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귤(紫橘)
가정제(嘉靖帝)는 각박과은(刻薄寡恩)한 것으로 유명했고, 시기심이 많은 군주였다. 그가 진심으로 대한 사람을 실로 많지 않다. 역사상 대명이 자자한 엄숭(嚴嵩), 서계(徐階)도 가정제로 하여금 안심하게 만들지 못했다. 가정제의 유모의 아들인 금의위지휘사(錦衣衛指揮使) 육병(陸炳)은 비록 그의 신임을 받았지만, 가정제가 직접 그의 전포(戰袍)를 벗겨주는 영광은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모백온이라는 명나라의 개국공신 유백온(劉伯溫)과 성만 다른 인물은 가정제가 그를 위해 지어준 시에서 "태평대조귀래일(太平待詔歸來日), 짐여선생해전포(朕與先生解戰袍)"라는 시를 지어주었다. 그럼 도대체 이 모백온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을까?
- 명나라와 안남(安南)
홍무제때, 안남국왕(安南國王) 진일규(陳日喹)는 조공을 바치고, 주원장은 그를 책봉한다. 이렇게 하여 중국과 월남은 종번관계(宗藩關係, 종주국과 번속국의 관계)가 확립된다. 영락제때, 안남의 권신(權臣)이 대명의 경고를 무시하고 안남국왕을 살해한다. 그리하여 천자는 분노하여 군대를 보내 안남의 권신을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그리고, 안남을 군현으로 삼아 안남포정사사(安南布政司使)를 설치하고, 17부(府), 157현(縣)을 관할하도록 한다. 명선종때 많은 영토를 포기하였고, 명나라는 안남의 편제를 취소한다. 그후 명나라와 안남은 계속하여 종번관계를 유지한다. 중국과 조선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안남은 비교적 특수했다. 진,한이래 중원왕조는 직접 안남을 관할했다. 그리하여 명나라의 군신사이에는 안남을 수복할지 여부에 대하여 계속 논쟁이 존재했다.
기실 명선종이후, 안남의 국내정세는 계속하여 혼란상태였다. 가정6년, 권신 막등용(莫登庸)이 정권을 탈취하고 왕을 칭하며 막조(莫朝)를 건립한다. 그리고 원래 국왕 여씨(黎氏)의 잔여세력은 힘들게 버티고 있었다. 가정11년, 여조(黎朝)의 잔여세력은 여장종(黎莊宗)을 내세워 월남은 남북조시대로 접어든다. 양조간에는 상호 공격을 진행하여, 중국변경의 안전히 심각하게 위협받았다. 쌍방은 모두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 승인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막조의 조공은 여조가 방해했고, 여조의 조공은 막조가 방해했다. 중국과 월남 양조의 관계는 난감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2. 논쟁
가정15년, 황자가 태어난다. 관례에 따라 사방에 황자의 탄생을 알린다. 그러나 안남의 국면은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당시 예부상서 하언(夏言)은 상소를 올려 안남을 치죄할 것을 요구한다. 이유는 안남이 20년간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며, 이는 대명을 경시하는 것이고 게다가 막조는 원래 왕위를 찬탈한 것이라는 것이다. 병부상서 장찬(張瓚)도 "등용은 시역(弑逆)하였으니 마땅히 토벌해야 한다"고 하였다. 기실 하언이건 장찬이건, 그들은 모두 명나라 내부의 안남수복하의 주장을 펼친 것이다. 안남에 군현을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하언은 조정의 매파이다. 남으로는 안남을 수복할 것을 주장하고, 북으로는 하투(河套)를 수복할 것을 주장했다. 단지 하투의 일로 엄숭의 암산에 당해 결과는 처참하게 된다. 가정15년은 하언이 가정제의 총애를 받을 때이고, 안남에 출병해야한다는 주장은 자연스럽게 가정제의 지지를 받게 된다.
