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역사가정제(嘉靖帝) 주후총(朱厚㷓): 치신천재(治臣天才), 치국용재(治國庸才)

중은우시 2024. 10. 22. 22:32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정덕15년(1520년) 구월, 남하하여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를 붙잡은 명무종(明武宗) 주후조(朱厚照)가 병이 든다.

반란을 평정하고 귀환하는 도중 명무종은 혼자서 청강포(淸江浦)에서 배를 몰아 물고기를 잡았다. 그러던 중 부주의하여 물에 빠진다. 어려서부터 북경 자금성에서 생활했던 황제가 수영을 배웠을 리 없다. 물에 빠진 그는 병석에 눕는다.

이치대로라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놀기 좋아하는 황제는 이런 저런 사고를 모두 겪었고, 물에 한번 빠져보아야 한 이틀 정도 기침을 하고, 태의들이 지어준 영단묘약을 먹고, 침대에 이틀 정도 누워 있으면 대체로 회복되곤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부대가 북경으로 귀환한 후에도 명무종의 병은 여전히 좋아지지 않았다. 다음 해 정월에 남교(南郊)제사를 주재하던 중 대신들 앞에서 피를 토한다. 그리고 곁에 있던 태감에게 "짐은 병으로 안되겠다."고 말하고 태감에게 군신과 자신의 모후에게 뜻을 전하게 하고는 이어서 사망한다.

짧은 몇달만에 물에 빠진 것때문에 젊은 황제가 목숨을 잃었다. 명무종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다음 번 황제를 누가 맡느냐"가 한때 명무종 조정중신 및 태후가 고민해야하는 일이 된다.

이치대로라면 사람을 찾아서 황위를 잇게 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일찌기 명나라가 성립된 초기에 명태조 주원장은 <황명조훈(皇明祖訓)>을 반포했고, 황위계승은 "부사자계(父死子繼), 형종제급(兄終弟及)"(아버지가 죽으며 들이 이어받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이어받는다)의 원칙을 따르도록 했다. 비록 명무종 주후조는 생전에 명효종(明孝宗)의 유일한 아들이었지만, 명효종의 부친인 명헌종(明憲宗)은 비록 만귀비(萬貴妃)를 총애하였지만 자식은 많이 두었다. 명효종외에 명헌종은 최소 10명의 황자를 두었다. 명효종보다 약간 어린 사람은 명헌종의 넷째아들 흥헌왕(興獻王) 주우원(朱祐杬)이었다.

그러나 이때, 흥헌왕 주우원은 이미 사망했고, 왕위는 차남 주후총(朱厚㷓)에게 넘어갔다. 이렇게 하여 주후총은 유일하게 조훈이 인정한 대명의 황위계승자가 된다.

1

경성에서는 황위계승자에 관한 논의가 분분했는데, 당시 호광(湖廣) 안륙주(安陸州, 지금의 호북성 종상시)에 있던 흥헌왕 주후총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명무종이 사망하기 5일전에 비로소 그는 막 경성에서 온 성지를 받는다. 그에게 미리 상복을 벗고 2년전에 사망한 부친의 뒤를 이어 안륙주에서 새로운 흥헌왕이 되도록 윤허받은 것이다.

대명의 조훈대로라면, 흥헌왕같은 세습번왕은 평생 할 수 있는 일이며, 해야하는 일은 그저 잘 먹고 자식을 많이 낳고, 종실내의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다. 사건만 만들지 않으면 평생 잘먹고 잘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굳이 이 나이 겨우 15살짜리 아이로 하여금 왕야에 오른지 5일만에 다시 승진하여, 대명왕조의 "구오지존(九五之尊, 황제를 가리킴)"에 오르게 했다.

그러나, 겨우 5일동안 번왕을 지낸 경력밖에 없는 주후총이지만, 그는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다. 2년전 부친이 사망한 후, 그는 이미 왕부에서 흥헌왕 세자의 신분으로 실습을 한동안 해왔다. 명나라조정에서 사자가 파견되어 주후총을 북경으로 모셔가 황제에 오르게 하겠다는 말을 들은 후, 그는 금방 새로운 역할에 적응했다.

