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애역사(最愛歷史)
건륭제는 자칭 중국의 태평성세를 창조하고 이어갔다. 그러나 그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자신의 아들, 태청제국의 황위계승자 애신각라 옹염(顒琰)(즉 가경제)를 화약통 위에 올려놓았다.
화약통에 앉아 있게 된 가경제는 사고가 빈발하는 제국에 대하여 한 순간도 쉬지 못하고 심신이 지쳐갔다.
힘겹게 3년을 참고나서 마침내 거탐 화신(和珅)을 무너뜨린다;
누가 알았겠는가, 사천,호북의 백련교(白蓮敎)의 난은 일촉즉발이 되어 청나라중기 최대의 내부전란이 된다.
그동안, 자금성안에서는 기이한 암살사건이 발생하여,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다.
나중에 또 한 무리의 천리교도(天理敎徒)가 태감의 내부호응하에 황궁으로 쳐들어와, '한당,송명에도 없었던 일'이 일어난다.
이뿐아니라, 제국의 변방 - 화남(華南)의 해상역량은 마찬가지로 이 비극적인 숙명을 지닌 황제를 아주 초조하게 만들었다.
1805-1809, 4년동안 양광총독(兩廣總督)이 전후로 4번 교체된다;
1805년경, 1년내에 광동은 수사제독(水師提督)이 3번 교체된다.
1808년, 광동총병(廣東總兵) 임국량(林國良)이 피살된다
1년후, 1809년, 또 다른 총병 허정계(許廷桂)가 피살된다(일설에는 자살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화남의 해안을 종횡하던 해적연맹과 관련이 있다.
19세기의 첫 10년은 건륭제 사후 가경제가 친정을 하면서 탐색하던 10년이다. 또한 300년간 이어져온 명청해적의 마지막 황금10년이기도 하다.
당시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제국과 해적간의 힘겨루기가 국가의 근대숙명을 고쳐쓰게 만들 줄은.
가경제
1
가경제가 친정을 시작할 때, 대청제국은 이미 100년간 조정에 대항할만한 대해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제국의 해역은 겉으로 보기에 평온했지만, 깊은 곳에서 암류가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것을.
중국해적황금시대의 세번째 전성기가 잉태되고 있었다.
역사학자들의 구분에 따르면, 개략 명나라중기 1520년부터, 중국해적은 300년의 황금시대를 맞이한다. 그리고 이 300년간 해적발전에 있어서 3차례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제1차전성기, 명나라중기에 출현한다. 특히 가정(嘉靖)연간(1522-1566)은 해적이 급속히 발전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북으로 산동에서 남으로 광동에 이르는 기나긴 해안선에서 해적의 수가 급증하고, 강대한 조직력을 갖춘 해적집단이 출현한다. 당국의 정의에 따르면, 이들 해적은 모두 "왜구(倭寇)"라고 칭했다. 다만, 실제상 왜구에는 소수의 진짜왜인(일본인)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중국동남연해의 어민과 해양상인들이었다.
명나라는 해금정책을 취하여, 이들 해적은 상인이며 해적이었다. 불법적인 대외무역을 행하면서, 조정에서 대외무역이 합법화해주기를 기대했다. 가장 유명한 대해적은 왕직(汪直)이다. 그는 10여만명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의 산하에 크고 작은 선박이 무수히 많았다. 자칭 "정해왕(淨海王)"으로 전성기에 동남해역 내지 일본해역일대에서 큰형님이었다. 그는 1559년 조정에 유인체포되어 처형당한다.
제2차전성기는 명청교체기에 나타난다. 동남해적은 반세기정도 조용하다가 명나라말기에 다시 굴기한다. 이때의 대표인물은 정지룡(鄭芝龍), 정성공(鄭成功) 가족이다. 정씨부자는 방대한 해상제국을 건립하고, 복건, 대만일대에서 정씨의 승인이 없으면 그 어떤 배도 바다로 나갈 수 없었다.
청나라가 북경으로 들어와서 천하의 주인이 된 후, 정씨집단은 극도의 위협을 느낀다. 청나라초기에 일련의 엄격한 천해정책(遷海政策)이 나오면서, 복건, 광동의 대부분 연해주민들은 육지쪽으로 30리-50리를 이주해야 했고, 모든 건물과 재산을 파괴하며, 견벽청야(堅壁淸野)해야 했다. 이를 통해 해적에 대한 육상공급선을 끊어버린다. 이런 정책은 연해주민들에게 엄청난 재난이 된다. 그리하여 청나라는 다시 해상세계와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생겨버린다. 다만 정씨가족의 해상세력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1684년, 강희제가 전쟁을 일으켜 대만을 수복하고서야 비로소 철저히 정씨세력을 소탕하게 된다.
가경제는 해상이 조용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증조부의 이때 강격한 조치때문이다. 그리하여 동남연해에서 그후 100년간 아무런 풍랑도 일지 않는다. 한때 잘나가던 해적들은 거의 사라진 듯했다.
가경제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의 부친 건륭제도 말년에 득의만만하게 얘기한 바 있다: "광동은 지금 긴요한 사건이 없다. 해적들은 복강안(福康安)이 붙잡아 정리한 후, 점차 사라졌다."
건륭이 이 말을 한 때는 1793년이다. 그러나 몇년이 지난 후, 중국해적은 제3차 전성기이자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한다. 광동해적은 심지어 "홍기표표(紅旗飄飄), 호한임초(好漢任招), 해외천자(海外天子), 불파천조(不怕天朝)"를 외쳤다.
건륭제는 이미 죽어서 이렇게 자신의 말이 씹히는 모든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가경제에게는 이 모든 것이 가슴 속에 박힌다.
해적이 어떻게 황제의 눈에 돌연 제국의 해변을 위협하는 강대한 세력으로 굴기하게 된 것일까?
