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귤(紫橘)
명나라때의 수수께끼사건을 얘기하자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태창제(泰昌帝)시기의 정격안(梃擊案), 홍환안(紅丸案), 이궁안(移宮案)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세 사건은 명나라정국에 미친 영향이 비교적 적었고, 외적의 위협이 비교적 적은 상황하에서의 내부투쟁이었다. 그러나 명나라때 더욱 유명한 것은 홍광제(弘光帝)때의 남도삼안(南渡三案) 혹은 홍광삼안(弘光三案)이다. 이 세 개의 사건은 명나라의 말세때 발생한 당쟁이고, 북쪽의 영토가 이미 청나라에 점령된 상황하에서 명나라의 관료들은 여전히 내부투쟁에 골몰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 태창삼대안(泰昌三大案)과 동림(東林)
명나라때는 수수께끼사건이 아주 많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태창삼대안이다. 엄격히 말해서, 삼대사건은 태창제의 등극을 전후하여 발생했다. 다만 태창제 주상락(朱常洛)은 겨우 29일간 재위했다. 그래서 삼대사건을 묶어서 태창삼대안이라고 통칭하는 것이다. 즉, 만력제 말년에 '미치광이' 장차(張差)가 당당하게 태자의 동궁으로 쳐들어가, 방망이를 들고 태자 주상락을 때린 정격안; 주상락이 이가작(李可灼)이 바친 홍환을 먹고 급사한 홍환안; 주상락의 사후 그의 총비인 이선시(李選侍), 위충현(魏忠賢)이 건청궁을 점거하고 정무를 독단하고, 황장자 주유교(朱由校)를 통제했다. 그후 주유교는 여러 신하들이 구해내서 태자궁에 머무르게 하고, 여러 신하들의 압박하에 이선시는 결국 건청궁을 떠난다. 이 사건은 과정이 복잡하고, 의문점이 아주 많아서, 이궁안이라고 부른다.
태창삼대안은 궁중투쟁, 황위계승, 문관당쟁, 엄당청류(閹黨淸流)에 관련된다. 다만 3대사건의 조사와 성격규정을 한 것은 모두 동림당이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삼대안의 조사과정에서 동림당은 당동벌이(黨同伐異)했다고 본다. 심지어 더욱 급진적인 사람들은 삼대안을 동림당이 만들었다고 본다. 당연히 이런 주장은 성립되기 어렵다. 어찌되었건 이후의 역사를 보면, 동림당이 세워놓은 천계제(天啓帝)는 오히려 동림당과 멀어지고, 대거 엄당을 기용한다. 그래서 태창삼대안은 동림당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2. 홍광조(弘光朝)의 시작
태창삼대안이후 동림당이 여론을 장악하고 조정을 주재한다. 동림당이 여론조작을 통해 만들어낸 현왕(賢王) 주유검(朱由檢)이 등극하고, 동림당의 책동하에 1629년 숭정제는 "역안(逆案)"을 일으킨다. 위충현에 빌붙은 엄당을 6급으로 나누어 처벌, 처형에서 파직까지 서로 다르게 처리하여 철저하게 북경의 엄당세력을 일소한다. 그러나 1644년 홍광제는 엄당인 마사영(馬士英)에 의해 옹립되고, 마사영과 그의 가까운 친구 완대성(阮大鋮)은 동림당에 대해 피비린내나는 복수를 벌인다. 남경에서 동림당과 엄당은 새로운 라운드의 당쟁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쌍방의 투쟁은 치열했다. 그래서 홍광제가 등극한 후 한 첫번째 말은 "여러 신하들은 나에게 등용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쌍방간의 치열한 투쟁의 산물이 바로 남도삼안이다. 즉, 대비안(大悲案), 동비안(童妃案), 위태자안(僞太子案)이다. 이 세 사건은 거의 태창삼안의 복제판이다. 관리들이 당파에 따라 투쟁을 전개한다. 세 사건은 홍광제의 합법적인 지위에 영향을 준다. 그리하여 호북군벌 좌량옥(左良玉)이 그 기회를 틈타 반란을 일으키고, 남방의 인심은 흩어진다. 결국 남경성이 함락되는 비극을 맞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홍광삼안은 바로 홍광조가 멸망한 직접적인 원인이다.
