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월플러스(中越plus)
화인(華人)은 전세계 최대의 해외이민족군이다 2022년 총규모는 6,000만명가량이다. 기후가 온난하고, 중국과 인접한 동남아는 자고이래로 중국인의 이민에서 중요목적지였다.
동남아국가중 베트남(越南)은 중국과 관계가 긴밀하다. 한나라때부터 당나라때까지 1천여년간 베트남북부는 중국왕조의 영토였고, 많은 중국인관리, 주둔군이 이곳에 있었따. 10세기 베트남이 독립한 후, 중국인의 월남이민흐름은 전혀 멈추지 않았다.
중국인이민족군은 베트남의 역사방향과 경제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다. 20세기초에 이르러, 베트남의 중국인은 방대한 민족규모로 베트남의 제2대민족이 되고, 베트남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2차대전후, 베트남은 격렬한 국면변동으로 현지의 중국인집단의 규모에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1975년 베트남의 중국인규모는 120만을 돌파하여, 역사상 최고점에 달한다.
그후 지연국면의 변화로 베트남의 중국인은 날이갈수록 줄어들었고, 2020년에는 80만이 되지 않는다. 인구가 계속 늘어나는 상황하에서, 50년도 안되어 30%나 줄어들어, 이제는 베트남의 제9대민족으로 전락했다.
중국계집단은 일찌기 베트남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녔던가? 그리고 왜 짧은 반세기만에 베트남의 중국인규모는 급격히 감소했을까?
- 하안남(下安南)
고대 베트남의 역사는 중국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진,한시기 중국봉건왕조는 점차로 베트남북부지역을 자신의 판도에 넣고, 현지에 생활하는 낙월인(駱越人)이 한화(漢化)한 후, 지금 베트남의 주류민족인 경족(京族)으로 발전한다.
기원전1세기에서 10세기초까지, 베트남북부는 시종 중국봉건왕조의 영토였다. 특히 당나라때, 북방의 관리, 주둔군, 유배된 죄수가 베트남으로 대량 넘어온다.
그들중 일부의 후손은 현지에서 살기를 선택했고, 이들은 베트남 중국인의 비교적 초기집단인 "당인(唐人, 베트남으로는 Nguoi Duong)이 된다. 비교적 유명한 것은 당덕종(唐德宗)떄의 재상 강공보(姜公輔)이다. 그는 애주(愛州, 지금의 베트남 타인호아(淸化)임)출신으로 조상은 중국 감숙(甘肅)에서 건너갔다.
10세기초, 대당제국은 번진할거의 혼란중에 멸망하고, 베트남북부는 그 기회를 틈타 중국의 통치를 벗어난다. 970년 베트남은 중국의 북송에 칭신진공(稱臣進貢)한다.
이때의 북송은 이미 중원을 지배했지만, 아직 중국을 통일하지는 못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베트남에 대하여 북송은 베트남의 독립을 승인하고, 종번관계(宗藩關係)를 건립한다. 이때부터 베트남 경내에서 생활하는 중국인은 해외화인(華人)의 한 갈래가 된다.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중국은 요, 금, 송의 병립을 거처, 몽골인이 건립한 원나라가 1279년 정식으로 중국을 통일한다.
빈번한 전쟁은 대량의 유민을 발생시켰다. 특히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킨 전쟁에서 이민족통치를 받고싶어하지 않는 남방한인들이 해외로 이주를 결정한다. 지리적으로 이웃한 베트남은 이들 중국인들이 이민간 중요목적지였다.
1273년, 베트남의 관방사적에 처음으로 중국인이 대규모로 베트남에 이주한 기록이 나온다: "송인이 와서 귀순했다(宋人來附)....배 삼십척에 재물과 처자식을 싣고 배를 건너왔다. 수도로 데려와서 가구방(街媾坊)에 안치시킨다."
베트남은 독립후에도 경제적으로 중국과 긴밀하게 관련을 맺고 있었다. 중국상인이 중국과 베트남을 계속하여 왕래했다. 12세기에서 15세기까지,베트남의 번돈(雲屯), 반닌(萬寧), 호이안(會安)등 상업항구가 중요한 중국인거주지가 된다.