2
일찌기 양광총독을 지낸 왜십포(倭什布)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건륭54년(1789년), 광동에는 큰 해적이 없었다. 그리고 해적이 감히 관군에 대항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가끔 연해의 가난한 어민이나 뱃사람들 몇몇이 규합하여, 기회를 틈타 지나가는 상선을 강탈하는 사건이 발생할 뿐이었다.
즉, 당시의 해적은 아직 직업화하지 못했고, 그들은 대부분 양민으로 살고 있으면서, 이중신분을 가졌다. 어떤 때는 어민이고 어떤 때는 해적이다. 통상적으로 가족이 쓸 돈이 없어지면 위험을 무릎쓰고 해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1790년이전, 해적이 비록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회색지대를 오가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진다. 하나의 근본원인은 건륭34년(1769년)이후 40여년간, 광동의 인구가 급증했다는 것이다. 통계수치를 보면, 1769년 광동인구는 약 683만명인데, 1812년에 이르러 1,890만으로 늘어난다. 40여년간 1,200여만명이 늘어난 것이다.
인구급증은 사람과 토지의 관계를 긴장시킨다. 역사학자 양방중(梁方仲)이 추산한 바에 따르면, 가경연간 광동의 1인당 경작면적은 1.6무(1무는 666평방미터 즉 200평)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 청나라때 학자 홍량길(洪亮吉)은 1인당 평균 4무는 되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광동의 1인당 경지면적은 이 수치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리하여 성내의 삼대족군(三大族群) 사이에 토지쟁탕을 위해 관계가 날로 격화괸다.
생존투쟁의 결과, 많은 사람들을 바다로 내몰았다. 바다에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토지를 떠난 후, 대대로 배를 타고 생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이들은 왕왕 두 가지 신분을 겸비한다: 어민과 해적.
통계에 따르면, 청나라중기, 광주부근만 하더라도 선상주민이 약 8만명 있었다고 한다.
광동은 해안선이 길고, 천연항구가 많으며, 무수한 섬들이 있다. 이곳은 모두 해적이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된다. 대청의 흠주(欽州) 방성(防城)과 월남의 만녕주(萬寧州) 사이에는 '강평(江坪)'이라는 변경소도시가 있다(1885년이후 중국에 귀속됨). 이곳은 양국의 행정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무정부상태였다. 그리하여 광동과 월남에서 모인 상인, 어민, 도주범등의 대량으로 모여들었고,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해적이었다. 중국, 월남 양국의 수군은 소탕작전때도 국경선을 넘을 것을 우려하여, 강평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강평은 무법천지의 낙원이 된다. 그리하여 이름도 없던 작은 도시가, 화남의 해적을 배출하는 최대의 소굴이 되어버린다.
역사학자 목대안(穆黛安)은 이렇게 표현했다: 중국인이 강평으로 갈 때는 어민이지만, 강평에서 나올 때는 해적이 된다.
이런 요소들만으로는 소규모의 해적들이 정부관병에 대항하기에는 부족하다. 당시 광동 관리는 화남해적이 강대해진 원인을 분석하면서, 월남에서 30년에 걸친 동란 떠이선(西山)농민운동을 떠올린다.
1770년대부터 월남에서는 응우엔 반 후에(阮文惠)형제를 우두머리로 한 떠이선 농민반란이 발생하고, 1787년에 이르러 떠이선군이 하노이(河內)로 진입하여 나라를 차지한다. 건륭제는 그를 안남국왕(安南國王)으로 봉하고, 이름을 응우엔 꽝 빈(阮光平)으로 고친다. 그러나 떠이선 정권이 건립된 후에도 월남의 정국은 안정되지 못하고, 남방의 응우엔 푹 아인(阮福映)이 프랑스인의 지지를 바다, 떠이선군과 10여년에 걸친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 기나긴 전쟁으로 떠이선 정권은 국고가 비게 되면서, 해적을 장려한다. 그리하여 해적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약탈한다. 강평에 있던 화남해적은 떠이선정권과 결탁하여 이익공동체가 되면서, 떠이선군에 약탈한 물자를 제공한다. 떠이선정권은 해적들의 장물을 처리해주는 큰 고객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해적들은 해상군사역량을 키우기 시작하며, 떠이선군에 가입하여 함께 싸운다. 중국해적은 나중에 떠이선군의 모든 해상전투에 참가한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떠이선정권의 응우엔 꽝 쭝(阮光中)은 해적수령에게 선박과 무기를 제공하고, 그들이 병마를 모집할 때 관직을 줄 수 있는 권한을 주고, 그들에게 통행증과 인장도 내려준다.
이렇게 하여, 오랫동안 화남해역에서 활약하던 해적들은 졸지에 합법적인 겉옷을 입게 된다. 그들은 중국으로 돌아가, 약탈을 한 후에, 다시 월남으로 돌아가, 응우엔 꽝 쭝에게 전리품을 바치고, 응우엔 꽝 쭝은 그들을 안전하게 보고하고 상당한 이익까지 나누어준다. 그 시기에, 동남연해의 크고 작은 해적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월남에 꽝쭝황제가 있는데, "빅보스(大老板)"이다. 그들은 꽝쭝황제를 빅보스로 모시고 해상에서 더욱 큰 이익을 취했다.
월남의 떠이선정권을 등에 업고, 화남해적은 점차 강대해진다. 역사학자 유평(劉平)의 분석에 따르면, 떠이선군이 해적에게 제공한 무기와 선박은 매우 우수했다. 해적선은 광동수사의 전선보다 3,4배는 컸고, 포탄도 10여근이 더 나갔다. 그뿐아니라, 해적들은 떠이선군에게서 뛰어난 작전기술과 조직방법까지 배운다. 응우엔 폭 아인의 군대와 해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실전경험도 쌓는다. 어떻게 해야 바다 위에서 화포를 사용하고 거점을 세울 수 있는지를 익힌다.
진첨보(陳添保), 막관부(莫官扶), 정칠(鄭七)등의 해적두목은 월남내전에 참가하면서 신속히 세력을 키운다.