3. 대비안(大悲案)
대비안은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당쟁에 관련되면서 복잡해진다. 1644년 11월, 홍광제가 이미 등극했다. 그 달에 승려 대비가 한밤중에 남경 홍무문(洪武門)을 두드린다. 그리고 자신이 숭정황제라고 말한다. 그는 바로 병마사(兵馬使)에 체포된다. 병부상서로 경영(京營, 수도의 군대)을 장악하고 있던 장국유(張國維)는 이렇게 말한다: "이자는 망녕된 자이다. 마땅히 바로 처형해버려야 한다. 끝까지 파헤치게 되면 국체에 적지 않은 손상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즉시 처형할 것을 청한다. 그러나 금방 남경의 항간에는 대비가 진짜 숭정제이고, 장국유는 황제를 때려죽이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돈다. 장국유는 어쩔 수 없이 대비를 삼법사(三法司)에 넘긴다. 다만 삼법사의 심문과정에서, 대비는 말을 바꾸어, 자신은 제왕(齊王) 계통의 종실로, 제왕에 봉해졌다가 나중에 정왕(定王)에 봉해졌으며, 노왕(潞王) 주상방(朱常淓)과 알고 있다고 말한다. 삼법사의 계속된 심문에 그는 다시 자신은 화상이고 노왕이 불교를 좋아하고, 보시를 자주해서 그의 인품에 감화받았으며, 그리하여 노왕이 '천자가 되어야 하고, 홍광제는 마땅히 황위를 양보해야 한다'고 여긴다고 말한다. 그후 다시 예부상서 '물이 너무 차갑다'는 말을 한 전겸익(錢謙益), 호부좌시랑 신소방(申紹芳)이 배후인물이라고 끌어들인다. 전겸익, 신소방은 즉시 글을 올려 변명한다. 심문을 담당한 관리 조지룡(趙之龍)등은 신속히 사건을 종결할 것을 건의한다. 더 이상 파문이 퍼지지 않도록.
엄당의 핵심인물이며, 저명한 극작가인 완대성은 '대비안'을 확대하기로 모의하여, 그 기회를 틈타 노왕을 지지하는 동림당을 모조리 일망타진하기로 한다. 엄당의 기획하에 대비안은 홍광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역모사건이 된다. 그후 완대성은 그의 특기를 살려 '십팔나한' '오십삼참(五十三參)', '칠십이보살'등의 명호를 만들어내어 동림당인사들에게 뒤집어 씌운다. 동림당, 복사(復社)를 모조리 연루시켜 없애고자 한 것이다.
홍광제 주유숭(朱由崧)은 대거 사람을 죽이는 걸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명을 내려 대비를 '사위(詐僞)'로 성격규정하고, 서시(西市)에서 참수한다. 정무를 주재하던 마사영도 남경의 인심이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아, 완대성의 주살계획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대비안은 형식적으로 종결되었다. 다만 대비안은 명나라관료들의 황제옹립에 대한 이견을 공개화한 의미가 있다. 주유숭이 과연 황위를 이을 자격이 있느냐는 논쟁은 홍광조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된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대비는 분명 숭정이 아니고, 그는 명나라가 남도한 기회를 틈타 사리를 취하려던 자로 본다. 마치 서진(西晋)이 남도한 이후 진원제(晋元帝)의 성이 우(牛)라는 유언비어가 돌았고, 북송이 남도한 이후 가짜공주사건이 벌어졌던 것과 동일하다. 다만 엄당은 이런 간단한 사건을 이용하여 동림당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당쟁이 발생하고, 사건은 복잡하게 바뀐 것이다.
4. 동비안(童妃案)
일찌기 홍광제가 등극한 후, 하남(河南)사람 동씨(童氏)는 자신이 주유숭의 세자시절 비(妃)라고 주장한다. 남명의 하남순무 진잠부(陳潛夫)는 이 일을 보고했으나, 홍광제는 무시한다. 1645년 3월에 이르러, 동씨는 다시 하남순무 월기걸(越其傑)을 찾아가서, 자신이 황비라고 주장한다. 하남순무는 할 수 없이 유량좌(劉良佐)로 하여금 그녀를 남경으로 데려가게 한다. 그리고 유량좌에게 암중으로 진위를 시험해보라고 지시한다. 유량좌는 처를 보내어 정보를 얻는다. 유량좌의 처가 한 말에 따르면, 동씨는 자칭 17세때 입궁했고, 조내감(曹內監)으로 책봉되어 아들 하나를 낳는데, 이름이 김가(金哥)라고 했다. 지금은 녕가장(寧家莊)에 살고 있다고 했다. 유량좌 부부는 그녀를 믿었고, 그녀에게 예우를 다했다. 동씨는 이에 위세를 부리며 황후의 자태를 보이고, 여러가지 코미디같은 일이 발생한다.