중국에서 원,명이 교체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1400년, 베트남을 통치하던 진(陳)씨왕조가 권신 호꾸이리(胡季犛)에게 권력을 빼앗긴다. 명나라는 베트남의 종주국으로서, 출병하여 베트남현지의 국면을 통제하기로 결정한다.
명군은 금방 당시 베트남 전지역(지금의 베트남 중,북부)을 점령한다. 400여년만에 다시 베트남을 판도에 편입시킨 것이다. 한때 50만이 넘는 명나라관리, 주둔군 및 가족이 베트남으로 간다. 이는 당시 베트남 총인구의 5-10%를 차지했다.
명나라의 통치는 베트남의 반항을 불러왔고, 베트남의 지방호족 레러이(黎利)가 이끄는 람선(藍山)봉기를 일으키면서, 명나라의 재정, 군사부담이 가중된다. 1427년, 명나라는 베트남의 독립을 승인하고, 레러이는 나중의 후레왕조(後黎朝)를 건립한다.
명나라가 베트남을 떠난 후, 10만이 넘는 포로가 된 명군과 그 가족은 베트남에 남게 된다. 이들은 베트남 화인의 중요한 구성부분이 된다.
17세기중엽, 중국은 명나라말기의 혼란기에 처한다. 특히 만청정권의 굴기와 남하로 이민족통치를 받기 싫어하는 명나라유민들, 귀국하길 원치 않거나 해금으로 귀국할 수 없게된 상인들, 생계를 찾는 농민, 수공업자등이 베트남으로 와서 정착하게 된다.
이 시기의 중국인이민은 규모가 비교적 컸기 때문에, 중국인세력은 분리시키기 위해, 베트남은 청나라통치를 피해서 온 명나라유민을 명향인(明鄕人)이라고 불렀다.
당시 베트남을 통치하던 후레왕조는 이미 쇠락하고, 찐(鄭), 응우엔(阮) 두 가족이 각각 베트남의 남북을 나누어 통제하고 있었다. 즉, 베트남역사상의 "찐-응우엔분쟁"이다.
찐씨는 부유한 홍하평원을 장악하고, 후레왕조의 군주를 통제하면서 조정을 좌지우지했다. 응우엔씨의 관할지역(지금의 베트남중부)은 비교적 척박했고,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할 수 없었다. 찐씨에 대항하기 위해, 응우엔은 철저히 점성국(占城國)을 병합한 후, 계속하여 캄보디아가 통제하는 메콩강삼각주로 확장한다.
중국계이민은 정치력, 재력과 노동기술에서 모두 강력했다. 응우엔씨는 중국계를 끌어들여 확장에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관할지역내에 중국인들의 자신의 문화를 유지하도록 허락하고, 비교적 큰 자주관리권을 부여한다. 그리고 중국인들에게 장사의 특권과 일정한 면세혜택도 부여한다. 중국인은 어떤 의미에서 응우엔씨의 특수한 우대조치를 받은 족군이다.
메콩강삼각주는 토지가 비옥하다. 응우엔씨는 18세기초 캄보디아로부터 이곳을 빼앗고, 새영토를 하루빨리 소화시키기 위해 반드시 메콩강삼각주의 민족구성을 바꾸어야 했다. 크메르등 원주민의 인구비중을 낮추어야 했다.
많은 중국인이 들어왔다. 예를 들어 명나라의 유신 진상천(陳上川), 양언적(楊彦迪)등이 3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미토(美獲), 비엔호아(邊和)등지를 간척한다. 나중에 다시 촐롱(堤岸)을 건설하여, 촐롱은 당시 극동최대의 쌀시장이 된다.
17세기 후반, 베트남의 포히엔(鋪憲), 호이안(會安)등지는 이미 중요한 무역집산지가 된다. 예를 들어 응우엔씨가 통제하는 호이안 대당가(大唐街)는 길이가 3,4리에 이르렀다. 1768년, 호이안 한 곳에만 화교가 6천명이었따. 그들은 모두 중요한 상인이고, 중국에서 차, 생사, 자기등을 베트남으로 운송했다.
중국인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호치민시 주위에 초보적으로 중국인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나중에 화상(華商)이 이곳에 집중되는 기초를 닦는다.
