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중국의 민족

탁발선비(拓跋鮮卑)의 기원은 숙신(肅愼)족계이다

중은우시 2007. 2. 17. 01:59

글: 염취취. 대흥안령지구 야생동물보호처

 

중국과학원고척추동물및고인류연구소연구원 장삼수 선생은 "중국구석기문화는 남북의 2개계통이 있다. 하나는 주구점을 중심으로 한 북방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호북, 호남, 광동, 광서등지구에 분포된 남방계통이다" 이 주장은 제기된 후, 고고학계의 인정을 받았다. 1988년의 <<고고학연감>>에서, 두개의 개념을 제출했다. "구석기문화는 반드시 구석기시대에 한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더 늦을 수도 있다. 구석기문화는 획일적으로 12000년전을 기준으로 구분하여서는 안된다. 가장 늦게는 4000년의 역사만을 가질 수도 있다. 특수한 지리환경으로 인하여 어떤 문화는 외부와 완전히 격리될 수도 있다" 이 설명은 저명한 역사학가 전백찬선생의 대흥안령지구에 대한 뛰어난 주장과도 완전히 부합된다. 전백찬 선생은 "만일 후룬베이얼초운이 중국역사상 하나의 시끄러운 시장이라면, 대흥안령은 조용한 후원이다. 이 후원에서는 중첩된 산마루와 빽빽한 원시삼림이 천연의 장벽을 형성하여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장기간 격리되게 하였다"  바로 이러함으로 인하여, 이곳에 사는 고대소수민족은 중원지구의 고대왕조에 거의 발견되지 않았고, 역사책에 기록되지도 않았다. 한문화의 간여를 받은 것은 아주 늦은 때였으며, 독특한 민족단체와 기이한 지역문화를 형성하였다. 탁발선비는 바로 그 중의 한 갈래이다.

 

1. 탁발선비는 일찌기 대흥안령 일대에 거주했다.

 

1980년 7월 30일, 미문평 선생은 알선동내의 서측석벽에서 석각축문을 발견했다. 이 축문은 <<위서>>에 기재된 것과 차이가 별로 없었다. 즉, 탁발도가 태평진군 4년(443년)에 사신을 오락후국의 서북에 있는 고대조상묘에 조공하던 곳으로 보냈다. 이로써 현재의 대흥안령이 바로 역사서에 기재된 대선비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기원전 2세기(진나라 말기)의 동호가 흉노의 모돈선우에게 궤멸당한 후 퇴거한 지방이다. 그러나, 탁발선비의 발상지가 도대체 어디인지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현재 대다수의 학자는 탁발선비는 동호(東胡)의 한 갈래라고 본다. 동호는 흉노에 격패당한 후, 한 갈래는 오환산으로 물러나고, 오환이라고 칭했다. 한 갈래는 대선비산 북쪽으로 물러난 후, 선비라고 불렀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대선비산은 바로 탁발선비가 궤멸한 후, 휴식하면서 힘을 기른 곳이지 탁발선비의 발상지는 아니다.

 

2.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대흥안령은 삼림문명을 탄생시켰다.

 

지리환경은 문명기원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현재 문명과 지리환경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중국국내의 중요문명의 기원과 문화유형의 플랫폼은 각각: 대하문명(大河文明), 해양문명, 초원문명이다. 고고학의 중대한 발견에 따라, 삼림문명은 중국고대에 발전한 중요한 작용이 점차 우리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현재 고고학의 발전에 따라, 우리는 대흥안령삼림구역의 경내에 있는 원고문명에 대한 약간의 정보를 얻게 되었다.

 

알선동 유적지. 대흥안령산맥 북단의 이륵호리산 부근(눈강, 흑룍강유역에 속하며, 현재 악륜춘자치기의 경내임)에 위치한다. 여기서 탐문식발굴을 해서, 구석기, 신석기, 협사도기등이 출토되었다. 그 지질연대는 구석기말기에 해당한다.