18세기의 마지막 10년간, 소규모로 활동하던 화남해적은 선박, 무기장비는 물론이고, 규모나 조직구조까지도 모두 업그레이드된다. 해적내부에서 서로 다른 방파가 생기고, 각각의 방파 아래에는 다시 대고(大股), 소고(小股)가 있었다. 연합활동을 하기도 하지만, 서로 견제하기도 했다.
해적들은 심지어 적극적으로 관청을 도발하기도 했다.
지방지의 기록에 따르면, 1801년 9월, 전설적인 해적두목인 정칠은 또 다른 해적두목과 연합하여, 광동 월서 오천현(吳川縣)의 한 요새를 돌연 공격하여 거의 점령할 뻔한다. 다행히 파총(把總) 한 사람이 부하에게 대포를 쏘게 해서, 겨우 해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 해적들은 촌민으로 변장하고 요새의 뒤로 들어가, 전투하는 과정에서 그 파총을 죽여버린다.
그러나, 이번 관병의 패배에 대하여, 당시 양광총독이던 길경(吉慶)이 가경제에게 올린 상소에서는 전혀 다르게 적혀 있다: 해적들이 해상에서 상선을 약탈하다가, 오천현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발각당한다. 파총은 사람을 모아 배를 저어 바다로 나가 해적들과 결전을 벌인다. 전투과정에서 해적들은 여러명이 피살당한 후 후퇴했고, 그 파총도 전투중 목숨을 잃었다.
같은 사건에 대하여 서로 다른 판본이 나타난 것이다. 핵심차이는 전투가 해상에서 진행되었느냐, 육상에서 진행되었느냐이다. 해상은 해적이 세력범위이다. 관병이 바다로 나가 작전을 한다는 것은 진격하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육상은 관부에서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곳이다. 만일 해적들이 쳐들어왔다고 말하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역사학자 목대안은 이렇게 추측한다. 이 전투는 십중팔구 육상에서 진행되었을 것이다. 양광총독이 황제에게 사실을 숨긴 것은 이런 류의 사건이 그의 관할지역인 육상에서 발생하였다면 조정의 질책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지방관청은 이미 점점 강대해지는 해적세력에 두려운 심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월남 떠이선정권의 지원으로 강대해진 화남해적은 결국 1802년 응우엔 푹 아인의 군대와의 해전에서 철저히 격패당한다. 응우엔 푹 아인은 3명의 해적수령을 포로로 잡아 청나라조정에 바쳤을 뿐아니라, 일거에 해적소굴 강평을 파괴시켜버린다. 그리고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해적거물 정칠도 포로로 잡혀 참수당한다.
이 변고로 월남에서 후원자과 근거지를 잃게된 화남해적은 다시 바다로 나가 광동연해로 되돌아온다. 중국동남의 구불구불 기나긴 해안선에서는 다시 한번 풍운이 일게 되는 것이다.
3
1802-1805년은 해적집단의 내부혼전시기이다. 이전의 해적거두들이 월남의 응우엔 푹 아인에게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화남해적은 일시에 군룡무수(群龍無首)의 상태가 된다. 각 방파, 모든 해적두목들이 큰형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다보니 혼전이 끊이지 않았다.
1805년, 가정10년, 화남의 해적방파는 마침내 모여서 합의를 달성한다. 7대방파의 우두머리들이 각자의 장기적인 이익을 위하여 양보하면서 느슨한 해적연맹을 형성하게 된다.
여기에 가담한 7대방파는 각각 다음과 같다:
정일(鄭一) 정문현(鄭文顯); 홍기방(紅旗幇), 선박 600-100척, 인원 2만 - 4만
오석이(烏石二) 맥유금(麥有今): 남기방(藍旗幇), 선박 160척이상, 인원 개략 1만
곽파대(郭婆帶) 곽학현(郭學顯): 흑기방(黑旗幇), 선박 100여척, 인원 1만
총병보(總兵寶) 양보(梁寶) : 백기방(白旗幇), 선박 약50척, 인원 미상
동해패(東海覇) 오지청(吳智靑): 황기방(黃旗幇), 선박, 인원 미상
금고양(金牯養) 이상청(李相淸): 녹기방(綠旗幇), 선박, 인원 미상
정노동(鄭老同) 정유당(鄭流唐): 동맹계약체결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청나라에 투항함
정노동의 청나라조정에 투항한 후, 화남해적연맹은 6대방파가 된다. 각각 수십척에서 천척에 이르는 선박을 보유하며 종횡무진 활약하여 한때 위세를 떨친다.
이 연맹의 핵심은 실력이 가장 강했던 홍기방의 방주 정일이다.
정일은 해적집안 출신이다. 조상 정건(鄭建)은 정성공 휘하의 군관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광동서부 광주만으로 도망친 후, 해적이 되었다. 4대에 이르러 두 명의 해적두목을 배출한다. 한명은 앞에서 언급한 정칠로, 떠이선정권의 해적두목중 한명이다. 또 다른 한명은 정일로 정칠의 당제(堂弟)이고, 역시 이전에 월남내전에 참가한 바 있다.
정일의 영향력은 그의 산하 선박과 인원이 해적집단에서 절대우세를 점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리고 연맹의 다른 양대방파인 남기방과 흑기방도 모두 그와 깊은 관련이 있다. 남기방의 우두머리 오석이는 뇌주반도(雷州半島)를 통제하며 정일의 주요파트너이다. 흑기방의 우두머리 곽파대는 뱃사람 출신으로 정일에게 노획되어 강제로 해적이 된다. 그후 정일의 총애를 받으면서 한걸음 한걸음 성장하여 한 방파의 방주가 된다.
이들 해적방파는 뇌주반도와 홍콩 대서산(大嶼山)에 기지를 건립하여, 이전의 강평을 대체한다. 이곳이 새로운 해적소굴이 된 것이다.
