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자룡)

조운(趙雲)은 무장이 아니라 문신이다.

중은우시 2012. 6. 29. 12:46

글: 이회순(易懷順)

 

만일 조운이 문신(文臣)이라고 한다면 논란을 한바탕 불러올 것이다. 그러나, 조운이 무장(武將)이라는 것은 확실이 의문이 든다.

 

조운의 오호상장(五虎上將)이라는 신분은 주로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진수의 <삼국지>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삼국지>의 조운에 대한 묘사는 기지(機智), 충의(忠義), 용감(勇敢)의 몇 가지 단어로 개괄된다. 그러나, 책에서 조운이 무장이라는 말은 한 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또 다른 한편으로, 성도(成都)의 무후사(武侯祠)에는 조운을 문신으로 구분했다. 무후사는 당나라때 건립된 것이므로 신뢰성이 있다.

 

사람들이 조운을 무장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대부분 조운이 2번에 걸쳐 아두(阿斗)를 구했고, 하후란(夏侯蘭)을 생포하엿으며, 정군산(定軍山)에서 위나라군대를 물리쳤다는 등으로 인한 것이다. 사실상 이들 이유는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장판파에서 아두를 구한 것에 대하여 <삼국지>에는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저 조운이 아두와 감부인등이 길을 잃어버린 것을 알고는, 말을 되돌려 찾으러 갔고, 얼마 후,조운이 아두를 안고, 감부인을 보호하여 군영으로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번째 아두를 구한 것에 대하여는 손권이 많은 선박을 보내어 손부인과 아두를 동오로 데려가려 할 때, 조운은 장비와 함께 병력을 이끌고 가서 막았고, 아두를 데려오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앞에서는 순수하게 '찾았고' 이는 무장이라는 신분과는 무관하다. 후자는 '장비'와 함께 갔다. 조운이 얼마나 많은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후란을 생포한 것은 더더욱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하후란은 법률업무를 하는 사람이다. 무장이 아니다. 아마도 조운이 그보다 용감해서 그를 포로로 잡았는지는 모르겠다.

 

정군산에서 위나라군대를 물리친 것에서 조운은 지다성(智多星)의 역할이 더욱 컸다. 황충이 위나라군대의 양초를 중간에 빼앗았는데, 조운은 가지 않았다. 나중에 황충이 돌아오지 않자, 조운이 병력을 이끌고 구하러 간다. 나중에 위군이 사방에서 포위공격하자, 조운은 촉군에게 깃발을 내리고 북도 치지 못하게 한다. 위군은 복병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퇴각한다. 조운은 이 기회를 틈타 군사들에게 노전으로 위군을 쏘게 한다. 위군은 놀라서 자기들끼리 부닥치며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많았다.

 

유비가 조운을 기용한 점을 보더라도 발견할 수 있다. 조운의 진정한 재능은 지낭(智囊)이나 관가(管家)일 뿐이다. 조운은 단 한명의 적장도 벤 적이 없고, 단 한 곳의 요새도 점령한 적이 없으며, 단 한번의 대전을 승리로 이끈 적도 없다; 그는 일생동안 선봉장이나 총사령관을 맡은 적도 없고, 지방장관을 지낸 바도 없다. 많은 사람들은 유비가 사람보는 눈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조운을 중용하지 않은 것이라고.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유비의 인재등용수완은 제갈량보다 뛰어나다. 조조와는 비교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그다지 크게 차이나지는 않았다. 유비는 절대로 자신의 곁을 항상 따라다니는 조운을 잘못 볼 리가 없다. 중용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조운은 무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담량은 있지만, 역량이 부족하다. 관리업무를 하면 충분하다. 유비가 조운에게 병력을 지휘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곁에 있게 한 것은 바로 그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피한 것이다. 이는 그의 장기적인 안목과 탁월한 식견을 보여준다.

 

조운은 확실히 뛰어난 정치적인 안목과 대국관을 지니고 있었다. 유비가 성도를 얻은 후, 어떤 사람이 성도의 논밭과 저택들을 장수들에게 나눠주라고 건의한 바 있다. 조운은 그러나 다르게 생각했다: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의 전답과 저택을 빼앗아서는 안된다. 당연히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관우가 죽은 후, 유비는 동오를 쳐서 복수할 결심을 하는데, 조운은 또 이렇게 말한다: "국적(國賊)은 조조입니다. 손권이 아닙니다. 만일 위나라를 먼저 멸한다면 손권은 자연히 신하로 복종할 것입니다. 현재 위나라의 조비는 한나라로부터 나라를 빼앗아 황제를 칭합니다. 인심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위나라를 정벌하지 않고 동오와 교전하는 것은 좋은 방책이 아닙니다." 조운이 군자금을 잘 관리하여 남은 것이 많게 되었다. 제갈량은 조운에게 장병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한다. 그러나 조운은 장병들에게 공로가 없으므로 나눠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남은 물건은 남겨두어 겨울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이상의 사실을 보면, 조운의 문신으로서의 대국관과 정치판단력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촉국의 전후좌우 4대장군이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 무후사에서 조운을 문신으로 분류한 것은 절대로 건설한 사람이 혼동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조운을 무장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조운이 가장 용감하고, 가장 매력있으며, 가장 무장기질을 갖춘 문신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