명무종의 생모 자수황태후(慈壽皇太后)와 내각수보(內閣首輔) 양정화(楊廷和)는 미리 정해놓은 계획에 따라 주후총이 북경성에 들어온 후, 먼저 동화문(東華門)으로 입궁하여 문화전(文華殿)에 거주하면서, 길일을 택하여 문무백관의 진언에 따라, 황태자의 신분으로 등극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주후총은 황태후의 친아들이 아니지만, 명목상으로는 그도 사실상 흥헌왕의 일맥에서 명효종의 양자로 들어온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설사 황제가 바뀌지만, 자수황태후는 여전히 황제의 모친이고, 여전히 원래의 대우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아직 북경에 도착하지 않은 주후총은 그의 총명한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조정의 안배에 대하여, 그는 모두 부정해버린다. 먼저 한번도 얼굴을 보지 않은 대명의 신하들에게 "하마위(下馬威)"를 보인 것이다. 이어서 당초 양정화가 직접 초안한 조서의 문구를 가지고 따지기 시작한다. "유조(遺詔)에 따르면, 나는 황제위를 잇도록 되어 있지(嗣皇帝位), 황자(皇子)가 되라고 되어 있지 않다." 너희 조정에서 상의한 결과는 본왕으로 하여금 북경으로 들어와 황제가 되라는 것인데, 어찌 지금 다시 황태자가 되라는 것이냐. 어찌 한번 한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이냐.

주후총은 양정화의 등극방식을 무시했지만, 4명의 황제를 모시면서, 명무종의 유명을 받들어 조정업무를 처리해온 양정화도 담량이 보통은 아니었다. 그는 주후총이 용상에 앉지 않는 한 겨우 번왕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후 황제에 오르더라도 겨우 10여세의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조정내에서 혈혈단신이니 그와 같이 조정에서 수십년간 구르고 복잡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노련한 인물에 대항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리하여, 양정화는 예부에서 정한 의식대로 집행할 것을 요구한다.

주후총은 그런 모습을 보고 가마를 멈추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이처럼 서로 얼굴도 보기 전에 힘겨루기부터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주후총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대명의 천자이다. 만일 양정화가 반드시 자신과 맞서 싸우려고 한다면, 결국 손해보는 것은 그 자신이 될 것이다.

나라에 하루라도 임금이 없을 수는 없다. 이런 이치는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주후총으로서는 잘못되더라도 다시 돌아가서 왕야로 지내면 된다. 그러나 우국우민의 대신들이 적합한 황제를 고르지 못한다면 그 죄는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동안 대치하다가, 자수황태후의 의지(懿旨)로 대치상태는 해소된다. 그녀는 쌍방이 논쟁을 멈추고, 미래의 황제로 하여금 먼저 북경으로 들어오게 한 후에 다시 논의하자고 한다.

2

정덕16년(1521년) 사월 이십일일, 주후총은 여러 신하들의 진언에 따라 자금성의 정문 대명문(大明門)으로 황성에 진입한다. 그리고 봉천전(奉天殿, 즉, 지금의 太和殿)에서 등극하니, 역사에서 가정황제로 불린다.

이 예절규정은 완전히 황태자가 등극할 때의 과정에 따른 것이다.그리하여 양정화등은 비록 여전히 불만이 있었지만,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가정제가 등극한 후, 이 "형종제급, 부사자계"의 이슈를 둘러싼 논쟁은 전혀 끝나지 않았다. 반대로 갈수록 논쟁은 커져간다. 그리하여 온 조정이 논쟁에 휩싸이는 "대예의(大禮儀)"사건으로 번진다.

소위 "대예의"라는 것은 가정제가 등극한 후 각종 예의제도에 대한 대토론이다. 이는 황제의 연호등 기본적인 예의규정외에, 도대체 누가 가정황제의 친생부모이냐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골치아픈 문제였다.