1807년 11월, 42세의 정일이 월남에서 급사한다. 어떤 사람은 그가 큰 바람에 바다로 빠져죽었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월남의 한 전투에서 죽었다고도 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권세가 컸던 우두머리가 죽으면, 그 방파는 해산하거나 분열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일이 죽은 후에 홍기방은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훨씬 더 기세등등해진다. 왜냐하면 정일의 자리를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전설적인 인물 정일의 미망인 석향고(石香姑)였기 때문이다. 강호사람들은 그녀를 "정일수(鄭一嫂)"라고 불렀다. 서방사람들은 그녀를 "용수(龍嫂)"라고 불렀다.
정일수는 원래 광동의 선상기녀였다. 나중에 정일에게 붙잡혀가서 부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보통여자가 아니었다. 일단 해적집단에 가담하자, 처음부터 끝까지 남편의 해적활동에 개입한다. 정일의 생전에 이미 자신의 세력을 심어놓았고, 홍기방내에서 아주 큰 권위를 확립해둔다. 그리하여 정일이 돌연 사망하였지만, 그녀는 금방 권력이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녀를 도와 순조롭게 이 과정을 마무리하게 해준 것은 그녀의 심복, 양자 겸 애인인 장보자(張保仔)이다(본명은 장보(張保)이고 광동인들은 습관적으로 그를 장보자라고 불렀다)
장보자는 화남해상의 마지막 해적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을만한 문헌기록에 따르면, 장보자는 광동 신회(新會)의 한 어민가정에서 태어났다. 15살때부터 부친을 따라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았다. 그때 정일의 해적단을 만나 붙잡혀 간다. 정일은 장보자를 보자 그가 '총명하고, 말재주가 좋으며, 나이도 어리고 잘 생겼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폐지(嬖之, 사랑한다는 의미)"한다. 나중에 장보자는 정일의 의자(義子)가 되는데, 실제로는 그의 동성애대상이었다. 정일의 총애를 받으면서, 장보자는 금방 해적두목으로 성장한다.
장보자는 매서우면서도 협기가 있었다. "매번 약탈할 때, 앞으로 나아가 싸우지 않는 자는 죽였다. 재물을 얻으면 나누었고, 따로 쌓아두지 않았다. 사람을 붙잡더라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정일수에게 충성을 다했다. 모든 일을 그녀에게 물어본 후에 처리했다. 정일이 죽은 후, 정일수는 금방 장보자와 성관계를 갖는다. 이 관계를 통해 그녀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진다. 해적연맹에서, 거의 모두 정일수와 장보자가 겉으로는 의모와 의자이지만, 실제로는 애인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일수와 장보자가 장악하고 있던 기간동안 해적방파는 엄격한 행위규범을 정해놓았다. 예를 들어, 약탈한 재물은 기주(旗主)가 통일적으로 분배하고, 여자인질은 강간하지 않으며, 난잡한 성행위를 할 수 없다등등. 홍기방에 인질로 붙잡힌 영국인 글래스풀은 나중에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규정을 위반한 해적은 채찍을 맞거나, 감금당하거나 심지어 능지처참당했다. 그 결과 모든 해적은 엄격하게 집행했고, 이는 거의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전성기때, 화남해적연맹이 돈을 버는 방법은 주로 아래의 몇 가지 방식이었다"
첫째, 상선약탈. 인질납치, 납치후에 몸값받아내기. 인질의 친척이 몸값을 제떄 지불하지 않으면, 그들은 즉시 인질의 손가락 하나 혹은 귀 한쪽을 잘라보내면서 협박했다. 수단은 악독하고 잔인했다. 그들이 유일하기 지키는 강호규칙은 몸값을 받으면, 즉시 사람을 풀어준다는 것이다. 한번도 식언한 사례가 없다. 해적들의 눈에, 가장 가치있는 것은 서양인이었다. 홍기방에 납치된 글래스풀은 최종적으로 7,564 스페인은원을 몸값으로 내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둘째, 광동서부의 소금운송항로통제. 소금운반선박에 대한 약탈를 통해 염삼들을 두려워하게 만들었고, 염상들은 직접 해적들에게 보호비를 내면서 안전통행권을 확보했다. 나중에 염상들은 심지어 해적에게 양식과 무기까지 제공하여, 그들의 염선이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도록 도움받았다. 이는 해적방파의 고정수입이 된다. 유사한 돈벌이방식을 해적들은 금방 아편무역상인들에게 적용한다.
셋째, 직접 세력을 육상으로 침투시킨다. 화남연해의 일부 도시, 마을에서 보호비를 받아낸다. 돈을 내지 않는 도시, 마을은 평지로 화하는 액운을 피하기 어렵다. 육지에 상륙한 해적은 남성촌민은 죽여버리고, 부녀와 아동은 약탈해간다. 가장 기세등등했을 때는 해적들이 공공연히 관군의 영지까지 습격하여, 무기, 탄약을 강탈한다. 정말 무서운 것이 없는 지경이었다.
그들은 잔인하다는 명성을 쌓아, 해적의 위하력을 전파한다. 그리고 저항하는 선박이나 선원들에 대하여는 비인간적인 고문과 고통을 가한다. 그들과 맞서싸우던 수사(水師)의 선원이 일단 체포되면 능지처참을 당하거나, 개당파두(開膛破肚)했다. 수단이 극히 잔인했다. 당시의 서방인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해적들은 전투에 참가하기 전에, 모두 화약을 술에 넣어 마신다. 어떤 때는 포로로 잡힌 자의 심장과 간을 먹기도 한다. 이를 통해 담량을 키우는 것이다.
그들이 약탈하는 수단은 아주 비열하다. 어떤 큰 상선을 목표물로 정하면, 그들은 먼저 작은 나룻배 2척을 약탈해서, 일당을 나룻배에 태운다. 그리고 해적들에게 습격당한 것같은 모습을 취하면서 큰 상선에 도움을 청한다. 큰 상선이 동정심에 이들을 구해주고, 배에 오르게 해주면, 그들은 비로소 진면목을 드러낸다. 이와 동시에 몇척의 해적선이 다가와서 한꺼번에 큰 상선을 약탈해버린다.