명나라의 난민 막구(莫玖)는 응우엔에 의해 하티엔(河仙)에 안치된다. 하티엔을 개발하여 당시 베트남의 저명한 무역항구로 만들고, 많은 베트남인과 외국상인은 하티엔으로 와서 무역한다. 응우엔씨는 심지어 막씨자손으로 하여금 하티엔지구에서 광산개발, 동전주조까지 허가한다. 그들은 원래의 황무지를 좋은 전답으로 바꾸었고, 이로 인해 베트남의 농업은 크게 발전한다.
북방의 찐씨는 청나라와 접경하여, 청나라가 남하하여 베트남의 내정에 간섭할까봐 우려했다. 그리하여 관할경내의 중국인들에 대하여 크게 경계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리하여 베트남에 거주하는 중국계상인은 지정된 지구에서 상업에 종사해야 했다. 마지막으로는 아예 정착하는 사람은 모두 입적하여 현지 베트남인의 호적관리체계에 편입되도록 했다.
베트남은 중화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아, 계속하여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조공체계를 건립하고자 했다. 베트남은 공식적인 층면에서 스스로 "중국"이라고 칭할 뿐아니라, 장기간 베트남인구의 80%를 점유한 경족은 고대에 스스로를 '한인(漢人)'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베트남은 주변의 소수민족을 오랑캐(蠻夷)라고 불렀다.
종합적으로 고대 베트남의 중국인집단이 형성된 것은 중국의 왕조교체, 베트남의 확장 및 개발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지역의 중국인이 베트남으로 흘러들어왔고, 그들은 어떤 사람은 점진적으로 베트남의 경족에 흡수되고, 절대다수는 계속하여 중국인의 언어와 민족특색을 유지했다.
2. 특수민족
1802년 응우엔씨의 후예 응우엔 푹 아인(阮福映)이 베트남을 통일한다. 그리고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응우엔왕조(阮朝)를 건립한다. 이때의 응우엔씨가족은 더 이상 구석진 곳에 피해서 살아가는 할거정권이 아니었따. 그러나 응우엔왕조는 일찌감치 응우엔씨정권의 정책을 이어받아 계속하여 중국계이민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노동력과 경제적이익을 얻는다.
명나라말기 베트남에 이주해온 남향인은 2세기동안 발전하여 비록 여전히 중국어, 습속등을 가지고 있지만, 사상적으로는 이미 중국과의 관계를 끊었고, 점차 베트남사회에 융합된다.
청나라때의 중국은 여전히 베트남과 긴밀한 경제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변발을 한 청나라유민을 베트남에서는 "청인(淸人)" 혹은 "북객(北客)"이라고 불렀다.
1802-1839년사이에, 중국인은 베트남의 광업을 독점한다. 예를 들어, 응우엔왕조시기의 몇개 주요한 광산인 태원송신은창, 선화은광, 가정변화철구철광, 월북금광, 승천명량동광, 홍기매광등을 모조리 중국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외에 베트남 남부의 비엔호아, 미도, 허티엔, 촐롱등 4대 주요무역중심지도 중국인상인들이 통제했다. 중국인은 베트남의 수공업, 표호, 조선, 양곡등 업종에서 굳건한 지위를 확립하고 있었다.
아편전쟁후, 외국상품이 계속하여 중국으로 밀려들면서, 민월(복건, 광동) 두 지방을 위주로한 파산농민이 대량으로 동남아로 옮겨가 일자리와 살 길을 찾는다. 그리하여 '하남양'의 풍조가 형성된다. 이는 명말청초이후 중국인의 베트남이민사에서 두번째 전성기가 된다.
이와 동시에, 1859년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략하여, 전후로 부유한 메콩강삼각주, 홍하쳥원을 장악한다. 1885년, 프랑스는 중국-프랑스전쟁에서 청나라를 격패시키고, 청나라조정은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한다. 이렇게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부유한 메콩강삼각주는 베트남의 경제핵심이다. 18세기 응우엔씨가 이 땅을 점령한 후, 중국인은 이 땅을 개척하는 선봉이 되었다. 프랑스인이 오고난 후, 중국인은 여전히 현지에서 강력한 경제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현지의 쌀판매, 조선, 어업, 운수 및 일용상품판매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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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전체 베트남의 경제에서 총투자액은 2.24억프랑이었는데, 그중 프랑스자본이 1.26억프랑으로 약 56%를 점하고, 중국계자본이 9,600만프랑으로 약 43%를 점했다.