황위에 등극한 가정제는 시종 자신이 흥번왕을 자신의 부친이고, 흥헌왕비가 자신의 모친이라고 생각하며,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라고 여긴다. 다만 가정제가 즉위하기 전에, 조정에서는 당시에 여전히 왕야이던 주후총으로 하여금 동화문으로 입궁하도록 요구한 것은, 황태자의 신분으로 등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보 양정화를 위시한 대신들은 시종 황제가 되려면 반드시 "대종불가절(大宗不可絶)"의 관념이 지켜져야 한다고 보았다. 즉, 원래 명나라의 황위가 전승된 대로 계속하여 전승되는 것이다. 명효종이 명무종에게 전승하고, 명무종은 아들이 없어서 가정제에게 전승했다. 그렇다면 가정제는 명효종의 의발을 이은 것이고, 황제의 신분을 가진 명나라의 대종(大宗)은 끊어지지 않은 것이 된다.

양정화가 이렇게 한 것은 아마도 문관집단의 이익을 고려한 것일 것이다. 어쨌든, 명효종시기에 문관들의 지위는 대폭 제고되고, 명효종은 그들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었다. 군신이 화목하게 서로 지냈다. 명효종이 사망한 후, 문관들은 속속 표시했다. 이 황제는 그들이 유일하게 만난 대명의 "성군"이라고. 그리고 명효종의 계승자인 명무종은 그의 부친처럼 문관들을 신임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수시로 문관들과 맞섰다. 각종 예법에 도전하는 방식을 써서, 문신들을 골치아프게 했다.

다만 양정화가 고집하는 것은 확실히 기본적인 인정에 어긋나는 점이 있다. 정상인이라면, 어제까지는 이 집의 아들이었는데, 오늘 돌연 그렇게 하면 부적절하다. 이제부터 너는 큰아버지집의 아들이다. 너는 너의 생부를 숙부라고 불러야 하고, 너의 모친을 숙모라고 불러야만 한다. 이렇게 되면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렇게 강압적으로 부모를 바꾸라는 요구를 가정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쨌든 송영종(宋英宗)등은 어려서부터 궁안에서 길러졌지만, 가정제는 15년의 인생을 모두 지방에서 왕야로 지내지 않았는가.

양정화를 우두머리로 하는 대신들은 그런 점은 일체 고려해주지 않았다. 양정화의 지지하에 예부상서 모등(毛登)등 60여명의 문무대신들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황제에게 명효종을 부친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의가 있는 자는 간사한 자이니 마땅히 참해야 한다"고까지 썼다. 일시에 막 등극한 가정제는 엄청난 압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정말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양정화가 기초한 명무종의 유조는 가정에게 한 줄기 희망을 주었다.

그 유조는 비록 명무종의 구술이 아니지만, 어쨌든 서면으로 명확히 적혀 있었다: "준봉조훈형종제급지문고어종묘(遵奉祖訓兄終弟及之文告於宗廟)"(조훈의 형종제급의 조문을 받들어 종묘에 고한다). 이건 엄숙한 이슈이다. 유조에는 분명 조훈을 받들었다고 했고, 그것은 바로 주원장이 친필로 쓴 <황명조훈>이다. 그 안에는 확실히 '형종제급'이 언급되어 있다. 그외에, 이 일은 유조내에도 일찌감치 '종묘에 고했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건 확정된 일이라는 것이다. 문무백관이 알고 있을 뿐아니라, 종묘에 위패를 세워둔 대명의 선황들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제도와 법률체계의 각도에서 보자면, 명무종의 이 유조는 황제본인의 의사이든 아니든간에 더 이상 바뀔 수 없는 법률적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금방 관직에 나서고, 예부에서 실습중이던 장총(張璁)이 감히 내각수도 양정화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명효종의 후사를 잇는다고 명확히 적어놓지 않았다. 그러므로 미리 후사로 세워져서 궁안에서 자란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그 말에 숨은 뜻은 내각수보 양정화가 유조를 초안할 때, 부주의하였다는 것이다. 이제와서 되돌리려면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확실히, 여기에는 수보 양정화가 부주의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한 마음으로 명효종의 아들을 찾아서 황위를 잇게 하려는 것만 생각하였다는 점과 또한 양정화는 마음 속으로 이미 사망한 명무종은 멸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총의 상소를 보고 가정제는 크게 기뻐한다. "이 글이 나왔으니, 이제 우리 부자는 온전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미 은퇴한 전임대학사 양일청(楊一淸)도 이렇게 말한다: 장총의 말은 설사 성인이 다시 세상에 나타나더라도 헛점을 찾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3년간의 토론을 거친 "대예의"문제는 가정제의 뜻대로 집행된다. 흥헌왕을 "본생황고공목헌황제(本生皇考恭穆獻皇帝)"가 되고, 명호종은 "황백고(皇伯考)"가 된다. 자수황태후는 소성황태후(昭聖皇太后)로 개칭되며 "황백모(皇伯母)"가 된다. 흥헌왕비는 "장성황태후(章聖皇太后)"가 되어 "성모(聖母)"가 된다.