 

탑하현 18참유적지. 대흥안령 동쪽언덕, 호마하 좌안 18미터높이의 2급계단지위에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과삭기, 첨장기, 석엽, 석편과 석핵등 1070건, 지질연대는 경신세말기이다. 지금으로부터 약12000년이전이다. 출도된 이 석기는 형태, 품격, 대소등에서 북경주구점 및 하북 양원호두량유적지에서 출도된 석기와 매우 유사하다.

 

막하현노탕하유적지. 노탕하남안 1, 2급계단지의 만나는 지점에 있다. 중국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최북단의 구석기유적지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문화유물은 14건이고, 그중 타제의 석기와 인류가 가공한 흔적이 있는 석핵, 석편등이 있다. 지질연대는 경신세에 상당한다. 그러나, 탑하현십팔참보다는 빠르고, 구석기말기의 전기에 해당한다.

 

1974년 9월과 1975년 9월, 흑룡강성 문물고고연구소의 조진재는 어얼구나좌기의 아오루구야민족향의 어원크 사냥군의 인도하에, 대흥안령 원시삼림의 사냥터에서 두 개의 암각화를 보았다. 한 곳은 어무얼하의 상류인 커보하의 자오라오커의 산애상에 있고, 다른 하나는 우이하 유역 아랑니하상류의 애벽상에 있다. 그림은 말 사슴 순록, 개등의 동물과 사람과 닮았고, 집단수렵하는 장면이 있다. 두 곳의 암각화는 모두 홍갈색선으로 윤곽을 만들었다.

 

이런 고고학적 발명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대선비산(대흥안령)의 광활한 삼림, 맑은 하류, 대륙성계절기후, 은폐된 지리환경은 풍부한 생물종군을 탄생시켰고, 완전하고 봉쇄된 생태환경을 만들었으며 원시인들의 생존조건을 형성했다. 2. 지형이 복잡하고, 연평균기온이 비교적 낮고, 생존조건이 힘들어, 생산력수준이 아주 낮은 원고시대에 대흥안령주위의 생존조건이 비교적 뛰어난 평원지구의 외족들은 먼 길을 달려와서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 일찌기 이 곳에 거주한 원시인들은 그저 이곳에서 발원한 원고인류이다. 그래서 대흥안령은 인류의 중요한 발상지의 하나라고 추정할 수 있고, 역사서에 기재된 많은 고대북방소수민족의 발상지이며 탁발선비의 발상지라고 볼 수 있다.

 

3. 많은 역사서는 탁발선비가 숙신족계에 예속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역사서적에서 탁발선비의 발상지에 관한 기재는 얼마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중 탁발선비가 대선비산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은 그 기재내용이 적다고 하여 무시할 것이 아니라 긍정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위서. 서기>>에는 "예전에 황제의 2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혹은 안에서 살고, 혹은 바깥으로 나갔다. 창의의 작은 아들은 북토를 봉토로 받았다. 나라에는 대선비산이 있어서 이를 호로 삼았다. 황제는 토덕으로 왕이 되었다. 북쪽언어로 흙을 탁이라고 하고, 뒤를 발이라고 한다. 그래서 탁발을 씨로 삼았다.

 

이상의 묘술은 사가들이 고의로 황제의 후예라고 기술하여, 탁발선비가 황제의 작은아들 창의의 후예라고 기재한 것을 뺀다면, 탁발선비가 대선비산에서 기원했다는 부분은 진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대흥안령은 인류발상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외에, 우리는 다른 문자자료에서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학자 양조등은 <<북조연구. 제1집>> 제207페이지에서 <<상간고(桑干考)>>에서 첫째, "상간", "삭간(索干)"은 "삭국(索國)"의 음전이라고 하고, 둘째, "상간", "삭간", "삭국"은 모두 탁발선비의 고명칭이라고 하고, 셋째, "삭국"은 "숙신국(肅愼國)"의 간칭인 "숙국(肅國)"의 음전이라는 것이다. <<송서.삭로전>>에서 "삭간"을 "삭로", "삭두"라고 하였는데, 남조인들이 북위를 능멸하여 부르는 말이었다. 그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첫째, "상간", "삭간"은 "삭국"의 음전이다.