프랑스인은 한편으로 중국인을 이용하여 경제적 이익을 취하고, 중국인을 이용하여 베트남남부등지를 계속하여 개발했다; 동시에 중국인의 경제적 영향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하여, 식민사업이 발전하면서, 프랑스인은 베트남중국인의 상업에 여러가지 제한을 설정하여 점차 화교는 경제적 우세를 잃게 된다.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대거 라틴문자로 베트남어의 '국어자'를 표기하도록 보급한다. 이를 통해 한자의 베트남에서의 영향을 배제하고자 하고,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문화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프랑스식민지시기, 중국인의 회사, 기업경영범위는 주로 상업분야에 집중되었다. 소수가 식품가공사업에 종사했다. 공업, 광업, 운수업등 업종은 점차 프랑스자본이 차지한다.
프랑스는 2차대전때 심각한 손실을 입는다. 2차대전후 베트남등 프랑스식민지에는 대규모 독립투쟁이 벌어진다. 군사적으로 진압하는 것이 실패한 후, 프랑스는 1954년 베트남을 떠난다.
프랑스군이 철수할 때, 베트남은 북위17도선을 경계로 둘로 나눈다. 두 나라의 총인구는 2,800만인데, 중국인이 약 3%를 점했고, 약 90만명이었다. 그중 비교적 인원이 집중된 메콩강삼각주지역에 약 35만이 살았고, 현지인구총수의 7%를 점했다.
1954년, 중국인의 베트남에서의 투자액은 8000만달러에 이른다. 이는 당시 베트남외국인투자총액의 21%에 달했다. 이를 보면, 프랑스의 1세기에 가까운 식민통치후, 중국인집단은 베트남에서 여전히 상당한 규모와 경제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3. 난민지파(難民之波)
베트남이 분열된 후, 남베트남은 서방진영에 가담한다. 남베트남의 고딘디엠(吳庭艶) 정권은 베트남화정책을 추진한다. 목적은 민족국가건립을 강화하는 것이다. 동시에 중국인의 전통적인 특권을 박탈한다. 베트남의 다른 소수민족은 같은 대우를 받지 않았다. 한편으로, 남베트남경내에서 중국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소수민족의 인구는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정치와 경제적 영향력에서 다른 소수민족은 베트남중국인과 비교할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남베트남의 동화정책으로 중국인들의 원성이 자자해진다. 수백년간, 중국인은 베트남에서 독특한 정치적 지위를 가졌었다. 심지어 경족을 무시하기까지 했다. 지금 중국인은 강제로 군대에 끌려가서 복역해야 하고, 베트남어로 말해야 한다. 이는 독립민족의식을 가진 중국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수만명의 중국인이 다시 2차이민을 떠난다. 주로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로 갔다. 같은 시기 북베트남은 신중국과 동일한 사회제도였고, 중국의 원조를 대량으로 받고 있어서, 중국인에 대한 정책이 비교적 느슨했다. 북베트남은 중국인의 입적을 강제하지도 않았고, 그저 "화인이 베트남을 사랑하는 것은 중국을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베트남과 중국간에 선택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제창했을 뿐이다.
1975년, 남베트남정권이 북베트남 및 그가 지휘하는 유격대에 멸망당한다. 전쟁의 영향으로 많은 남베트남의 민중들이 고향을 떠난다. 소수의 미국군함을 타고 철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절대다수는 단지 누추한 배를 타고 남베트남을 떠나야 했다. 이것이 바로 보트피플이다.
1975년에서 1995년 사이에, 베트남을 떠나 안전하게 다른 나라에 도착한 보트피플의 수량은 근 80만에 달했다. 보트피플중 대다수는 경족이지만, 상당한 부분의 베트남화인도 있었다. 그들은 동남아시아 다른 나라, 중국홍콩등을 목적지로 했다. 더욱 멀리 가는 경우는 미국, 호주로 갔다.
통일후의 베트남은 인도차이나반도의 정치적 국면을 바꾸었을 뿐아니라, 베트남 경내의 화인도 새로운 시험에 처하게 된다. 베트남 남방에서 생활하던 중국인은 원래 현지의 방직업, 철강업등 중요공업분야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이 통일된 후, 많은 중국계기업은 베트남정부에 의해 국유화된다.