해적연맹은 정일수, 장보자등의 영도하에 4년동안 규모를 배나 키운다. 1805년 6대방파는 개략 800여척의 배가 있었는데, 1809년에는 이미 1800척과 7만명을 보유하기에 이른다. 역사학자 목대안은 이 규모는 1588년 영국함대와 스페인무적함대를 합한 규모의 2배라고 말한다.
이때, 광동수사의 병력과 선박은 해적연맹의 1/4가량에 불과했다.
자금성내의 가경제가 걱정하는 바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화남해적연맹세력이 최강으로 성장하는 것과 같은 시기에, 동남의 민절(閩浙, 복건, 절강)해역에도 해적거물이 나타난다. 채견(蔡牽). 남으로 복건, 북으로 산동에 이르는 연해지역에는 모두 채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전성기인 1805-1806년에 채견은 스스로 "진해위무왕(鎭海威武王)"이라 칭한다. 그리고 계속하여 대만을 침범하여, 정씨가족을 본받아 대만을 장기적인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가경제는 제국의 해안선에 나타난 방대한 해적세력에 철저히 분노한다. 그는 해당 지방의 관리들을 대거 욕한다:
현재 민절월(복건,절강,광동) 세개 성의 해적이 이렇게 창궐하는 것은 각 아문의 관리 서리들이 이들 해적과 서로 정보를 주고 받으면서 비호를 제공하고 뇌물을 받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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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년 봄, 가경제가 크게 기대를 걸고 있는 신임 양광총독 나언성(那彦成)이 부임한다.
이 만주족고위관료는 백련교의 난을 진압한 것으로 유명하다. 가경제는 확실히 그의 기용하여 광동에서 해적을 소탕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언성은 금방 깨닫는다. 이들 화남해적은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광동의 수사관병은 해적을 무서워하는 것이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자주 선박이 고장났다는 것을 이유로 대며 해적을 잡기 위해 바다로 나가지 않는다. 이는 핑계에 불과하다. 반드시 해상순찰을 해야하는 경우에는 해적이 자주 출몰하는 구역을 피해 다녔다.
해적세력은 확실히 가경제가 말한대로 이미 관병의 내부에까지 침투해 있었다. 관료와 비적이 서로 내통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청나라조정이 해적을 소탕하려는 행동은 계속하여 실패로 끝난다. 1805년 3월, 광동순무 손옥정(孫玉庭)은 한 해적두목이 고향인 육풍현(陸豊縣)으로 몰래 잡입해 들어왔다는 첩보를 받는다. 즉시 병력을 보내 수색한다. 그런데, 돌연 한 관병이 총을 미리 쏘는 바람에 비밀리에 체포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끝나버린다.
자신만만한 나언성은 그해 9월 광주만해적을 소탕하는 전투를 시작한다. 비록 관군의 모든 주력을 출동시켰고, 해적 600명을 사살하고, 230명을 포로로 잡는 전적을 올렸찌만, 이 정도 손실은 해적연맹에 있어서 그다지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관군은 모든 정력을 소모했다. 그후 광동수사는 더 이상 작전을 벌이지 못한다. 나언성은 할 수 없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돠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개초위무(改剿爲撫). 소탕이 안되면 초무하는 것이다.
나언성은 해적을 초무하는 계획을 세우는데 모든 정력을 쏟는다. 그는 사람을 시켜 연해의 도시와 마을에 "통유구안접제자수면죄(通諭口岸接濟自首免罪)" "통유과협난민살적투성입공(通諭裹脇難民殺賊投誠有功)"등 고시를 붙인다. 1명의 해적이 투항해오면, 그의 죄를 면해주고 은10냥을 상으로 내리겠다는 것이다. 해적두목이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면 관직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대한 반응은 "열렬"했다. 많은 해적들은 속속 해적대두목의 수급(실제로는 인질의 수급인지 무고한 어민의 수급인지 알 수 없음)을 들고 관청에 투항해왔다. 목적은 상금과 관직을 얻기 위한 것이다. 이 투항의 붐에 관청에서는 최소한 3천명의 투항자를 받아들였다. 그중 수십명의 해적두목은 신분을 바꾸어 천총(千總), 파총(把總)등의 관직을 얻는다.
다만 사실상 진정 강력한 해적은 여전히 화남의 해상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시로 주강삼각주의 주요 도시들은 공격하고 약탈했다. 나언성은 이런 상황은 모조리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따. 그저 황제에게 보고하는 것은 해적들이 막다른 골목에 올렸다는 거짓소식이었다. 광동순무 손옥정이 사실을 폭로하며 나언성이 해적들에게 상을 남발하고 관직을 남발하여 아주 나쁜 선례를 만들고 있다고 고발했다.
손옥정은 상소문에서 가경제에게 이렇게 말한다: 원래 죽어 마땅한 해적에 대하여 현재 죄를 묻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후한 상을 내리고, 관직까지 주고 있다. 그리하여 민간에서는 "백성보다 해적이 낫다"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1805년 12월, 취임한지 1년도 안된 나언성이 파직당한다. 그는 나중에 충군(充軍)되어, 이리(伊犁)로 유배를 떠난다.
2년여후인 1808년초, 하나의 비극이 발생한다.
당시 절강제독 이장경(李長庚)이 복건해적두목 채견을 추격소탕하기 위하여 광동해역으로 들어와 밤새도록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이장경은 불행히도 해적선에서 쏜 포격에 맞아, 다음 날 절명하고 만다.
이 비극은 광동의 관리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 준다.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 해적소탕을 극력 주장하고 집행하던 조정관리가 결국은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양광총독이던 오웅광(吳熊光)의 첫 반응은 급히 가경제에게 새로운 함대를 조직할 것을 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웅광은 황제의 승인을 기다릴 수 없었다.
