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자룡)

조자룡은 어떤 투구를 썼는가?

중은우시 2008. 4. 16. 01:30

 <<견룡사갑>>의 유덕화 모습

송나라의 갑옷그림

 

유영화 교수가 복원한 삼국시대 갑옷투구모습

 

글: 신경보(新京報) 2008년 4월 13일자

 

유덕화가 주연한 역사영화 <<견룡사갑(見龍甲)>>이 상영된 후, 많은 네티즌들로부터 조자룡의 투구에 대한 의문이 일어나고 있다. 네티즌들은 조자룡의 투구모양이 너무 일본 사무라이같다고 말한다. 사실 조자룡뿐아니라 조조군의 투구와 갑옷도 일본맛이 많이 난다. 더욱 심하게 지적하는 네티즌은 이 모습이 일본 사무라이같을 뿐아니라, 2차대전때의 영국군사병이나 현대의 소방관과 비슷하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상해희극학원 유영화 교수와 유동봉 선생을 인터뷰 했다. 유영화 교수는 <<중국고대군융복식>>이라는 책을 썼고, 유동봉은 <<병기지식>>의 원고를 쓴 사람이다. 그는 일본 고대의 투구와 갑옷 및 무기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하였다. 현재 우리는 전문가들과 함께, 중국투구갑옷, 일본투구갑옷, 서방투구갑옷 및 현대방어구간에 얽히고 설킨 관계를 알아보고, 투구와 갑옷에 숨어있는 숨은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영화 <<견룡사갑>>에서의 조자룡의 모습은 논쟁의 대상인데, 삼국시대의 명장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유영화에 따르면, 현재 찾아볼 수 있는 삼국시대의 갑옷투구에 관한 자료는 아주 적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드라마작품에서 비교적 잘된 것은 한나라의 투구갑옷을 참조하고, 비교적 조잡하게 만든 경우는 후대의 갑옷투구를 모방한다고 한다.

 

영화에서 조자룡의 투구는 모첨(帽檐, 모자아래 처마처럼 나온 부분)이 달려있는 작은 원형투구이다. 역사적으로, 이런 투구는 주로 송나라때 나타난다. 그리고 조자룡의 투구 정중앙에 위치한 장식물은 언듯 보기에 일본고대투구에 달던 것중 "녹각(鹿角)"을 축소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유사한 것이 중국고대의 투구에서도 나타난 적은 있다. 만일 투구정중앙에 돌출한 장식물로 본다면, 그러한 장식물은 일찌기 당나라때부터 나타났다.

 

영화에서 조자룡이 입은 갑옷은 어느 시대의 것인지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유동봉에 따르면, 삼국시대에 중국의 투구갑옷제작기술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고, 갑옥은 기본적으로 작은 금속편을 이어서 만들었다. 이런 갑옷은 몸을 방어할 뿐아니라, 어깨와 다리도 방어하는 것이 있다. 기본적으로 일본의 괘갑(掛甲)과 비슷하다. 갑옷 자체뿐아니라, 삼국시대의 풀세트 갑옷에는 세 가지 중요한 물건이 포함된다. 하나는 호심경(護心鏡, 가슴보호거울)이고 또 하나는 피풍(披風, 바람막이), 이외에 관직을 상징하는 수대(綬帶, 도장끈)이 그것이다. 투구는 쇠로 만들고, 위에는 소영(貂纓)장식이 있다.

 

영화에서의 갑옷은 언듯 보기에 철판을 단조해서 만든 '판갑(板甲)'으로 보인다. 사실상, 삼국시대뿐아니라, 중국의 이전 냉병기시대에 이런 판갑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이런 판갑은 실제로 전형적인 유럽식 갑옷이다. 원래 유럽에서 이렇게 설계한 것은 장창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이런 판갑은 계속 두꺼워져서 계속 위력이 강해지는 무기를 감당하게 된다. 일본의 전국초기에 이런 갑옷이 전파되었고, 일본갑옷투구의 독특한 풍모를 갖추게 된다.

 

출토문물과 고대의 그림자료등을 보면, 한나라때 장군 혹은 사병이 입은 갑옷은 철갑이었고, 이것은 마갑(馬甲)처럼 직접 몸에 걸치는 것이다. 아마도 <<견룡사갑>>의 감독은 이런 갑옷으로는 위풍당당함을 표현하기 힘들고 시각효과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영화속의 조자룡의 갑옷에 일본의 특색이 담긴 갑옷 모양을 하게 되고, 언듯 보기에 대나무와 쇠조각으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대부분 과거의 전쟁장면을 표현하는 영화드라마작품은 비슷한 질책을 받아왔다. 영화 <<천지영웅>>도 투구양식에 대하여 비난을 방았었다. 다른 나라의 유사한 작품 예를 들어 <<하늘과 땅>>의 일본투구갑옷, 혹은 <<천국왕조>>의 유럽투구갑옷을 보면 우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중국고대의 투구갑옷이 실제로 어떠했는지는 아주 모호하다. 일반인들의 머리 속에 선명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이 초래된 이유는 무엇인가?

