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자룡)

조자룡의 직위가 낮은 이유는?

중은우시 2006. 4. 29. 15:33

삼국지에 나오는 유명한 인물인 조자룡은 그 직위가 매우 낮고, 계속 중용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그의 출신이었을 것이다.

 

중국역사상 서한시대부터 동한시대에 최고조에 이르며 삼국시대, 위진남북조를 거쳐 당나라때가 되어서야 쇠락하는 "문벌"제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조자룡은 명문귀족출신이 아니라, 평민출신이었다.

 

한나라 말의 난세에, 군웅이 들고 일어났고, 문벌제도는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 생명력은 매우 강했다.

 

원소(袁紹)가 18로제후의 맹주가 되는데에는 "사세삼공(사대를 내려오며 세 사람이 재상인 공을 지냈다)"이라는 그의 집안내력이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삼국에서 가장 문벌제도에 무심햇던 사람은 조조이다. 그는 원씨의 사세삼공을 무덤속의 해골뼈다귀라고 불렀다. 그의 수하장수들중에도 조씨, 하후씨외에 전위, 허저와 같은 평민출신들도 있고, 서황, 장료, 문빙과 같은 투항한 장수도 있었다.

 

유비는 초기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으므로 무슨 문벌을 따질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와룡 제갈량이 오면서 이 문벌이라는 장난감이 다시 살아났다. 위, 촉, 오의 삼국중에서 유비의 촉이 가장 문벌제도를 유지하는데 애를 썼다. 조자룡은 결국 운이 없었던 것이다. 동시에 제갈공명이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데, 마속, 양의가 바로 그 예이다. 제갈공명이 재상을 맡았을 때 촉에는 "촉에는 대장이 없어, 요화가 선봉을 맡았다"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유비가 황제에 오르면서 신하들이 글을 올리는데, 여기에 앞부분의 50명의 이름과 더불어, 누구누구등 188명의 이름으로 올린다. 여기에서 가장 앞에 누구의 이름이 나오는지 아는가? 바로 "정서대장군 도정후 마초(馬超)"이다. 다른 이유는 찾을 것이 없다. 마맹 때로부터 여러대에 걸쳐 공후의 집안출신이라는 것이 유일한 이유이다. 법정(法正)이 두번째였고, 제갈공명은 여덟번째였다. 조자룡은? 그는 188명안에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둘째 원인은 아마도 조자룡이 정치투쟁에서의 패배자라는 것일 것이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봉지를 내리는데, 여러 장수가 모두 조용히 있는데, 오로지 조자룡이 나서서 간했다. "익주인민은, 여러 차례 전란을 입어, 논과 집이 모두 비어있다. 이제 백성이 돌아와서, 편안히 거주하고 농사를 지으려고 하며, 막 민심이 안정되는데, 이것을 뺏어서 사사로이 상으로 주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구구절절 느껴지고, 유비도 기꺼이 그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한다. 그러나, 조자룡은 이 말 한마디로 모든 문무백관들과 원한을 지게 된다.

 

야심이 없었으므로, 자기의 세력을 공고히 할 줄을 몰랐고, 자기의 심복도 없었다. 그와 같은 난세에는 날개를 펼치는 것이 중요한데, 관우, 장비는 각자 자기의 일당을 모았고, 집안의 장수가 그득했다. 예를 들어, 관평, 주창이 그들이다. 마초는 대대로 공후를 지낸 집안이며 유비에 투항한 후에 집안의 모든 병력을 끌고 왔다. 황충도 일찌기 장사태수를 지냈고, 심복수하가 적지 않았다. 오로지 조자룡은 단기필마였고, 조정에서도 그의 말에는 무게가 실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청렴했다. 제갈공명이 몇차례 조자룡에게 상을 내리고자 하였으나, 조자룡은 이를 받지 않거나, 받아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로써 조자룡이 청렴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청렴한 사람은 심복부하를 두지 못한다. 아마도 그는 당시 촉의 탐관오리들에게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만일, 촉이 천하를 통일하고 문관들이 나라를 다스렸다면, 조자룡의 운명은 더욱 나빠졌을 것이다.

 

셋째 원인은 시운을 타고나지 못한 것이다.

 

유비에게 투항할 때는 바로 유비가 가장 어려울 때였다. 거느릴 병사도 없었고, 익주에 들어올 때까지 유비는 다른 사람에 의탁하고 있었다. 조운은 겨우 경호대장의 역할밖에는 할 수 없었다. 유비가 병사를 가지게 되었을 때는 이미 십수년이 지난 후였고, 모든 사람은 조자룡을 경호대장으로밖에는 인식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병사를 거느린 경험도 없고, 촉에도 장수들이 많았으므로 그에게는 군대를 지휘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촉의 말기에 이르러서야 제갈량으로서는 더 이상 쓸만한 장수가 없게 되고, 그 때 비로소 조자룡에게 주장을 맡겨 전투에 내보낸다. 그 때의 조자룡은 이미 백발노인이었다.

 

조자룡은 몇가지 관료사회의 금기를 건드렸다. 그리고 시운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평생 열심히 일은 했지만, 보답은 받지 못하였고, 죽어서 후에 봉해졌을 뿐이다.

 

만일 일찌감치 조조에게 의탁하였더라면 적어도 이러한 결과를 맞이하진 않았을 것이다. 조자룡의 지휘능력과 관련하여, 그는 품성이 겸손하고 성격이 냉정하였으며, 내부를 잘 다스렸다. 이런 점을 보면 조자룡은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었고, 그에게 군대를 맡겼다면 분명히 큰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

 

장수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자질은 사병들로 하여금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게 하는 것이다. 일찌기 오기가 친히 사병의 고름을 입으로 짜낸 것도 사병들로 하여금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게 하기 위한 것이다. 조자룡은 전투에서는 용맹하고 매번 사병의 모범을 보였으며, 특히나 그는 상을 받더라도 혼자 먹지 않고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사람이 장수가 되지 않는다면 누가 장수가 될 것인가.  아마도 조자룡이 지휘관이 되었더라면 그의 실적은 분명히 관우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