그가 상소를 올린 후, 장보자가 이끄는 해적연맹이 주강입구로 침입하여 광주성바깥을 불태워버린다. 70여세의 호문총병 임국량(林國良)은 전투중에 사망한다. 해적들은 나중의 전투에서 주강의 거의 모든 방어시설을 제거한다. 그리하여 주강을 드나드는 것이 무인지경같았다. 다음 해인 1809년 1월, 오웅광은 면직당한다.
신임 양광총독은 부임하기도 전에 오는 도중에 죽어버린다. 가경제는 할 수 없이 임시로 사람을 바꾸어 한군정황기(漢軍正黃旗) 사람인 백령(百齡)을 후임 양광총독에 임명한다.
백령은 4년동안 4번째 양광총독이 된다.
백령은 부임한 후, 두 가지 조치를 취한다. 첫째는 소금의 해로운송은 육로운송으로 바꾼다. 둘째는 '해금'을 실행한다. 이 두 가지 조치로 해적의 보급원을 끊으려 한 것이다.
광동연해주민은 해적의 약탈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번에는 관청의 행동에 기꺼이 협력한다. 바다로 나갔던 어선들은 속속 항구로 되돌아오고, 비밀리에 해적에게 양식을 제공하던 사람들은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 해적들도 버틸 수 없게 되자, 속속 해안에 상륙하여 양식을 약탈하기 시작한다.
1809년 7월, 호문총병 허정계(許庭桂)의 선단이 해적들에게 포위당한다. 격렬한 전투를 거쳐, 허정계는 결국 장보자의 홍기방에 피살당하고, 시신은 바다에 버려진다. 이는 1년내에 해적의 손에 죽은 두 번째 광동총병이다.
백령은 알고 있었다. 강대한 해적연맹을 깨트리려면, 관군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그는 최후의 희망을 주강삼각주 각지의 엘리트와 민중들에게 걸었다. 단련(團練)을 만들고, 향용(鄕勇)을 조직하여 인민의 역량으로 고향과 집을 지키는 것이다.
이건 참혹한 대결이다. 일부 도시는 촌민들을 조직하여, 침입한 해적을 물리친다. 그러나, 다른 도시들은 해적의 미친듯한 보복을 당하고, 모조리 약탈당하고 방화된다. 순덕의 한 마을은 해적이 약탈하고난 훼 전체 마을의 부녀자와 아이들을 데려가고 피살된 촌민 80명의 수급만 마을 입구의 용수(榕樹)에 매달아 놓았다.
1809년 하반기, 전체 광주성이 공황에 빠진다. 장보자가 고시를 붙여, 백령에게 몸값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광주의 안전과 바꾸는 조건으로. 광주에 주재하고 있던 영국영사관은 이렇게 보고했다. 크고 작은 하도(河道)에는 해적선박이 수시로 출몰했고, 이미 청나라에서 가장 번성한 통상무역도시의 수출입무역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인이 점거한 무역거점인데, 역시 한때 해적연맹에 포위당한다.
이런 형세하에서, 광동관리들은 영국, 포르투갈의 함대와 연합하여 해적연맹에 대한 소탕을 진행한다. 1809년 11월 20일, 광동수사제독 손전모(孫全謀)는 백여청의 병선을 이끌고 포르투갈함대와 연합하여 홍기방의 기지인 대서산을 기습한다. 일거에 정일수, 장보자해적집단을 소멸시키고자 시도한 해전을 역사에서는 대서산지전(大嶼山之戰) 혹은 적력각지전(赤瀝角之戰)이라고 부른다.
포르투갈해군은 전투가 끝난 후, 마카오에 보고하기를 그들이 1/3의 해적함대를 파괴시켰다고 했다. 그러나 청나라측에서는 이번 해전이 실패로 끝났음을 인정했다. 당시 홍기방이 납치해서 인질로 잡고 있던 글래스풀은 나중에 이렇게 회고한다. 연합함대는 1자로 늘어서서 대서산해적기지에 대하여 차례로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9일후인 11월 29일, 장보자의 선박은 모두 수리를 마쳤고, 바람방향과 조류를 정확히 읽고 돛을 올리고 나가서 손쉽게 봉쇄선을 돌파한다. 그들은 연합함대를 전혀 눈아래 두지 않았다.
홍기방의 이런 오만한 자태는 청나라와 포르투갈이 연합하여 해적을 소탕하려는 작전이 실패로 끝났음을 의미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장보자는 득의만만하게 사람을 시켜 마카오의 포르투갈장관에게 편지를 보낸다. 4척의 군함을 제공해주면, 장보자가 대청제국을 무너뜨린 후에 2,3개 성을 보답으로 내줄 의향이 있다고 말한다.
연합소탕작전이 실패로 끝난 후, 걱정에 잠겨있던 양광총독 백령은 자신도 이전의 총독들과 같은 운명을 벗어날 수 없겠다고 여긴다.
누가 알았으랴. 사람의 계산은 하날의 뜻만 못하다. 화남해적연맹의 실력이 중천에 뜬 해와 같을 때, 붕괴의 위기가 도래하게 될 줄은.
5
하나의 내부분열이 아무런 징조도없이 화남해적의 황금시대를 끝장낸다.
흑기방 방주 곽파대가 첫번째 도미노패를 넘겼다.
곽파대의 운명은 장보자와 유사했다. 모두 어민가정 출신으로 소년시절에 정일에게 붙잡혀 총애를 받고 해적이 되었다. 그리고 해적두목으로 승진했다. 다른 모든 해적과 다른 점이라면, 곽파대는 독서를 좋아했다. 그의 배 안에는 많은 서적이 있었다. 사서에는 그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手不釋卷)"이라고 썼다. 그의 뱃머리에는 이런 두 줄의 글이 써여 있었다.
