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귤(紫橘)
장거정이 집권한 기간동안 발호하고, 권력을 독점하고, 부정부패했다는 것은 모두 증거가 있다. 다만 그가 번왕(藩王)의 재산에 욕심을 부렸다는 것은 지나친 점이 있다. 후인들이 장거정의 죄상으로 열거한 것중에는 는장거정이 황가를 능멸한 권간(權奸, 간사한 권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양양(襄陽)의 요왕(遼王) 재산에 침을 흘렸고, 요왕사건을 조사하던 홍조선(洪朝選)에게 요왕을 모함하도록 지시했으나, 홍조선이 따르지 않았고, 장거정은 다시 수하를 시켜 홍조선을 죽여 입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장거정의 제2의 조조이다. 장거정이 정말 그 정도로 악독했을까?
- 장거정과 홍조선의 관계
홍조선은 가정(嘉靖)시기의 진사이고 관직은 도찰원우첨도어사(都察院右僉都御史)에 이른다. 그가 장거정과 관계되는 것은 요왕사건에서이다. <만력저초(萬歷邸抄)>이건 <명사>이건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논리는 모두 장거정은 요왕과 원한이 있었고, 홍조선은 요왕사건으로 장거정에게 미움을 사서, 노감(勞堪)이 장거정에게 잘보이기 위해 홍조선을 주살하고, 홍조선의 아들은 억울하다고 호소를 계속하여, 결국 노감은 유배를 가고, 홍조선은 명예를 회복하였으며, 장거정은 권간으로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역사가 정말 그러했을까?
<만력저초>의 기록에 따르면, 만력12년, 홍조선의 장남이 입조하여 자신의 부친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호소한다. 이렇게 하여 장거정과 홍조선의 은원이 드러나게 된다.
두 사람의 은원은 요왕으로 인해서 발생한다.
요왕 주헌절(朱憲㸅)과 장거정은 어려서부터 악감정이 있었다. 장거정의 조부는 일찌기 양양의 요왕부에서 일했는데, 주헌절과 장거정은 나이가 비슷했다. 주헌절은 공부를 싫어했는데, 신동 장거정은 주헌절의 부모들이 항상 주헌절를 혼내면서 언급한 다른 집 아이였다. 만일 너의 재능이 다른 사람때문에 못난 것이 드러난다면, 원한의 씨는 싹트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헌절과 장거정간에 악감정이 생긴 근원이다.
나중에 장거정이 거인(擧人)이 되고, 요왕부에서 축하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그러나 연회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거정의 조부인 장진(張鎭)이 별다른 이유없이 사망하고 만다. 장거정은 주헌절이 조부를 핍박하여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게 해서 죽은 것이라고 의심한다. 가정제때, 주헌절은 요왕의 작위를 계승한다. 그는 가정제가 도교를 숭상하는 것에 영합하기 위하여 도가를 떠받든다. 그리하여 가정제의 총애를 받고, 주헌절은 더욱 기고만장하게 된다.
1567년, 어사들이 주헌절이 불법을 저질렀다고 탄핵한다. 명목종(明穆宗)은 어사 홍조선을 양양으로 보내 조사하게 한다. 장거정은 홍조선에게 요왕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말하며, 번왕을 삭탈하고 그 재산을 몰수할 것을 암중으로 지시한다. 홍조선은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사실대로 보고한다. 그리하여 이 일로 장거정에게 미움을 산다. 그리하여 장거정은 그를 관직에서 파면한다. 장거정의 심복인 노감이 복건순무를 맡았을 때, 노감은 장거정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홍조선에게 삼일간 아무 것도 먹지 못하게 하여' 홍조선을 아사시킨다. 그후 홍조선의 장남이 북경으로 가서 억울하다고 호소한 장면이 일어난다. 그리고 노감은 최종적으로 변방으로 충군(充軍)되어 쫓겨난다.
2. 홍조선의 파직이 장거정의 음모때문인가?
많은 사람들은 홍조선이 파직당한 것이 그가 장거정의 지시에 따라 요왕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역사상 융경3년의 조사는 경사(京査)는 명나라때의 제도에 따라, 4품이상의 고위관료는 모두 입경하여 보고하고, 황제가 거취를 결정한다. "각신(閣臣)이 거취에 대한 의견을 내거나, 혹은 부원에 내려 죄상이 맞는지를 재의한 다음, 황상에게 올려 결재받는다." 이월 십일일,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 윤악순(尹樂舜)등 197명이 경사에서 불합격하여, 각각 강등, 파직, 좌천등 처분을 받는다.