양정화를 계속하여 지지했던 관리들은 귀양가거나 하옥되었고, 심지어 16명은 황제의 분노를 사서 정장(廷杖)을 맞고 목숨을 잃는다.

양정화에 대하여, 가정제는 그래도 체면을 봐주어서 스스로 물러나게 했다.

이때부터 양정화는 죽을 때까지 조정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대신들과 "싸우는 방법"을 통하여 가정제는 점차 아무런 세력이 없던 제국의 조정에서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리고 진정한 대명의 주인이 된다.

3

가정제는 처음부터 도교를 숭상하고, 장생불로를 추구한 '혼군(昏君)'이 아니었다.

번왕의 신분으로 대통을 이은 그는 처음에 황제에 올랐을 때는 함부로 하지 못했다. 황권교체로 인한 조정의 혼란외에 각지에서 수재와 가뭄이 빈발했다. 만일 조금만 잘못 처리하면, 대명왕조는 끝장날 위기였다.

위기가 사방에 산재하는 국면하에서, 가정제가 당시의 내각수보 양정화에게 지시하여 작성한 조서는 명나라의 다른 황제들의 것과는 크게 달랐다. 태평성세하에서 일반적인 수성지군(守成之君)의 즉위조서는 대체로 형식적이었다. 그러나 가정제의 즉위조서는 7천여자에 이른다. 대명제국의 여러 분야를 모조리 포괄하고 있다. 그 본인의 뜻에 따라 한 마디로 종합하면, "흥도치치(興道致治)하고자 하면 반드시 혁고정신(革故鼎新)해야 한다"

짐은 등극한 후 혁제폐정(革除弊政)하여 중흥대명(中興大明)하겠다.

사실상, 진정 대권을 장악한 이후 한동안 가정제는 고도로 정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명무종 재위기간동안 마음대로 놀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즉위전반, 거의 매일 4경이면 일어나서 업무를 보았고, 날이 밝기도 전에 신하들을 불러서 조조(早朝)를 행했다. 어떤 때는 너무 일찍 업무를 시작하여, 대전내의 광선이 너무 어두워, 촛불을 켜고 용상에 올랐다.

그는 명효종시기의 "오조(午朝)"제도도 부활시킨다.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대신들과의 거리를 좁히면서 두번 더 보고를 듣고 국가대사를 이해했다.

언관들이 충분히 그리고 과감하게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가정제는 대외적으로 이렇게 선포한다: "급사중, 어사의 직책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후 조정의 정무득실, 천하군민의 이폐에 대하여 직언하고 감추지 말도록 하라."

이런 상황하에서, "황제의 즉위초기, 언로가 크게 열리고, 진언한 자들이 직설적이고 지나쳐도 황제는 모두 용납했다." 한때 대신들은 가정제가 제2의 명효종이 될 것이라고까지 여긴다.

문관들에 있어서, 가정제가 어떤 분야에서는 아직 좀 부족하지만, 전체적으로 이전의 명무종보다는 훨씬 낫다고 여겼다.

다만, 이 나이젊은 가정제에게는 그저 번왕의 역할에서 제왕의 역할로 변신하는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었을 뿐이다.

그가 등극하기 전에, 명나라에는 번왕에서 대통을 이은 사람이 오직 경태제(景泰帝) 주기옥(朱祁鈺)밖에 없었다. 주기옥이 등극할 때, 그에게는 형 명영종(明英宗) 주기진(朱祁鎭)이 몽골인에게 포로로 잡혀 있었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주기옥의 등극과 가정제의 등극은 모두 위기상황에서 황제에 오른 것이다.

