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권모술수의 수준을 놓고 말하자면 세계의 그 어느 민족도 중화민족에 비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권모술수를 좋아하는 것을 놓고 말하더라도 중국인이 최고일 것이다. 중국인은 자고이래로,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입으로는 인의도덕을 떠들지만, 뱃속에는 도적심보가 시커멓게 들어있다"는 것을. 유가에서는 인간성을 선한 것으로 보고, 성인들은 사람들을 극기복례하도록 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사회구조상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고관대작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너무나 잘 알았다: '사람이 자기를 위하지 않으면, 하늘과 땅이 멸할 것이다(人不爲己, 天誅地滅)" 비록 이 말은 양주(楊朱)가 한 말이지만, 양주는 인간성의 진실을 잘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이는 서방인들이 생각하는 성악설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아쉽게도 중국고대에는 인간성의 악한 점을 제어할만한 법규와 신앙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방황하게 될 때, 중국인들은 어쩔 수 없이 권모술수를 배울 수밖에 없었다.
어떤 환경에 처하느냐는 어떤 민족성을 배양하느냐를 결정한다. 중국의 옛 성인들은 처음부터 인류의 중대문제를 고민했고, 어떻게 인간을 관리하고 나라를 다스릴지를 고민했다. 중국의 옛 성인들은 사람을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급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의 등급으로 나누었다. 이러한 기초상에서는 이치는 중요하지 않고 그저 복종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임금이 죽으라고 하면 신하는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고, 부친이 죽으라면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것이다. 중국은 예로부터 관료사회였다. 사람들은 관직에 나가는 것만이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고,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생활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다. 이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과학기술, 지식활동, 신앙활동은 중국인들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은 지식을 갈구했고, 중국인도 지식을 갈구했다. 그러나, 중국인의 지식갈구는 그리스인들처럼 '너 자신을 알기' 위한 것은 아니고, 그저 상대방의 속셈을 읽음으로써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소위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다른 사람의 속셈을 읽으려면, 약간의 술수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바탕위에서 중국인의 권무술수는 실천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풍부해졌다. 손자병법, 삽십육계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한다. 중국인들의 권모술수는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중국인들은 그렇게 뛰어난 권모술수를 지니고 있는데, 왜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는 않았을까?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괴현상이다. 그러나, 정답은 가까운데 있다. 중국이들은 '내부투쟁(집안싸움)'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외족에 대하여는 화위귀(和爲貴, 화합하는 것이 중요하다)로 생각하면서, 예의를 다한다. 이는 중국인들의 체면을 중시하는 사상과도 관련이 있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 한가지 일만 예로 들어보자. 정화는 컬럼버스보다 일찌감치 미주대륙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컬럼버스와 같은 야심이 없었고, 그저 친구로 사귀는데만 흥미가 있었다. 그는 그의 주인인 영락제를 대표하여 대량의 보석을 외국의 친구들에게 건넸고, 그들에게 대명왕조의 부유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는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했었다. 서태후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차라리 외국에 넘겨줄 지언정, 집안의 노비에게 넘겨주지는 않겠다" 이것이 바로 중국인들은 대외적으로는 예의로 대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집안싸움을 벌이는 병의 근원이다.
중국인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을 좋아한다. 비록 뛰어난 권모술수를 갖추고 있지만, 이들 권모술수는 외국인들에게는 써먹지 못한다. 그저 외국인들이 어부지리를 얻도록 도와줄 뿐이다. 중국인들은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으며 싸우기 때문에 외국인들과의 싸움에 신경을 쓸 여가가 없었다. 여기에 중국인들은 체면을 좋아하고, 대외적으로는 스스로 예의지국이라고 표방했다. 그러니 외국을 침략하려면 쑥스럽지 않겠는가. 중국인은 체면을 위하여, 자기의 대범함을 과시하기 위하여, 일찌감치 자기동포의 혈육을 빨아서 대외적으로 자랑했으니, 외국인들이 굳이 수고를 하면서 뺏어갈 필요도 없었다.
나폴레옹은 중국을 잠자는 사자라고 하였다. 나폴레옹이 말한 것은 두눈을 말짱하게 뜨고 헛소리를 한 것이다. 중국은 잠자는 사자가 아니다. 잠자는 사자는 집안싸움을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뛰어난 권모술수를 개발해낼 수도 없다. 진정으로 잠자는 사자는 인도인이지, 중국인이 아니다. 중국인들은 우매하여 눈을 가린 사자와도 같았다. 멀리 내다보지 못했고, 고도근시를 앓는 사람과 같았다. 그저 곁에 있는 동포들과 너죽고 나살기식으로 싸울 줄만 알았고, 멀리서 어부지리를 노리려는 제3자가 있다는 것은 보지도 못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중국인은 세계에서 이름난 내부투쟁의 명수이다. 그리하여, 이 민족은 박대정심(博大精深)한 권모술의 학문을 창조했다. 그러나, 이들 학문은 이 민족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고, 중국인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데 유력한 무기가 되지도 못했으며, 중국인들이 강대해지도록 해주지도 못했다. 반대로 이는 중국인들이 내부투쟁에 빠져, 거대한 동아병부(東亞病夫)처럼 병색이 완연하고, 다른 사람들이 마음대로 처치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중국인은 바로 내부투쟁이 극심했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권모술수를 배워서 그 피해를 막으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까지도, 중국인은 권모술수를 배우려는 열기가 이전 사람들보다 심하면 심하지, 덜하지는 않다. 비록 우리는 오늘날 예전처럼 다른 나라에 집어먹힐 상황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민족사상이 계속 이렇게 지속된다면 결국 위험에 빠질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 성행하는 권모술 익히기는 한 측면에서 아주 중대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중국인의 정신문명은 중대한 결핍과 낙후현상을 빚고 있으며, 심지어 퇴보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인들이 권모술수를 좋아하는 것은 중국인들이 사람의 위선과 자신의 생존위기감으로부터 초래된 필연적인 것이다.
권모술수는 중국인들에게 어떤 문명이나 조화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더욱 위선적이고 사람들마다 더욱 위험하게 살아가게 할 뿐이다. 중국인이 언젠가 권모술수를 가볍게 보는 날이 온다면, 그 날이 바로 문명스럽고 조화로운 중국을 완성하는 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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