돌길을 걷다가, 피곤하면 구름을 이불삼고 눈을 요로 삼아 잤다. 아무도 없는 산 속에서나, 사람이 북적이는 시장에서나 그는 싱글벙글하며 다른 사람은 신경쓰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하루에 천리를 간다고 한다. 여조(呂祖)가 시를 남겼는데, "조유북해모창오(朝有北海暮蒼梧, 아침에는 북해에 저녁에는 창오산에)"라고 읊었다. 장삼풍이 하루에 천리는 갔다는 말이다. <<덕안부지>>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장삼풍이 한 번은 태평산에 은거했는데, 장삼풍은 사람들과 쉽게 잘 어울려서, 현지의 사람들과 친하게 되었다. 이날 장삼풍이 떠나려고 하면서, 이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이별하고자 했다. 그런데, 장삼풍이 산이 올라온지 오래 되었고, 불을 피운지 오래되어 불을 피울 방법이 없었다. 장삼풍은 산을 내려가서 가져오겠다고 말하곤 떠나더니 순식간에 돌아왔다. 산을 내려갔다 오려면 왕복 사십리길이었다. 동시에 장삼풍은 약간의 두부도 요리를 하기 위해 사가지고 왔다. 당시에는 아직 비닐봉지가 없었으므로, 나무판에 받쳐들고 온 것이다. 식사를 마친 후, 장삼풍은 그들에게 당부했다. 이것은 당읍성 서관의 왕씨집의 물건이니, 이 두부판을 나를 대신해서 가져다 달라고. 이들 시골사람들이 그곳을 찾아가서 물어보니, 정말 왕씨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당읍성은 태평산에서 140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이외에 장삼풍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도 기록이 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는 태극권을 익힌 후, "한 주먹으로 백여명의 적을 죽여, 절기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역대 도가의 고수들 중에서 유일하게 무공을 드러낸 기록이다. 만일, 사실이라면, 장삼풍의 무공은 무협소설에서 묘사하는 것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라 할 것이다. 한 주먹에 백여명의 적을 죽여버리다니, 항룡십팔장이니 대금강권이니 하는 것들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지 않은가?

 

장삼풍은 수도시에 무당산이라는 곳을 마음에 들어했다. 원래 진박(陳搏) 노조(老祖)도 무당산에서 여러해 수도한 바 있다. 장삼풍은 무당산을 유람한 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 산은 언젠가 반드시 크게 흥할 것이다" 다만, 당시의 무당산은 위에 있는 집들이 모두 전화로 불이 타고, 황량한 산이었다. 장삼풍과 제자들은 가시덤불을 자르고, 기와조각을 정리한 후, 몇 칸의 초가집을 지어서 살았다. 비록 건물등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무당산이라는 이 풍수의 명당자리를 차지한 것이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장삼풍이 무당산에서 수도할 때, 자주 다섯 그루의 고목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사나운 맹수도 공격하지 않고, 날카로운 맹금도 공격하지 않았다" 그가 산을 오를 때는 가볍기가 나는 것같았고, 한겨울에도 눈 위에서 잠을 잤고, 콧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기이하게 생각하고, 그를 기인으로 여겼다. 당시에 구현정(邱玄靖), 손벽덕(孫碧德), 양선징(楊善澄), 고천(古泉), 노추운(盧秋雲)등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장삼풍은 다시 홀연 떠나버린다. 나중에 섬서성의 보계(寶鷄)에 있는 금태관(金台觀)에 한동안 머문다. 장삼풍(일명 三峰)의 명호는 바로 보계산 삼봉(三峰)에서 왔다고 한다. 금태관에 현존하는 <<장삼풍유적기>>라는 비석을 보면, 명나라때 섬서 참정지사, 이부우시랑 장용완(張用浣)이 세웠는데, 거기에는 그의 부친 장조용이 13살 때 금태관내에서 글을 읽었고, 이곳에 유람온 장삼봉과 그의 부친이 집안 일을 이야기 했다. 장조용이 그의 부친이 장유(張維)라고 얘기하고, 전란을 피해서 온 집안을 이끌고 보계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장삼봉은 그 말을 들은 후, 감정이 동하여 말했다: 옛날에 자성(城)을 유람할 때 너의 선조인 장영(張榮)을 만나 너희 집안과 교류가 있었는데, 너의 조상중 장의(張毅)라는 사람이 아직 살아있느냐?고 물었다. 장조용은 그 분은 저의 할아버지입니다라고 답했다. 장삼풍은 아, 내가 그를 만났을 때는 아직 어린아이였다고 말했다. 보기에 장삼풍은 이 비석을 세운 장조용의 증조부보다 배분이 높았다. 확실히 장삼풍의 장수는 아주 유명하다. 역사적으로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장삼풍의 활동시기는 백년이 훨씬 너는다. 그래서 세상의 사람들이 배분을 따지기 시작하면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장수의 재미도 적지 않은 것같다. 나이가 백팔십이 되어서 연회석의 가장 윗자리에 당연히 자리할 뿐아니라, 누구의 할아버지가 어려서 오줌싸개였다는 얘기를 늘어놓을 수 있으니...