황제의 의견은 명확했다. 다만, 대외출병이라는 대사는 그래도 조정에서 의논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후 월남을 정벌할 것인지 아니면 훈척(訓斥)할 것인지를 놓고 조정은 당쟁에 빠진다. 반대파의 대표는 호부시랑 당주(唐胄)였다. 그는 안남에 출병하는 것은 유해무익(有害無益)하다고 보았다. 돈과 군량 그리고 군사력만 소모할 뿐이라는 것이다. "할심복이보사지(割心腹而補四肢, 심장과 배를 잘라서 팔다리를 보완하는 격)"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현재 국고가 비어 있다고 말한다. "먼저 사천에서 채목지역(采木之役)이 있었고, 귀주에서 개구지사(凱口之師)가 있었으며, 양광의 수십만 축적해둔 것은 전주잠맹지역(田州岑猛之役)에 소모했다"는 것이다. 호부의 주장은 헛점이 없었다. 그래서 안남을 정벌하는 일은 잠시 중단된다.
그런데, 다음 해에 안남에서 사단이 일어난다. 여조의 정유료(鄭惟撩)가 점성(占城)을 우회하여 대명에 들어와 막조의 죄행을 고발했다. 그러면서 천조에서 병력을 출동시켜 국적을 토벌해줄 것을 청했다. 떄마침 조정에서 안남에 사신으로 보낸 감탐관(勘探官)도 안남의 상황을 보고했다. 이는 가정제로 하여금 안남을 토벌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만든다. 황제는 그리하여 예부, 병부에 명을 내려 안남정벌의 건을 다시 논의하도록 한다.
하언과 장찬은 조정회의에서 막등용의 10대죄상을 열거한다. 그러나 시랑 반진(潘珍), 양광총독 반단(潘旦)은 안남을 정복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사후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반문한다. "그 땅은 군현을 설치하기에 부족하며, 중국에 계속하여 복속하다가 배반하기를 거듭했다." 그리고 조정의 가장 큰 위협은 북방초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정은 다시 논쟁에 빠져든다.
8월, 운남순무는 막조의 간첩을 체포하는데, 그의 몸에서 막조가 대명황제의 체례(體例)를 본떠 작성한 <대고(大誥)>를 찾아낸다. 이는 막조가 대명의 신하가 아니라, 대명과 평기평좌(平起平坐)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가정제는 진노했고, 안남을 정벌하도록 명한다. 함녕후(咸寧侯) 구란(仇鸞)을 정이장군(征彛將軍)으로 임명하고, 도어사(都御史) 모백온을 참찬기무(參贊機務)로 하여 출정하게 하였다. 호부시랑 호련(胡璉)과 고공소(高公韶)는 먼저 양광으로 들어가 군량을 준비했다.
3. 짐위선생해전포(朕與先生解戰袍)
청나라때 조인(曹寅)이 편찬한 <천가시(千家詩)>에는 가정제의 <송모백온(送毛伯溫)>이 실려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장남정담기호(大將南征膽氣豪)
요횡추수안령도(腰橫秋水雁翎刀)
....................
태평대조귀래일(太平待詔歸來日)
짐여선생해전포(朕與先生解戰袍)
'선생'이라는 말은 명나라때 황제와 특수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에게만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이었따. 예를 들어 주원장은 유백온을 "선생" 혹은 "노선생"이라고 불렀고, 만력제는 장거정을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외에 황제가 태자로 있을 때 그의 스승이었던 사람들에게도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가정제는 도대체 모백온과 무슨 관계였을까?
현재 남아 있는 자료를 보면 모백온은 가정제와 무슨 특별한 관계가 아닌 것같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이 시를 위작(僞作)으로 보기도 한다. 모백온은 정덕제때의 진사로, 여사, 복건순안, 하남순안을 거쳐 도찰원으로 들어갔으며 그후 외지로 나가서 대동(大同)에 있으면서, 대동의 보루를 축조했다. 비록 공로가 크기는 하지만, 가정제가 특별하게 볼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외에 가정제는 각박과은했으며, 모백온은 가정제의 대예의논쟁때 적계도 아니었다. 대예의때의 최대공신인 장총(張璁, 호는 羅山)에 대하여도 가정제는 단지 "소사나산(少師羅山)"이라고 칭했을 뿐이다. 그리고 모백온은 말년에 몽골이 북직예로 쳐들어오면서, 탄핵을 받아, 결국 변방으로 유배당한다. 그러므로 가정제가 모백온을 선생을 칭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왜 시에 '선생'이라는 단어가 들어갔을까? 어떤 사람은 두 가지로 원인을 추측한다. 첫째, 가정제는 확실히 대군이 출정할 때 장행시(壯行詩)를 지어주었지만, 후대에 전해지면서 수정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정제라면 쓰지 않았을 '선생'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게 된 것이라고 본다. 둘째는 가정제는 다른 사람에게 대신 시를 짓게 한 것이라는 것이다.