비록 가정제의 황위는 다른 사람이 와서 빼앗아가지 않겠지만, 그대로 전황제를 위해 일했던 신하들과 잘 알지도 못하고 은원도 없다. 이건 그에게는 큰 "약점"이다. 그리하여 조회를 2번 더 열고, 널리 언로를 연 것은 그렇게 한다고 하여 구신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할지 몰라도, 어느 정도 자신의 인산을 좋게 하는 층면은 있었다.

4

이런 기초 위에서, 가정제는 문관과 환관간의 당쟁국면의 균형을 맞추기 시작한다. 조정의 문무대신 특히 내각중신들은 극력 지지한다.

황제가 재상제도를 폐지한 후, 여전히 방대한 국가를 잘 관리하기 위해서, 내각은 점차 명나라의 역대황제들이 국가를 관리하는 '도구'가 된다. 다만 내각의 출현은 황제의 나태를 극한으로 발휘하게 한다. 그리하여, 황제에게 말을 전하는 태감의 권력이 갈수록 커졌다. 태감은 황제의 말을 입으로 전할 수 있고, 내각에 명령하는 권한을 갖게 되면서 태감과 문신의 당쟁갈등이 나타나게 된다.

당시, 명나라의 환관은 지방에 부임할 수 있었다. 이를 "진수태감(鎭守太監)"이라 부른다. 진수태감의 직권은 원래 군사권한을 가진 관리를 감독하여, 관리의 병권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영종때부터, 진수태감은 점차 지방사무에 개입하기 시작하고, 사회치안을 교란시키며 해악이 커졌다. 특히 명무종이 재위하는 동안, 대환관 유근(劉瑾)을 이용하여 조정대신에 대항했다. 그리하여 이런 기풍이 지방에까지 번졌고, 진수태감들은 하나같이 현지의 '토황제'처럼 되어버린다.

가정제가 세자로 있을 때, 이런 상황을 아주 잘 알았다. 그가 즉위후에 이를 바로 처리하지 않은 것은 그의 기반이 튼튼하지 못해서였다. 황위가 안정되자, 지방의 '좀'같은 존재들은 즉시 가정제가 먼저 처리해야할 대상이 된다.

가정제의 마음을 잘 읽은 장총은 일상적인 업무보고자리에서 황제에게 건의한다. 각지의 진수태감을 없애자고. 그리고 가정제의 또 다른 심복인 두악(杜萼)도 명확히 지적한다. 진수태감제도는 명태조건국초기부터 설립된 조제(祖制)가 아니니 폐지시킬 수 있다고.

그리하여,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는 가정제는 과감하게 가정8년(1529년), 진수태감을 지방에 보내는 규정을 폐지해버린다.

조정내에서 환관의 권한이 지나치게 커지는 문제에 대하여 가정제는 극히 엄격한 처리방법을 채택한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가정제는 즉위후 전황제가 남긴 궁중태감들을 엄중히 단속하고, 만일 죄를 범하면 때려죽였다고 한다. 살일경백(殺一儆百)의 효과를 달성하기 위하여 가정제는 수시로 죄를 지은 환관을 때려죽인 후, 성벽에 걸어 백성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렇게 되니, 전황제때 위풍당당했던 태감들이 가정제만 보면 꼬리를 말게 되었다.

다만 가정제는 그렇다고 "절정(絶情, 인정이 없는)"의 인물은 아니었다. 흥헌왕세자시대때부터 그의 기거를 돌봐준 태감들 예를 들어 황금(黃錦)등에 대하여는 심복으로 보고 중임을 맡겼다. 이들은 나중에 가정20여년간 조회에 참석하지 않고 말을 전하는 사람들이 된다.

5

가정제의 재위전기의 통치를 거쳐, 명나라는 면목을 일신한다. 민간의 수공업과 상품경제가 번영하고, 소설, 화본과 이에 따른 종이생산, 인쇄산업등 문화교육시장도 크게 발전한다.

그러나 뼛속부터 가정제는 도교에 대한 숭배와 장생불로에 대한 추구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그는 철저히 권력을 장악하고 일정한 업적을 낸 후부터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유가, 도가, 불교의 3교중에서 가정제는 오직 도교를 숭상한다. 이는 그가 어렸을 때의 생활경력과도 관련이 있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도교는 형초(荊楚)일대에서 나타났다. 장강중하류지구에 많은 신도를 가지고 있었다. 가정이 어려서부터 생활한 안륙주는 호광에 예속되어 있고, 바로 이 범위내에 속한다.

