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려도사건은 까오슝사건이라고도 부른다. 대만의 국민당이외의 세력이 직접적으로 지도하여 국민당과 조직적으로 대항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1979년 9월 황신개(黃信介)를 발행인으로, 허신량(許信良)을 사장으로, 장준굉(張俊宏)을 총편집인으로 하는 정치적 간행물인 <<미려도>>가 타이페이에서 창간되었다. <<미려도>>는 언론내용이 격렬하였으며, 사무위원은 70여명에 달하였고, 당시 국민당외의 정치적인사를 거의 망라하였었다. 대만전역에 10개의 사무소를 두고, 발행량이 최대 8만부에 달하였다. 이들은 <<미려도>>를 중심으로 정당을 결성하려는 목적을 명백히 나타냈다. 그러나 당시의 유일 집권당인 국민당의 눈에는 <<미려도>>가 가시처럼 보였다. 잡지창간회식때에도 내력이 불분명한 자들이 난동을 벌이고, 창간후의 2개월동안 발행인의 집과 잡지사에서 여러차례 소요와 위협이 있었다.
1979년 11월 30일, <<미려도>>는 대만인권위원회와 연합하여 대만당국에 12월 10일 까오슝에서 국제인권일을 기념한 집회와 시위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미려도>> 잡지는 당국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원래의 계획대로 집회와 시위를 강행하였고, 나무몽둥이도 준비하였다.
12월 10일 계획대로 집회를 개최하자 대만당국은 군경을 보내서 주변도로를 봉쇄하였다. 저녁 6시, 미려도 잡지사 까오슝사무실에 이미 5,6백명이 모여있었으나 경찰의 제지로 시위를 강행할 수 없었다. 황신개, 요가문등은 강연을 통하여 집회에 참석한 3천여명의 군중은 분위기가 격렬해지고, 특무정치를 타도하자, 국민당독재에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로 200여명이 부상당하였고, 3일후 대만당국은 관련자들을 모두 구속하였다. 횡신개, 시명덕, 장준홍등 152명은 반란죄로 체포되었고, 1980년 3,4월에 군사재판을 통하여 시명덕은 무기징역, 황신개는 징역14년, 요가문, 장준웅등 6인은 징역 12년을 나머지 30여명은 4년 내지 6년의 유기징역을 받았다.
미려도사건은 대만현대사상의 일대사건이었으며, 당외인사들을 이를 통하여 국민당에 도전하였고 그들의 실력을 나타냈으며, 국민당은 이를 활용하여 당외세력을 일망타진하였다.
미려도사건의 담당변호사였던 진수편(陳水扁)은 이후 정치에 뛰어들어 민진당에 가담하고 현재 대만의 총통을 맡고 있다. 진수편외에도 미려도사건의 변호를 맡았다가 정치에 뛰어든 인물이 많다.
강붕견(江鵬堅, 민진당 창당원로), 소정창(蘇貞昌, 현 타이페이현장), 사장정(謝長廷)등이 모두 미려도사건의 변호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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