 

장삼풍이 보계에 있을 때, 일찌기 한번 "죽은" 적이 있다고 한다. <<명사>>와 <<징이록>>에는 어느 날, 그는 제자인 양궤산(楊軌山)에게 "나의 명이 다한 것같다 하늘로 돌아갈 날이 되었다" 그리고는 송사를 남기로 죽었다. 양궤산과 사람들은 관을 준비하여 염을 한 후 묻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관 속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관을 열어보니, 장삼풍이 다시 웃으면서 나왔다. 사람들은 놀라서 어떤 사람은 울고 어떤 사람은 소리지르고, 어떤 사람은 입만 벌리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모두들 귀신이 장난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장삼풍이 사람들과 장난친 것인지, 아니면 장삼풍이 인간세상을 떠나려고 하다가, 그러면 재미없다고 생각해서 다시 돌아온 것인가? 어떤 사람의 해석으로는, 도가의 공부를 극도로 수련하게 되면, 원신(元神)이 몸껍대기를 떠날 수 있다고 한다. 마치 <<팔선과해>>의 철괴리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장삼풍이 죽었다가 되살아난 후, 다시 사천으로 유람을 간다. 거기서 촉헌왕(蜀獻王)을 만난다. 촉헌왕은 주원장의 11째 아들이며 이름이 주춘(朱椿)이다. 주춘은 장삼풍을 아주 공경한다. 그는 <<제장신선상>>이라는 시도 짓는다: 기골삼립(奇骨森立), 미염극장(美髥戟張), 거중양혜미원(距重陽兮未遠), 보허정지유방(步虛靖之遺芳), 표표호신선지기(飄飄乎神仙之氣), 교교호빙설지장(皎皎乎氷雪之腸)...주춘의 시는 비록 아주 뛰어난 것이라 할 수는 없어도, 장삼풍에 대한 존경의 마음은 아주 진실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장삼풍의 가르침을 받아 도가의 진리에 대하여 어느 정도 깨달음을 얻어, 정치상의 화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주원장은 장삼풍에 흥미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에게 입조라하고 조서를 내린다. 그러나, 장삼풍은 진박노조와 그리고 전진교의 여러 장문인들과 많이 달랐다. 그들은 황상의 조서를 받고는 바로 달려가서 응했다. 요즘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어 달려가는 것보다 힘차게 달려갔다. 그러나, 장삼풍은 그렇지 않았다. 황제가 두번 세번 조서를 내려도 그는 가지 않았다. 조서를 전해주는 신하는 아예 그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원장의 아들인 상왕(湘王) 주백(朱柏)도 그의 명성을 듣고는 무당산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산은 비어있고, 숲은 울창하여 장삼풍의 종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연왕 주체가 등극한 후에, 그도 장삼풍에 흥미를 느낀다. 그리하여 두번 세번 장삼풍의 제자를 부른다. 그리고 그들에게 장삼풍을 찾아오라고 한다. 주체는 그리고 친히 서신을 쓰기도 했다: "황제가 진선 장삼풍 선생 족하에 삼가 보내는 글: 짐은 오랫동안 진선을 숭앙해왔고, 친히 의범을 전해받기를 갈망했다. 일찌기 사신으로 하여금 글을 가지고 가게도 했다...짐은 재질소용(才質疎庸)하나, 지극한 정성으로 만나기를 청하는 마음이 밤낮으로 잊을 수 없다. 다시 사신에게 서신을 보내어 경건하게 청하오니...." 사람들은 영락제 주체가 흉악한 폭군이며, 사람을 죽이고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장삼풍에 보낸 이 서신은 아주 공손하고, 스스로 "재질소용"이라고 겸손해 하고 있다. 이로써 보아 그는 스스로를 낮춤으로서 상대방을 아주 높여주어, 장삼풍에 대한 공전절후의 예의와 공경을 표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장삼풍은 여전히 조서를 받고도 가지 않았다. 그저 시를 한 수 지어, 그의 제자인 손벽운(孫碧雲)으로 하여금 영락제에게 전하게 했을 뿐이다.

 

사방으로 장삼풍을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한 영락제는 이를 무한한 유감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무당산에 사람들을 시켜 전후7년간에 걸쳐 30여만을 동원하여, 8궁 2관, 36암, 72암묘, 12정과 39개의 교량등 방대한 도교건축물을 짓게 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금전(金殿)이다. 금전이라는 것은 구리로 주조한 건축물인데, 천주봉의 꼭대기에 서 있어서 금정(金頂)이라고도 한다. 아주 장관이다. 장삼풍이 말한 '무당산은 나중에 반드시 크게 흥할 것이다'라는 말이 실현된 것이다. 중국역사상 도교를 숭상한 황제는 적지 않다. 다만 황제가 도사 한 명을 위하여 대거 토목공사를 벌이고, 궁관을 짓고, 조상을 만들어 모시며, 관리를 보내어 청소하게 한 일은 많지 않다. 장삼풍은 유명해졌고, 온세상에 이름을 드날렸다. 정일파(正一派)의 그 도사들 보다 훨씬 더 유명하게 된 것이다.

 

장삼풍의 일생동안의 행적은 신룡이 머리만 보이고 꼬리는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영락제의 마음 속에서 뿐아니라, 후세인들의 마음 속에 모두 신비막측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장삼풍에 관련된 전설이 아주 많이 전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일일이 언급하지는 않기로 한다. 장삼풍이 마지막에 언제 죽었는지는 알아볼 방법이 없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장삼봉이 장생불사하여 지금까지도 살아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