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에 공을 세운 10대 원수의 사망을 순서대로 정리하였습니다.
1. 1963년 12월 16일 나영환(羅榮桓). 61세.
임종전에 나영환은 친척들에게 보통집으로 이주해서 살도록 요구했다. 1963년 12월 22일 북경노동인민문화궁에서 1만여명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국가주석인 유소기, 전인대상위위원장인 주덕, 국방부장 임표, 국무원대리총리 등소평이 참석했다. 나영환은 호남(湖南) 형산(衡山)사람이고, 부인은 임월금(林月琴)이다.
2. 1969년 6월 9일 하룡(賀龍) 71세.
문화대혁명당시 감금중에 사망하였다. 1974년 9월 중공중앙은 하룡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1975년 6월 9일 서거6주년에 총리 주은래가 하룡의 유골안장식에서 추도사를 하였다. 하룡의 본명은 하문상(賀文常)이고, 부인은 설명(薛明)이다.
3. 1971년 9월 13일 임표(林彪) 65세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도망가다가 몽고 원두얼한에서 비행기추락으로 사망하였따. 1973년 8월 20일 당에서 제적당하였다. 1981년 1월 25일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서 반혁명집단사건의 주범으로 확정되었다. 호북 황강 사람이며, 부인 엽군도 비행기추락시 함께 사망하였다.
4. 1972년 11월 29일 진의(陳毅) 71세
국무원부총리 겸 외교부장인 진의가 서거했다. 1972년 1월 10일 북경 팔보산에서 1500며이 참가한 추도회를 개최했다. 중공중앙주석 모택동, 시하누크 캄보디아 국왕, 국가부주석 송경령, 국무원총리 주은래가 모두 참석했다. 주은래가 추도사를 하였다. 진의의 자는 중홍이고 사천 낙지 사람이다 부인은 장천이다.
5. 1972년 11월 29일 팽덕회(彭德懷) 76세
팽덕회는 누명을 쓰고 죽었다. 1978년 12월에 명예회복되었다. 1978년 12월 24일, 팽덕회와 전 중공중앙선전부장 도주의 초도회가 북경인민대회당에서 거행되었다. 중공중앙 화국봉, 부주석 섭검영, 등소평, 이선념, 진운, 왕동흥이 참가하였다. 팽덕회는 호남 상담 사람이고, 부인은 포안수이다.
6. 1976년 7월 6일 주덕(朱德) 90세
전인대 상무위원장이던 주덕이 서거했다. 7월 11일에 북경인민대회당에서 추도회를 개최하였다. 중공중앙 제1부주석 화국봉, 부주석 섭검영등이 참석했다. 주덕의 자는 옥계이며, 사천 의롱 사람이다. 부인은 강극청이다.
7. 1986년 10월 7일 유백승(劉伯承) 94세
1986년 10월 16일 북경인민대회당에서 추도회를 개최하였다. 중앙군사위주석 등소평이 주재했다. 중공중앙총서기 호요방이 추도사를 읽었다. 유백성은 사천 개현 사람이고 부인은 왕영화이다.
8. 1986년 10월 22일 섭거명(葉劍英) 90세
광동사람이다.
9. 1990년 9월 21일 서향전(徐向前) 88세
서향전은 생전에 죽은 후에 유체고별식이나 추도회를 열지 말도록 말하였었다. 산서성 오대 사람이고 부인은 황걸이다.
10. 1992년 5월 14일 섭영진(聂榮臻) 93세
사천 강진 사람이고, 부인은 장서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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