 

유영화에 따르면, 중일양국의 투구갑옷이 원래 기원은 같지만, 일본의 투구갑옷은 세계문화에 영향을 크게 끼쳤지만, 중국투구갑옷은 영향을 거의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일본은 투구갑옷을 잘 보존하였지만, 중국은 그렇지 못하였다는데도 이유가 있다.

 

중국은 송나라이후 중문경무(重文輕武)의 문화 속에 살았다. 송, 명나라의 역사를 뒤져보면, 당시에는 모두 문관들이 군권을 장악하고, 무장들은 그저 집행만 하였다. 이런 문관우위의 분위기하에서 직업군인들이 명예감을 누리기 힘들고, 가문대대로 전해지는 투구갑옷문화라는 것이 있기 힘들다.

 

현재, 고대중국갑옷투구중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들은 명나라이후의 작품이다. 이전의 자료는 모두 출토품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명나라이후의 갑옷투구도 국내수장가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투구갑옷에 대한 인식이 대부분 청나라의 투구갑옷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이미 화기가 발달되어 이전의 투구갑옷문화는 쇠락하였던 때였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중국투구갑옷의 이미지는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전통희극에서의 모습이다. 또 하나는 초기 연환화(連環畵)에 나오는 모습이다. 희곡에서의 투구갑옷이미지의 기원은 명청시대의 투구갑옷이다. 연환화의 투구갑옷이미지는 대부분 희곡에서 따왔다. 실제로 중국은 명나라이전에 투구갑옷이 아주 풍부했다. 만일 제대로 만들면 아주 파괴력이 클 것이다. 명청의 투구갑옷이라고 하더라도, 중국영화드라마에서의 표현은 서로 다르다. 당시의 갑옷은 모두 안에 조각을 이어서 만들었다. 그리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부드러워도 안은 강했다. 이런 갑옷투구를 입으면 질감이 아주 좋다.

 

중국투구갑옷의 모습이 모호한 것은 중국역사상 전통이 중간중간 중단된 것과도 관계된다. 유동봉에 따르면, 송나라때까지 중국의 투구갑옷은 연속하여 발전하였는데, 원나라이후 황조가 바뀌면서 문화와 무기장비도 여러 요소의 제약을 받아 역사의 흔적은 점차 사라졌다.

 

그렇다면, 중국영화드라마의 투구갑옷은 어떤 모습을 하여야 할까?

 

유영화는 중국고대투구갑옷역사의 권위자이다. 그리고 무대미술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영화드라마작품에서의 투구갑옷설계에 대한 가치있는 견해를 지니고 있다. 유영화에 따르면, 지금까지 그가 만족할만한 영화드라마는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중국고대투구갑옷에 대한 자료가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국내에서 심미적인 요소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왕왕 일본적인 요소를 많이 끌어들이게 된다고 한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일본의 투구갑옷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설계사들이 가져온 요소는 왕왕 일본투구갑옷에 특유한 것들이다. 이런 "유미주의"관념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결국 설계해낸 투구갑옷에 아무런 질감도 아무런 시각적 효과도 없게 된다.

 

어떻게 이런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방법은 단 하나이다. 중국투구갑옷을 본래의 면목대로 복원시키는 것이다. 설계사가 고대의 투구갑옷의 구조와 기능에 대하여 진정으로 이해할 때만이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고대투구갑옷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군용제품의 가장 주요한 아름다움은 기능의 아름다움이다.

 

중국고대의 투구갑옷은 아주 다양했다. 어떤 제작기법은 아주 독특했다. 예를 들어, 중국고대에는 단단한 갑옷조각을 베처럼 짰다. 이것은 유럽중세기의 단단한 판갑과 완전히 다르다. 유영화에 따르면 천진의 한 곳에서 옛날의 포면갑옷을 만들어 본 적이 있다. 만들기는 아주 힘들었지만 효과는 아주 좋았었다고 한다.

 

이와 비교하자면, 서양영화는 이 측면에서 아주 잘하고 있다. 유영화는 <<성녀 잔다르크>>라는 영화를 아주 좋아한다. 이 영화에서는 갑옷의 질감이 아주 뛰어나고, 진짜같이 느껴진다고 한다. 특히 투구갑옷이 무기에 부닥칠 때 나타나는 효과는 정말 놀랄 정도이다. "언제 중국영화는 이런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