<명목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급사중(給事中) 정대경(鄭大經), 어사(御史) 장첨(張瞻)등은 잘못을 찾아내어 형부좌시랑 홍조선의 파직을 청하다." 홍조선은 변명하였지만, 삼월 칠일, 어사가 다시 홍조선을 탄핵한다. 명목종은 홍조선이 평소에 "말과 행동을 조심하지 않고, 행동거지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명목으로 그를 급여는 유지하면서 퇴직하도록 한다.
후인들이 이번 경사에서 파직된 관료들을 살펴본 후 놀라운 결과를 찾아낸다. 모두 전 수보(首輔) 서계(徐階)와 관련이 있던 것이다! 이들 파직된 사람들중 많은 사람은 서계가 발탁하거나 양성한 사람들이다. 홍조선도 서계가 발탁한 인물이다.
그리고 홍조선은 확실히 행위에 잘못된 점이 있었다. 그는 관료로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지 못하여 여러가지 나쁜 짓을 했고, 도찰원이 이미 확인했다. 이번 경사의 집행권한은 수보(首輔) 이춘방(李春芳), 차보(次輔) 진이근(陳以勤)의 손아귀에 쥐어 있었다. 장거정은 내각에서 서열이 3위에 불과했다. 그리고 내각에서는 단지 파직자명단을 제출할 뿐, 진정한 결정권은 한창 나이인 명목종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때의 명목종은 웅심장지를 가지고 위업을 해내고자 했으며, 이전의 퇴락한 모습을 일소했다. 홍조선 같은 자는 명목종이 파직시키고자 하는 자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홍조선의 파직은 장거정과 관련이 없다.
3. 홍조선의 죽음은 장거정이 지시한 것일까?
노감은 장거정에게 잘보이기 위해 홍조선을 죽여버린 것일까?
기실 홍조선은 귀향한 후에도 안분지족하며 살지 않았다. 그는 일찌기 고위관료를 지냈고, 가족도 지방에서 권세를 부렸다. 정치적으로 실의한 상태에서도 그는 극력 재물을 탐했고, 수단은 불법적이었따. 권세로 다른 사람들을 압박하는 외에 약한 자들을 누르고, 조카들이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고, 시골사람의 재산을 편취하는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홍씨집안이 재물을 늘여가면서 다른 집안들과 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홍씨집안과 원한을 맺은 사람으로는 동안현(同安縣)의 유존덕(劉存德)집안이 있다. 유존덕은 광동안찰부사(廣東按察副使)의 직에서 퇴직했다. 두 집안의 세력은 원래 비슷한데, 도박채무로 인하여 원한을 갖게 된다. 유씨집안에서 소장을 복건순무 하관(何寬)에게 제출한다. 하관은 홍조선과 원래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에 유씨집안이 패소했다. 그후 홍씨, 유씨 두 집안의 갈등은 계속 격화된다. 후임의 몇몇 복건순무는 모두 홍조선이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어서, 유씨집안은 계속하여 패소한다. 유씨집안의 홍씨집안에 대한 원한은 더욱 깊어진다.
홍씨, 유씨집안소송의 전환점은 만력7년에 발생한다.
당시 김지(金枝)가 동안지현(同安知縣)으로 있었다. 그런데 홍조선이 김지의 이익을 침범하여, 두 사람이 반목하게 된다. 유씨집안과 김지는 손을 잡는다. 김지는 홍씨집안이 벌인 불법적인 일들을 복건순무 노감에게 보고한다. 노감은 이를 사실대로 중앙정부에 보고한다. 만력9년, 노감은 도찰원이 보낸 이부의 자문(諮文)을 받는다. 홍조선을 삭적(削籍)하고 조사결과를 기다리게 하라는 것이다. 노감은 홍씨집안의 세력이 강한 것을 우려하여 체포하기 곤란할 것이라 여긴다. 그리하여 방안을 강구하여 비밀리에 홍조선을 체포한다. 홍조선이 체포된 후, 홍씨집안은 과연 문객등 사람을 모아서 부성(府城)인 천주(泉州)로 간다. 노감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여겨서 관군을 시켜 홍조선을 성성(省城)인 복주(福州)로 압송한다. 십육일에 출발하여, 이십이일에 복주에 도착한다. 그리고 안찰사감옥에 가둔다. 홍조선은 이미 돌이킬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여, 옛날의 삼품고관은 체면을 지키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다.
