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중국의 민족

흉노: 역사인가, 전설인가?

중은우시 2006. 12. 21. 02:11

역사에 대하여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흉노(匈奴)를 알 것이다. 중국통사에는 반드시 흉노를 소개한다. 그러나, 전문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흉노에 관한 역사기술중에는 의문과 곤혹이 확신이나 이해를 훨씬 많다. 흉노의 역사는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유라시아대륙의 초원에 사는 유목민족은 흉노에서 비롯된다. 흉노로부터 몽고까지, 1500년간, 휘황한 문명을 창조한 정주사회 예를 들면, 중국, 인도, 페르시아, 지중해제국, 동구중구제국이 얼마나 강성하였던지를 불문하고, 그들이 초원유목민족의 철기부대를 만나면, 역시 나약함과 멍청함이 드러났다. 자고이래로, 정주문명의 입장에 선 사상가나 역사학자는 모두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고도의 문명과 위대한 전통을 지닌 농업국가가 일시에 흥했다 일시에 멸망하는 초원정권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 유목민족군대의 잔인함과 야만성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극력 과장하는 것 이외에, 설마 정주문명의 실패는 정주문명 자신의 정치적 부패와 왕조의 타락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전통으 ㅣ역사학자는 이런 역사와 현실의 곤경을 해석할 방법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흉노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이다. 지금까지 흉노에 관한 역사지식은 많은 의문, 추측과 오해가 존재한다. 하나의 특출한 예는 바로 흉노의 서천(西遷)에 관한 것이다. 동한중엽에 막북(漠北)의 북흉노는 선비(鮮卑)에게 격파당한 후, 몽고초원상의 흉노는 마치 다시는 고도의 정치체제의 형식으로 중국의 사적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원래 북흉노의 역량은 서역의 기록에 가끔 등장할 뿐이다. <<후한서>>에서는 "흉노의 잔여족속은 아직 10여만락인데, 모두 선비라고 자칭한다" 이미 북흉노의 정권이 멸망한 후에는 원래의 흉노민족은 새로운 통치민족인 선비족에 흡수되었따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의 프랑스 동방학자 덕경(德經)은 중국역사상 흉노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즉시 서방역사상의 훈족(Huns)을 생각해냈다. 둘은 명칭상 비슷하였으므로 그는 훈족이 흉노가 서천(서쪽으로 이동)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이런 아이디어는 저명한 역사학자 기본의 <<로마제국흥망사>>에 기록된 이후, 통설이 되었다. 그러나, 북흉노가 멸망한 후 훈족이 비잔틴의 동방 각성에 나타날 때까지는 그 사이에 200년간의 단열이 생긴다. 이런 단열을 보완하기 위하여, 서방의 일부학자들은 많은 별로 상관없는 역사적 사실을 연결시킨다. 흉노서천에 대하여 연대상의 그리고 공간상의 이주역사를 만들어 냈다. 당연히 이런 편집은 대부분 견강부회이고, 믿을만한 근거가 없어서, 일찌기 현대학자들에 의하여 부정되었다. 새로운 어떤 증거가 더 나타나기 전까지는 부정될 것이다. 흉노와 훈족을 연계시키려는 것은 역사학자의 일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당금의 유라시아학에서 이미 컨센서스가 이루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에는 여전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주장을 확실하다고 믿고, 흥미롭게 얘기한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 자체가, 흉노역사에는 많은 비역사적인 내용이 존재한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준다.

 

그러나, 흉노의 역사를 정확하게 해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흉노족들은 어떠한 직접적인 문자자료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라시아대륙의 역사로 말하면, 흉노제국은 이어진 초원을 주요한 지리적특징으로 하는 중앙유라시아에 첫번째로 출현한 기마유목민족이 건립한 대제국이고, 그 범위는 매우 놃고, 동시대의 어느 정주왕조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흉노족들이 언제 유목민으로 형성되었는지 모른다. 더구나 그들이 어떻게 그리고 누구로부터 방대한 국가조직을 만드는데 필요한 정치적인 기술을 배웠는지도 알 방법이 없다. 현재 학술계에서 점점 더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은 일종의 경제생산방식과 인류사회형태로서의 유목은 농업과 정주사회의 출현보다 훨씬 늦었다는 것이다. 유목의 기본요소는 말의 순화와 기승(騎乘)이다. 이 기술은 남러시아초원에서 시작되어 점차 동부의 몽고초원으로 전파된 것인지, 아니면, 다원적인 기원을 갖고 각자 독립적으로 발전시킨 것인지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초원정치의 고도형태로서의 흉노제국의 출현은 사료에 나타난 것처럼 그렇게 돌연한 것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2005년 여름, 전 신강고고학연구소의 소장인 왕병화는 미국과 몽고의 합작프로젝트에 참가한 적이 있다. 타미르강 북안초원에서 흉노묘지에 대하여 발굴하는 것을 주재하였다. 여러 가지의 명백히 초원유목사회의 물품인 동, 장식, 가죽제품, 도기를 발견한 이외에, 여러가지 동한 특색의 물픔, 칠기, 동경, 오수전 등등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묘지의 시대확정에 명확한 근거가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동한시대의 흉노는 남, 북의 두 개집단으로 분리된 이후, 여전히 막북초원을 지배하던 북흉노는 동한과 우호적으로 교류할 기회를 거의 상실했었고, 쌍방은 더 이상 정식으로 사신을 보내거나 무역관계를 맺은 바 없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북흉노가 동한의 물자를 취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타미르강의 흉노묘지의 발굴은 사람들에게 비록 이러한 상황하에서도 북흉노는 여전히 중원의 물자를 획득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수백년간 막북과 중원간의 경제문화관계는 쉽게 단절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유목경제의 비자급자족성이 유목제국의 경제공능으로 승급되기 위하여는 이 중간에 하나의 중요한 논리단계가 빠져있다. 그것은 반드시 초원에 유목업이외에, 다른 경제형태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원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발견되는 것은 이런 것들을 부정한다. 충분하게 쌓인 증거들은 비록 아주 고대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초원에는 전문적인 금속가공업, 도자기제조업등 일정정도는 정주생활에서의 산업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비록 "물과 풀을 따라 옮겨다니는" 유목경제가 초원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지만, 일정한 정도로는 농업과 수공업과 같은 다른 경제형태도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농업과 수공업은 왕왕 정주를 기반으로 한다. 지금까지 남은 많은 도시와 취락유적은 일정한 정도에서 정주의 흔적을 보여준다. 타미르강의 흉노 삼연성은 바로 이런 중요한 증거이다. 중국고고학자는 내몽고, 신강, 감숙등지의 조사, 발굴을 통하여, 일찌기 유목경제의 범위내에 일정한 농업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고고학적 증거의 뒷받침하에서, 미국역사학자 Nicola Di Cosmo는 명확하게 Barfield의 그 저명한 공식에 반대하고, 유목제국내에 다양한 경제형식이 모두 충분히 발전할 수 있으며, 초원제국의 건립기원은 바로 경제상의 비자급자족성에 있다는 관점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중국국가지리 잡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