 

"색"은 '새끼'등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한자의 음으로 선비족의 말을 쓴 것이다. 그저 음으로 보아야 한다. <<주서. 돌궐전>>에는 "돌궐의 조상은 삭국에서 나왔고, 흉노의 북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선비족은 원래 흉노의 동북에 있었으니 "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선비의 고족명이 "삭간"이라는 것이 여기에서는 음역되어 "삭국"으로 되었다. 여기의 "삭국"은 당연히 "삭간"이다. 두 들자는 같은 음을 다르게 쓴 것이다. 선비어와 한어의 합친 말이다. 청나라때의 전대기는 <<이십사고이>>에서 "삭간은 즉 상간이 변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필자는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모두 "삭국"을 달리 쓴 것이다.

 

둘째, "삭간"은 탁발선비의 고명칭이다.

 

<<남제서. 위로전>>에는 "평성은 대대로 삭간의 수도이다" <<남제서>>는 남조의 양나라때 소자현이 쓴 글이다. <<위로전>>은 북위의 역사를 기록한 자료이다. 평성(지금의 산서성 대동)은 당시 북위의 수도였다. 당연히 선비족이 거주하는 곳이다. 평성은 "속간의 수도"라고 하였으니 바로 선비족을 "속간"이라고 부른 것이다. 북위는 선비탁발부가 건립한 정권이므로, "속간"은 탁발부의 옛명칭이라고 볼 수 있다. <<송서.삭로전>>에ㅓ는 "삭간"을 "삭로" "삭두"라고 하는데 모두 남조 사람들이 북위를 능멸하는 호칭이었다.

 

셋째, "상간" "삭간" '삭국"은 모두 "숙신"의 음전이다.

 

가장 오래된 명칭은 "숙신"이다 그런데, "肅(愼)", "息(愼)", "索(干)", "桑(干)"은 모두 한 음의 차이이다. "숙신국"은 간략하게 "숙국"이라고 부르는데, "삭국"이라고 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국"과 "간"도 한 음 차이이다. 나중에 "삭국"은 "삭간" "상간"으로 쓰게 되었다.

 

족칭의 변화로 추단할 때, 탁발선비와 숙신족계의 족칭은 일맥상통한다. 탁발선비는 바로 중원왕조에서 기재한 숙신족의 일원이다. 혹은 탁발선비는 동호의 한 갈래이며, 옛날의 숙신족계에서 기원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숙신족계는 상, 주시대에 장백산이북에 거주하였고, 동으로는 동해, 북으로는 흑룡강유역에 살았으며 원시적인 수렵생활을 하고, 나무, 돌로 공구를 만들었다. 서주초, 즉 기원전11세기에는 주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숙신인들은 석노, 격시를 바치며 주나라에 신하를 자처했다. 진, 한 시기에는 숙신인들을 읍루로 명칭을 바꾼다. 역사서적에 기재된 탁발선비가 대선비산에 출현한 연대와 비슷하고, 생활방식이 비슷하고 습속이 가깝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탁발선비는 자고이래로 대흥안령 이륵호리산일대에서 번성하였고, 역사서적에서 "숙신"족계로 기재하고 있다. 그들은 말과 사슴을 교통도구로 삼고 숲속을 다녔다. 수렵으로 생활하며 군거의 원시부락생활을 하였다. 중원왕조와 거리가 멀고, 큰 산이 가로막아서 다른 민족과 교류가 적었다. 오랫동안 단독으로 역사서에 기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른 습속이 비슷한 부족과 한꺼번에 그들의 족명도 불리워졌다. 서로 다른 시기에는 서로 다르게 불리워졌는데, 각각 숙신, 동호등이 그것이다. 많은 고대의 북방소수민족부락은 여기서 발전하고 커갔다. 그들은 이런 봉쇄된 환경안에서 영지를 빼앗기 위하여 서로 토벌하고, 때때로 물산을 교환하고 때때로 부족간에 혈연을 다시 구성하고, 공동으로 독특한 고대 삼림문화를 형성하였다. 탁발선비는 단순히 동호가 퇴락한 후의 대선비산(대흥안령)깊은 곳에서 생활하던 잔여부족만이 아니다. 만일 이런 관점을 유지한다면 너무나 편면적이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