1976년, 베트남의 중국인총수는 120만을 돌파했다. 역차상 최고봉을 이룬다. 중국인은 당시 베트남총인구의 2.6%였다. 그리고 베트남의 제2대민족이었다. 베트남은 인도차이나의 패자가 되기를 꿈꾸면서 지리적으로 인접한 중국을 지연정치의 경쟁상대방으로 보게 된다.
중국과 사이가 나쁜 소련이 베트남과 갈수록 가까워졌다. 소련의 지지하에,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략했을 뿐아니라, 중국베트남국경에서도 계속하여 사건을 벌이고 영토를 잠식했다.
중국베트남 양국관계는 날이갈수록 파열되었고, 베트남의 중국인의 모호하고 이중적인 인식은 더 이상 베트남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76년부터, 베트남은 중국계에 베트남국적을 취득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베트남북구에 거주하는 중국인 특히 중국베트남국경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베트남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베트남 남방으로 이주시킨다.
1976년 하반기, 베트남정부는 정책을 조정하여, "변경지구숙청"을 명목으로 계획적으로 베트남의 중국인을 축출하기 시작한다. 1976년말까지, 4만명이 넘는 중국인이 중국경내로 추방된다.
양국관계가 악화되면서, 베트남은 더더욱 아무런 통지도 없이, 일방적으로 베트남의 중국인을 추방해버린다. 1977년이 되어, 베트남의 추방강도는 계속 강화된다. 수십만의 원래 베트남에서 잘 살고 있던 중국인이 순식간에 돌아갈 곳이 없는 난민이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베트남난민위기를 조성한다.
베트남의 추방으로 소수의 난민은 홍콩으로 간다. 그러나 대부분의 난민은 육로로 가서 북으로 중국내지에 들어간다. 1978년 4월에서 1979년 6월까지, 운남하구, 광서동흥 및 우의관을 통하여 중국으로 들어온 월남난민은 26만명이 넘는다.
이들 중에서 중국혈통을 지닌 사람이 222,713명이고, 중국국적을 보유한 화교가 6,989명이며, 베트남경족은 겨우 20,322명이었다.
계속해서 몰려오는 난민에 대해 중국에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했고, 가까운 성에 난민을 초보적으로 안치한다.
1979년 2월, 베트남의 도발행위로, 베트남과의 전쟁이 벌어진다.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극한으로 나빠진다. 베트남의 중국인은 "간첩"이라는 죄목을 씌워 베트남인에 의해 살던 곳에서 쫓겨난다.
베트남 경내에, 특히 북부와 차이나타운지역, 중국인이 비교적 집중된 지역은 중국인들이 추방당해서 아주 황량해진다. 예를 들어, 베트남북부의 꽝닌성 고또현(廣寧省姑蘇縣)은 1978년 인구가 약 7천명이었다. 현의 9할이 중국계였으므로, 이들이 추방된 후 이 현에는 600여명만 남는다.
1980년에 이르러, 총합계 29만의 베트남화인이 중국으로 들어온다. 상대적으로 베트남은 무상으로 화인들의 근 4억달러에 이르는 재산을 몰수한다. 난민은 중국에 들어온 후 중국인이라는 민족신분과 문화동질감외에 실질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었다.
1978년 5월부터, 중국은 광동, 광서, 운남, 복건 네 곳에 귀국화교를 접대안치하는 위원회와 영도소조를 설립한다.
1979년 8월 4일, 중국에는 "국무원접대안치인지난민영도소조"가 구성된다. 같은 해 11월, 중국과 유엔난민기구는 중국의 인지난민을 원조하는 프로젝트합의를 체결한다. 유엔난민기구는 1979년10월부터 중국에 대표처를 설립한다.
국제관례에 따라, 난민은 일반적으로 난민수용소를 설치하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그리고 시기가 성숙되면 그들을 원래 국적국가로 돌려보낸다. 중국정부는 난민수용소를 설치하지 않았고, 사회에 융합하도록 안치한다. 일부는 6개 성의 농림장과 농촌생활노동에 안치한다. 일부는 기관, 학교, 병원, 상업부문에서 일하도록 한다. 이는 난민을 현지주민과 경제, 생활적으로 하나로 융합하게 만들었다.