도불행(道不行), 승부부어해(乘桴浮於海)
인지환(人之患), 속대입어조(束帶立於朝)
갈 길이 없으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해적이 되면 되고,
사람의 문제는 모두가 관복을 입고 조정에서 일하는 관리가 되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이 해적두목은 견식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경력과 학식수준으로 보면, 곽파대는 장보자보다 뛰어나다. 그러나 정일이 죽은 후, 나이젊은 장보자는 정일수와의 특수한 관계를 이용하여 치고 올라섰다. 이는 곽파대등 원로들의 불만을 산다. 다만 정일수의 안면을 봐서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어떤 문헌기록에 따르면, 곽파대도 기실 정일수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곽파대, 장보자는 연적관계라고 할 수 있다.
대서산지전이 끝날 때, 장보자의 선단이 청-포르투갈연합함대의 포위망을 뚫고 사람을 시켜 곽파대에게 서신을 보낸다. 흑기방에서 지원해달라고. 그러나 곽파대는 거절한다. 장보자는 분노하여, 곽파대의 불의에 복수하겠다고 다짐한다. 두 사람의 갈등은 이때부터 공개화된다.
겨우 10일이 지나서 흑기방과 홍기방간에 싸움이 벌어진다. 장보자가 관군과 싸우고 있는데, 곽파대의 선단이 돌연 나타나서, 장보자의 퇴로를 막는다. 장보자는 즉시 그에게 공격을 가한다. 전투결과는 곽파대의 승리이고, 홍기방의 300명포로와 16척의 전선을 노획한다.
이번 전투에서의 전적을 카드로 삼아 곽파대는 사람을 보내 조정에 투항할 의사를 전달한다.
사실상, 양광총독 백령은 해적에게 승리를 거둘 희망이 없어진 상황하에서, 암중으로 나언성의 옛날 망식을 취하고 있었다. 초무. 단지 백령은 나언성보다 총명했고, 그저 초무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소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초무를 했다. 두 가지를 모두 취함으로써 해적집단이 내부에서 무너지기를 기대한 것이다.
백령은 바로 이 날을 기다렸다.
1810년 1월, 그는 직접 귀선현(歸善縣)으로 간다. 거기에서 흑기방의 방주 곽파대와 황기방의 중요두목 풍초군(馮超群)을 맞이한다. 두 해적두목은 5,500여명의 해적, 110여척의 범선과 500문의 화포를 가지고 조정에 투항했다. 곽파대는 얼마전에 포로로 잡은 홍기방의 300여명 해적도 내놓았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백령은 곽파대에게 파총의 관직을 내린다.
곽파대의 투항은 엄청난 시범효과가 있었다. 금방 투항하는 해적의 수가 9천명에 달한다. 당초 6대방파로 이루어졌던 해적연맹은 무형중에 와해되어 버린 것이다.
장보자의 홍기방은 실력이 여전히 탄탄했지만, 그는 이미 조정과 계속 싸우는 것의 의의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지난해인 1809년, 복건해적두목 채견은 장보자와 오석이의 원조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관군에 격패당해 죽었다. 화남의 6대방파중 하나인 백기방 방주 양보도 이 해에 죽었다. 현재 그와 반복한 흑기방 방주 곽파대는 조정에 투항했다. 해적이 쇠퇴하는 추세는 갈수록 명백해 보였다.
장보자는 아마도 처음으로 고독과 고립의 맛을 느꼈을 것이다. 그도 투항할 생각을 품게 된다.
그는 사람을 보내 관청과 접촉한다. 투항의 가능성과 조건을 시탐해 본 것이다.
곽파대가 투항한지 1개월여후에, 장보자와 백령이 처음 만나서, 조건을 협상한다. 장보자는 조정이 그에게 80척의 배와 5천명을 내줄 것을 요구한다. 그는 이를 가지고 화남의 다른 해적을 소탕하는데 나서겠다고 한다. 백령은 그러나, 만일 진심으로 투항하는 것이라면, 선박과 무기를 모두 내놓고, 나중에 관병과 함께 소탕하면서 공을 세우면 되지 않겠느냐. 왜 배가 없을 것을 걱정하고, 사람이 없을 것을 걱정하는가.
역사기록에 따르면, 쌍방의 담판과정에 돌연 10척의 영국배에서 대포를 쏘면서 다가왔다고 한다. 장보자는 경각심이 일어 관청과 양인이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즉시 인원을 데리고 주강입구를 떠나 멀리 바다로 나간다. 담판은 이렇게 중단되었다.
그후에 장보자의 투항건은 계속 교착상태였고, 돌파구는 마련되지 않았다. 2달후, 정일수가 나서면서 교착상태는 풀리게 된다.
1810년 4월 정일수는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녀아동만 데리고 광주로 가서 백령을 만난다. 그녀는 시종 백령에게 장보자에게 선단을 하나 남겨달라고 요구한다. 결국 백령은 그녀의 요구에 굴복한다.
며칠 후, 장보자, 정일수는 홍기방의 17,318명 해적, 226척 범선과 1,315문의 대포를 가지고 광동당국에 투항한다. 당국은 장보자에게 천총(千總)의 관직을 내리고, 그로 하여금 2,30척범선의 선단을 유지하도록 허가한다. 동시에 정일수는 장보자와 혼인하는 것을 허가받는다.
이렇게 하여, 화남의 해역을 십여년간 종황하던 최고의 해적집단이 사라지게 된다.
장보자, 곽파대는 각각 조정의 명을 받아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여 동서남양의 해적잔당을 소탕한다.
같은 해 여름, 황기방 방주 오지청이 청나라에 투항하고, 남기방 방주 맥유금은 붙잡쳐 처형당한다. 광동해적의 잔당은 완전히 와해된다. 중국에서 대규모해적활동은 이렇게 끝을 고한다.