이십사일, 옥졸 장귀(張貴)는 홍조선이 옥중에서 자살한 것을 발견한다.
이를 보면, 홍조선의 죽음은 그 스스로가 잘못한 때문이고, 원인은 지방가문들간의 분쟁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이를 추진한 인물은 김지였고, 노감은 그저 중앙정부의 명령을 집행한 것일 뿐이다.
4. 홍조선 사건이 정치사건으로 비화되다.
기실, 장거정과 홍조선은 그다지 교류가 없었다. 장거정과 홍조선의 죽음을 연결시키는 것은 만력10년부터이다. 즉, 홍조선이 죽은지 3년이 지난 후이다.
홍조선의 아들 홍긍(洪兢)은 부친의 사건을 뒤집고, 조정신하들의 의도에 영합하기 위하여, 고의로 홍조선과 장거정간의 은원을 과장한다.
만력10년 십이월, 급사중 손위(孫瑋)가 좌부도어사 노감을 탄핵한다. 이때 처음으로 홍조선이 '권신'에게 밉보여서 죽었다고 언급된다. 이는 처음 장거정과 홍조선을 연결시킨 상소문이다. 다음 해 오월, 홍긍, 홍축(洪祝)이 연이어 북경으로 가서 억울함을 호소한다. 과도언관들이 집단으로 장거정을 탄핵한다. 홍조선은 예전에 구순(丘橓)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있다. 만력12년 이미 좌부도어사가 된 구순은 아주 중요한 <수적폐이숙기풍사(修積弊以肅紀風事)>를 올린다. 노감을 "장거정의 응견(鷹犬)"이라고 칭한다. 이제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구조가 완성되었다. 즉 홍조선이 요왕사건을 조사할 때, 장거정에게 미움을 샀고, 노감은 장거정에게 잘보이기 위하여 홍조선을 죽였다. 홍조선은 실제 조정의 동량이고 치세의 능신이었다. 그후 황제는 홍조선사건을 재조사하도록 명령한다.
비록 홍조선의 이야기는 그럴 듯하지만, 진상은 진상이다. 장거정은 은홍조선과 실제 교류가 없었고, 그리하여 삼법사(三法司)는 "돌아가신 재상(장거정)의 지시를 받았다는 것은 증거가 없다. 홍조선이 스스로의 잘못 때문에 죽은 것이다." 이를 보면 장거정은 홍조선사건과 근본적으로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런 결과를 홍씨집안사람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만력10년부터 만력15년까지 홍씨집안은 홍조선사건을 뒤집고 집안세력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이를 위하여 홍씨집안사람들은 관료들에게 부탁하여, 홍조선의 묘지명(墓誌銘), 전기(傳記)를 쓰게 했다.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그의 죽음은 장거정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런 문학식의 사건뒤집기는 천계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천계조때 이광진(李光縉)의 <형부시랑홍정암선생전(刑部侍郞洪靜庵先生傳)>으로 최고조에 달한다. 전체 글은 약2,000자인데, 2/3의 내용이 장거정과 홍조선의 은원에 대한 것이다.
홍씨집안은 가족이익을 지키기 위해, 당시 장거정을 숙청하는 정치적 분위기를 이용했다. 오직 홍조선의 죽음을 '권간' 장거정과 연결시켜야만 홍조선의 죽음이 영광일 수 있었다. 홍씨집안은 고의로 혼동시켜 홍조선사건의 진상을 가렸고, 명사들에게 부탁하여 홍조선의 묘지명, 전기를 쓰게 했다. 그렇게 그가 후세에 좋은 명성을 남기도록 애썼다. 그리고 홍씨집안의 목적은 확실히 달성되었다. 홍조선사건은 <명신종실록>에만 실려있다. <실록>은 당시에 널리 읽히는 서적이 아니어서 읽는 사람의 범위가 좁았다. 후인들은 홍조선사건의 상세한 경위를 알지 못했고, 진상을 추단할 수 없었다. 반대로 홍씨집안에서는 사방에 묘지명과 전기를 전파하며 다녔다. 만력10년부터, 장거정은 갈수록 황제의 미움을 샀고, 장거정을 공격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이었다. 홍조선은 장거정에게 '살해'당한 것이니 당연히 영웅이고, 그는 장거정타도운동에서 하나의 기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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