1978년 난민안치공작에 제1차로 6000만위안을 교부한다. 농장에서 난민 1명을 안치할 때마다 상응한 안치비 2,020원을 받았다. 당시 중국인의 월급여는 겨우 30-40원인 시절이다. 이 비용은 거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80년-1994년까지, 중국은 전후로 유엔난민기구등 부서에서 9천만달러의 원조를 받고, 난민집단의 생활보장수준을 계속하여 끌어올렸다.
1989년에 이르러, 베트남화인의 규모는 1976년의 120만에서 96만으로 줄어든다. 베트남의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6%에서 1.5%로 줄어든다. 여전히 상당한 규모를 유지하는 이유는 축출된 중국인이 주로 베트남북부에서 나왔는데, 원래 베트남북부의 중국인수량은 베트남남부보다 적었다. 베트남 남방의 화교는 베트남통일전에 대부분 베트남국적을 취득했기 떄문에 인구변화가 크지 않았다.
1990년이후, 중국-베트남관계가 완화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입함으로 인해 국내경제가 곤경에 빠진다. 그리하여 중국인이 감소하는 추세는 멈추지 않았따. 1999년 베트남의 중국인규모는 86만으로 줄어들고,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1%가 된다.
베트남난민중 99%는 중국인이다. 이들은 복건, 광동, 운남, 강서, 광서, 해남 6개 성의 169개 안치장소에 분포되어 있다. 인구분포로 보면, 광서(12만), 광동(10만), 운남(4만)을 위주로 한다. 분포가 가장 적은 강서성은 난민수가 4천명에도 미치지 못한다.
난민이 집중된 지역에 대해 중국은 신도시건설을 통해 난민이 중국에 융합하도록 도왔다. 저명한 것은 광서 북해시 교항진(僑港鎭)등이다. 2007년, 중국정부는 입법을 시작하여, 경내에 사는 인도차이나난민에게 완전한 중국공민신분을 부여한다. 지금은 95%이상의 난민가정에 경제자족을 실현했다.
2020년까지, 베트남경내의 중국인규모는 75만가량으로 축소되고, 베트남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78%로 줄어들었다. 전성기의 베트남 제2대민족에서 제9대민족으로 하락한다.
현재의 베트남중국인은 메콩강삼각주에 집중되어 있다. 1986년 베트남의 도이모이정책이후, 새로운 발전기회를 맞이했다.
베트남 최대도시인 호치민시를 예로 들면, 지금 중국인은 현지인구에서 약 6%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시의 30%의 경제생산능력을 차지한다. 이는 중국인이 베트남을 도와 메콩강삼각주를 개발한 역사에서 이어진 것이다.
지금의 중국인은 베트남인구의 54개 구성민족중 하나이다. 화인(華人)외에도 베트남의 애족(艾族, 약 2천명), 산유족(山由族, 약 14만명)도 중국에서 이주해온 객가인(客家人), 여족(黎族)등의 베트남현지민족과의 혼혈후예이다. 다만 이미 화인 인구로 계산되지 않는다.
그외에 명향인등 초기에 베트남으로 이주한 중국인은 이미 점차 경족에 융합되어 들어갔다.
지금의 베트남중국인은 대부분 민족인식과 중국문화습속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중국어수준은 심각하게 도퇴되었다. 대다수는 중국어를 유려하게 말하지 못한다. 비록 중국-베트남 양국은 남해등문제에서 여전히 갈등이 있지만, 베트남화인집단이 계속하여 베트남에 융합되어 들어가고 있는 것은 그다지 크게 영향받지 않고 있다.
베트남중국인의 형성사를 되돌아보면, 한,당시기에 초보적으로 형성되고, 17세기와 19세기에 걸쳐 두 차례의 이민붐이 있었다. 베트남중국인집단규모는 계속 확대되었고, 베트남의 영토남진과 더불어, 베트남경제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발휘했다.
20세기이후, 베트남화인의 운명은 프랑스식민통치, 월남분열국면중에 기구했다. 베트남이 통일된 후, 베트남에서 수세기를 살아온 중국인은 베트남의 지역패권추구의 희생양이 되어 대대로 살아온 고향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지금이 베트남화인은 기본적으로 베트남 남부에 집중되어 있다. 비록 족군규모는계속하여 축소되지만, 역사적 경험을 쌓아서 여전히 베트남사회발전에서 중요한 작용을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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