투항한지 7개월후에 장보자는 복건으로 가서 참장(參將)이 된다. 2년후인 1813년, 그와 정일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태어난다. 다시 그 이후에 장보자는 복건 민안부장(閩安副將)이 되어 팽호(澎湖)에 주둔한다. 정일수는 명부(命婦, 조정관리의 부인)에 봉해진다. 장보자가 더욱 승진하려고 할 때, 1820년 감찰어사 임칙서(林則徐)는 조정에 상소를 올려, "대만 정씨를 잊지 마십시오"라고 한다. 결국 조정에서는 임칙서의 의견ㅇ르 받아들인다. 이때부터 장보자는 더 이상 승진하지 못하고, 부장으로 평생을 마감한다.
1822년, 도광2년, 장보자는 팽호에서 병사한다. 향년 36세이다. 정일수는 다시 한번 과부가 되었다.
2년후, 정일수는 11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광동 남해현에 정착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녀는 집안사당에 백령의 화상을 모셔두었다고 한다(백령은 1816년에 사망한다)
1840년에 이르러, 당시 양광총독 임칙서는 장보자의 사건을 끄집어내어 상소를 올린다. 장보자는 해적으로 악행을 많이 저질렀으니, 나중에 투항했다고 하더라도 조정의 죄인이라는 점은 씻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여 조정은 정일수의 '명부' 지위를 박탈한다.
말년에 일찌기 가장 전설적인 여해적으로서 정일수는 도박장을 열고 편안히 지낸다. 그녀는 1844년에 늙어죽는다. 향년 69세이다.
서양신문에 실린 정일수화상
6
대청의 해역을 질타하던 대해적들이 연이어 토벌되거나 초안된다. 가경제는 마침내 그의 통치후반기에 더 이상 바다에 풍파가 일지 않게 된다.
다만 겨우 30년만에, 영국의 전선이 바다에서 몰려온다. 견선리포(堅船利砲)로 제국의 대문을 연다. 그의 후계자인 도광제는 바다로부터 오는 더욱 큰 굴욕을 맛본다. 나중의 사가들은 이 시기를 "가도중쇠(嘉道中衰)"라고 부른다. 도광제가 겪은 굴욕은 가경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로버트 안토니(Robert Antony, 安樂博)는 1520년-1810년을 중국해적의 황금시대라고 말했다. 중국해적은 규모에서나 범위에서나 한때 세계 다른 어느 지방의 해적도 필적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했다.
그러나 1810년, 장보자를 위시한 해적방파들이 초안 혹은 토벌된 후, 청정부는 해양으로 발전할 좋은 기회를 잡지 못하고, 여전히 내향적인 해양정책을 집행하여, 해양권력을 장악한 과실을 그냥 버려버린다.
해적두목의 투항에 대하여 청나라정부는 상당히 관용적이었다. 죄를 사면하고 상을 내리고 관직을 주었다. 다만 이들 투항한 해적들은 배치하는데 있어서 큰 실수를 저지른다. 절대다수의 해상작전에 장기가 있는 해적을 강제로 내지에 배치한 것이다. 그리고 지방관리로 하여금 엄중히 단속하게 했고, 그들이 다시는 바다로 나갈 기회를 갖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제국해적의 소멸은 대청제국의 승리이다. 그리고 해양제국구축의 실패이다.
사학자들은 이미 컨센서스를 이루었다. 이건 대륙성왕조의 통치사상때문이라고. 대륙성왕조는 "항상 대륙자원을 최대한 이용하고, 해적은 소멸시키는 것이 제1목표이다. 국가는 수륙무장역량으로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통해 연해에서 해적세력과 결탁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해양방어의 최선이다. 왕조국가의 해상세력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태도는 중화민족이 근대에 불행에 빠진 최대의 근원이다"
이에 비하여, 서방의 해양성왕조를 보자. 처음 해상패권을 장악한 것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다. 이들은 해적방식으로 세계로 확장하며 부를 약탈했다; 이어서 네덜란드가 포르투갈 스페인상선을 약탈하면서 패권을 잡고, 해상마차부(海上馬車夫)로 명성을 떨친다. 중국에 근대민족상처를 가한 영국은 더더욱 공개적으로 본국해적이 다른 나라를 약탈하는 활동을 장려했다. 동시에 본국상선에 대한 약탈은 금지한다. 영국여왕 엘리자베스가 총애하는 신하 월터 롤리(Walter Raleigh)에게 말한 것처럼, "해양을 지배하면, 세계무역을 지배하고, 세계무역을 지배하면, 지구의 부와 지구 자체를 지배한다."
해적은 이들 국가의 해상역량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같은 역사시기에, 중국에서도 해적의 전성시대가 도래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다른 운명이 되었다.
명나라중기이후, 왕직, 정지룡등 해상해적집단은 국외의 해상경쟁세력과 싸웠을 뿐아니라, 본국조정으로부터의 토벌도 막아야 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은 본국조정에 대한 강렬한 체제동일성인식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직은 명나라에 유인당해 체포되고 죽임을 당했다. 정지룡도 청나라에 투항했지만, 아들 정성공이 대만으로 건너간 후, 미끼역할을 잃어버리자 처형당한다.
명청 두 왕조는 모두 해상역량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두려움의 결과는 전력을 다해서 소멸시키는 것이다.
1805년, 영국은 트라팔가해전을 통해 글로벌해상패권국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한다. 중국화남의 해적연맹도 전성기에 도달한다. 다만 겨우 5년후, 이 제국의 해역에 고립된 강대한 세력은 표면적으로는 초무이지만 실제로는 해산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서구국가들처럼 합법적인 해상역량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것이다.
중국의 해상역량은 관비(官匪)대항의 구조 속에서 대외적으로 일치단결하여 대응할 수 없었을 뿐아니라, 최종적으로 만회불가능하게 쇠락해 버린다.
지금 우리가 이 시기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하나의 비극적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19세기의 첫 10년은 중국해적의 마지막 황금시대이다. 공포와 피비린내나는 역사의 기억을 남기고, 정일수와 장보자의 전설을 만겼지만, 시대와 국가의 진보에 유리한 공헌은 전혀 남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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