<종상현지>에 따르면, 정덕연간, "순일도인(純一道人)이 현묘관에 거주하면서, 도행이 아주 높았다. 흥왕과 같이 어울린 바 있다. 하루는 선잠을 자고 있다가, 순일이 궁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좌우에 물었다: '순일이 왔는가?' 그때 궁안에서 세자가 태어났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누군가 견강부회한 것일 것이다. 가정제의 출생은 신격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흥헌왕이 살아있을 때, 일상생활에서 도사들과 어울리며 장생불로를 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주후총은 전리밖의 호광 안륙주에서 혼자 몸으로 북경으로 와서 황제에 오른다. 비록 지존의 자리에 올랐지만, 막 등극했을 때는 조정대신의 위협이 있었고, 혈연관계에 대한 논쟁이 있었으며, 제국의 가뭄,수재등 난감한 문제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부득이 그는 여리박빙해야 했고, 이런 상황하에서, 고독하고, 고향을 그리워하고,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살았다. 그리하여 다시 도교문화에 빠져들어 정서적으로 의탁하려 한 것이다.

당연히 도교에는 장생불로의 비술이 있다. 설사 영명한 진시황, 한무제도 마찬가지로 추구했었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 가정제가 도교를 좋아한 것은 그런 고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막 황제에 올랐을 때, 가정제는 자주 궁안에 재단(齎壇)을 설치하여, 매일 향을 사르고 기도를 했다. 명무종이 불교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가정제가 법사를 하게 되면 항상 대신들이 말리면서, 황제에게 나쁜 것은 배우지 말라고 권했다.

가정제가 대명의 황제 자리에 완전히 자리잡은 후, 그는 거의 자신이 생각해낼 수 있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도교에 의존한다. 그는 조서를 내려 널리 지방에서 도행이 깊은 도사들로 하여금 입궁하여 강의를 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기우유공(祈雨有功)"의 강서 도사 소원절(卲元節), 도중문(陶仲文)등이다. 그후, 그는 대신들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가 하늘에 축도하는 청사(靑詞)를 많이 짓도록 독려한다. 누구든지 좋은 청사를 써오면 그의 관직을 올려주었다.

자료에 따르면, 가정제가 재위하는 기간동안, 14명의 내각수보중 9명은 모두 청사를 잘 써서 그 자리에 올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를 차지했다. 거기에는 대간신 엄숭(嚴嵩)도 있고, 명신 하언(夏言), 서계(徐階), 고공(高拱)등이 있다.

자신의 신분을 더욱 도교의 요구에 부합하도록 하기 위하여, 가정제는 스스로 '도장(道長)'의 모습을 하고 스스로에게 도호 "태상대라천선자극장생성지소령통원증응옥허총관오뢰대진인현도경만수제군"를 내리기도 했다.

더욱 기이한 점은 가정제는 장생불로를 위하여, 당시 궁에 들어와 강의한 도장 남도행(藍道行)의 말을 믿었다. 남도행은 장수하려면 "정섭(靜攝)"의 방식으로 양생해야한다고 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한편으로 일출을 감상하면서, 한편으로 궁녀들이 전날 밤에 황제를 위해 채집한 조로(朝露)를 마셔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조로에는 일월의 정화를 흡취했기때문에, 장생불로, 연년익수의 기능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정제는 아침 일찍 일어나 노수(露水)를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궁녀들은 이것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를 보면 궁녀들이 얼마나 가정제에 원한을 가졌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주 부족하다. 도사 도중문의 헌책으로, 가정제는 연단을 시작한다. 지순지양(至純至陽)의 대보단(大補丹)을 만들기 위하여 가정제는 3차례나 조서를 내려, 청춘기의 소녀들을 입궁시키게 한다. 그건 다른 것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생리기간의 경혈을 채취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가정21년(1542년), 중국역사상 유례없는 궁녀반란이 가정제의 침궁내에서 발발한다.