역사진상이 어떠하든간에 대군은 출정하게 된다.
4. 안남은 다시 중원에 편입된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월남에 대한 직할은 명선종이 포기하면서 기본적으로 끝났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로 도교에 빠져 있던 가정제도 영토를 개척한 바 있다. 그의 최대공적은 바로 안남수복이라 할 수 있다. 모백온은 참찬기무였는데, <명사>에는 그에 대하여 "기우(氣宇)가 침의(沉毅)하여, 일이 닥쳐 결정을 내릴(臨事決機) 때, 목소리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不動聲色). 안남지역(安南之役)에 만달(萬達), 장악(張岳)은 모백온이 조정에 극력 추천했고, 두 사람이 기용된다" 이를 보면, 안남은 모백온의 기획으로 평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백온은 광서에 도착하고, 만달, 장악이 12.5만의 병력을 3로로 나누어 국경에 배치되어, 안남을 공격할 태세를 취한다. 가정19년, 모백온은 남녕(南寧)에 있으면서, 군대를 안남으로 진입시킨다. 첫째,단계별로 착실하게 굳히면서 진격하는 전략을 취한다. 서서히 진격한 것이다. 둘째, 심리전을 행했다. 만이가 천연적으로 천조대국을 두려워하는 심리를 이용해서 대거 안남백성들로 하여금 막씨부자를 토벌하는데 협조하게 했다. 셋째, 막씨에게 퇴로를 열어주었다. 스스로 투항하기만 하면 죽이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군사위협, 내부갈등, 명나라의 회유라는 세 측면의 공세로 11월에 이르러, 막씨일족 40여명은 스스로 묶고 항복을 청한다. 그리고 막조의 군민과 토지를 바친다. 그리고 이전에 침범했던 광서 흠주 사동의 영토를 반환한다. 모백온은 여조가 쇠약하여 안남 전역을 통치할 수 없다고 보고, 상소를 올려 조정이 안남을 직할하도록 건의한다. 가정제는 명을 내려 안남왕국을 폐지하고, 안남도통사사(安南都統都司)를 설치한다. 막등용을 세습토관, 도통사로 임명하고, 그 아래 13도 선무사(宣撫使)를 두며, 막등용으로 하여금 선무사를 임의로 임명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외번이었던 안남은 서남토사들과 마찬가지로 내번토관으로 바뀌게 된다.
비록 안남이 명목상으로는 다시 중원에 편입되었지만, 조정이 남방을 경시하면서, 안남은 국경을 걸어닫고 여전히 왕을 칭한다. 게다가 가정제는 도교에 빠져 있어서, 안남은 가정제후기에이르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안남도통사라고 불렀지만, 실제로는 3년에 1번 조공을 바치는 번국이 되어버렸다.
결론
모백온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역사인물이다. 그러나 가정제의 시 하나 때문에 이름을 날리게 된다. 비록 두 사람의 특수관계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모백온은 가정제전기에 확실히 능력있는 신하였다. 구란이 전선에 도착한 후 사건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불려가게 됨에 따라, 안남전투는 실제로 모두 모백온의 전략에 의해 진행된다. 가정제때 최초의 대외전투에서 명나라는 승전을 거둔다. 그리하여 가정제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고, 대예의이후 백관들의 가정제에 대한 의심을 씻고 지위를 공고히 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정제는 아주 기뻐했는데, "짐이 선생을 위해 전포를 벗겨주겠노라"같은 말을 하더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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