그날, 며칠동안 황제때문에 고생한 궁녀 두명이 주변에서 가까운 십여명의 궁녀들을 모아서 황제가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용상으로 올라가, 사전에 준비한 황릉포(黃綾布)로 밧줄을 만들어 가정제의 목에 걸고 졸라죽이려고 시도한다.

아마도 사전에 미리 연습을 하지 않아서인지, 방법이 능숙하지 않아서, 조작과정에서 밧줄에 매듭이 지어진다. 아무리 당겨도 졸려지지가 않았다. 가정제는 고생은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일이 잘못된 것을 알자 한 궁녀가 달려가서 황후에게 알리고, 가정제는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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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되살아난 가정제는 이로 인해서 경각심을 갖지는 않았다.

여러 해동안의 "수련"을 거쳐, 가정제는 거의 도교와 하나가 되고 분리될 수 없게 된 것같았다.

자금성을 벗어나기 위해, 그는 아예 그의 당형 명무종처럼 "정섭"을 이유로 삼아 서원(西苑, 즉 지금의 중남해)로 가서 거주한다.

집정전기 전전긍긍하며 대명의 중흥을 이끌어낸 황제인데, 조정의 대신들이 어찌 그가 타락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겠는가. 그리하여, 가정재가 재위전반기에 내린 성지에 따라, 감찰어사 양작(楊爵)등이 "좌도혹중(左道惑衆), 성왕칠주(聖王必誅)"를 이유로 내걸어 가정제로 하여금 다시 근정하도록 시도한다.

그러나, 황제가 숭상하는 도교를 좌도방문으로 얘기하는데, 그걸 가정제가 어찌 용납하겠는가. 양작은 하옥되어 구타당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웃기는 점이라면, 가정21년, 도교의 신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대고현전에 나중에 화재가 발생하는데, 가정제는 돌연 불길 속에서 신선이 양작은 충신이라고 하는 말을 듣는다. 그 자리에서 그는 놀라서 즉시 양작등을 석방한다. 가정제가 이렇게 많은 일을 저지른 것은 결국 사람들에게 그와 같이 도교를 숭상하고, 황제에 복종하고, 당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학사상에 깊이 빠진 대신들이 어찌 황제의 그런 뜻을 받들 수 있겠는가.

이렇게 되니, 원래 대신들과 관계가 괜찮은 편이었던 가정제는 아예 조회에 나가지 않고, 대신들과 만나지 않게 된다.

다만 대신들을 피했다고 하여 가정제가 대신들을 완전히 만나지 않았다거나 조정을 완전히 내팽개친 것은 아니다. 가정제는 비록 서원에 거주했지만, 대신들은 여전히 매일 서면으로 황제에게 보고했고, 그는 대신들에게 회신을 내렸다.

일상사무적인 상소외에 조정에서 가정제는 특별히 16명의 대신을 뽑아 그와 조정간의 연결고리로 삼았다. 이들은 언제든지 대신들의 의견을 모아서, 황제에게 보고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황제가 제국의 상하를 이해하는 "눈"으로서 금의위의 지회사도 가정제의 '소꼽친구'인 육병(陸炳)이 맡는다.

이렇게 안으로는 느슨하고, 밖으로는 조인 상태하에서, 가정제가 매일 궁안에서 연단에 골몰하더라도 조정대신들의 일거일동은 여전히 그의 눈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반생을 소모하여 연단을 해온 가정제도 결국 정상인처럼 생로불사의 규율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정 45년 12월(1567년 1월) 평생 도교를 믿고, 반평생 "정섭"해온 주후총은 서원에서 사망한다.

마지막 유언에서 가정제는 당형 명무종 정덕제와 같이 스스로를 반성하는 말을 남긴다.

"그저 병이 많아서, 지나치게 장생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간사한 자들의 유혹에 넘어갔다."

마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도 황제로서 장생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다만 다른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항상 황제가 무엇을 좋아하면 고의로 그에 영합하게 되어 결국 마지막에는 평생의 여한으로 남게 된다는것을 의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늦었다. 가정제는 꼬박 45년간 재위했지만 시간낭비가 너무 많았다. 대명이라는 점점 가라앉는 거대한 한배를 이미 구할 수 없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