남경에 도착한 후, 홍광제는 그녀를 만나지 않고, 그녀를 요부(妖婦)라고 칭한다. 그리고 금의위(錦衣衛)로 하여금 엄히 심문하게 지시한다. 옥중에서 동씨는 여전히 자신이 어느 달 어느 날에 입궁했고, 어느 달 어느 날에 낙양이 함락되었으며, 자신이 어떻게 도망쳤는지등 세부적인 사항을 얘기했다. 그리고 홍광제와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홍광제는 여전히 무시했고, 동씨는 결국 옥중에서 굶어죽는다.
홍광제의 과격한 반응은 당시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연상을 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홍광제를 황제로 옹립한 마사영마저도 사람이 아무리 멍청해도 홍광제의 처라고 사칭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겨, 동씨가 아마도 홍광제의 조강지처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대부분의 관리들은 홍광제에게 한번 만나서 신중히 판별해볼 것을 권했다.그러나 홍광제는 끝까지 만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중에서는 홍광제가 도망가는 도중에 동씨와 만나서 서로 사랑했으나, 태후가 그녀의 출신이 빈한하다고 싫어하여 결국은 헤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동비안은 홍광제의 인품에 극히 나쁜 영향을 끼친다. 고대인의 관념 속에, 좋은 사람은 반드시 좋은 황제이다. 인품이 비열한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 현재 홍광제는 조강지처마저도 버리는 사람이니, 인품이 아주 나쁘다. 이런 사람이 황제가 되면, 백성들은 좋은 세월을 지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비안은 홍광제의 정치적 위신에 큰 타격을 입히고, 남방에서 청나라에 항거하는 사업에도 극히 나쁜 영향을 끼친다. 동비안을 이용하여 선동하면 주유숭에 반대하는 동림당이라고 여겨졌고, 동림당이 엄당에 반격하는 것이라고 인식되었다.
4. 위태자안(僞太子案)
동비안과 아주 근접한 시기에 홍광제의 정통성을 더욱 약화시키는 가짜태자사건이 벌어진다.
1644년 12월, 홍려시소경(鴻臚寺少卿) 고몽기(高夢箕)의 종이 남하하는 도중에 한 소년을 만난다. 그의 내의에는 용무늬가 수놓아져있었고, 자신이 숭정제의 태자라고 했다. 종은 크게 놀라 그 소년을 남경으로 데려간다. 1645년 2월, 고몽기는 이 일을 보고한다. 홍광제는 즉시 옛날에 동궁태감으로 있던 이계주(李繼周), 양진조(楊進朝)로 하여금 확인하게 한다. 그러나, 태자의 신분을 확인하기도 전에 태자에 관한 소식은 남경성내에 널리 퍼져버렸고, 남경의 인심은 크게 고무된다. 홍광제는 대노하여, 적시 이 '태자'와 접촉한 환관을 처형해버린다. 이 조치는 마치 스스로 인정해버리는 것과 같은 혐의가 있다. 그리하여 '태자'를 확인하는 과정은 동림, 선비, 여러 군벌들의 관심을 끌어모은다. 그러나 태자의 공부를 가르친 바 있는 대학사 왕탁(王鐸)이 나서서 확인해주고, 이 '태자'도 즉시 자신은 가짜라고 인정한다. 그저 그 종에게 돈이나 뜯어내려는 심산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주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던 사가법(史可法)도 북경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는 좌무제(左懋第)를 통해 진정한 황태자는 이미 순국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남경의 '태자'는 분명히 사칭범인 것이다.
비록 가짜태자의 신분이 확인되었지만, 여론은 흉흉했다. 역대 우민들은 다 그랬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이를 통해 반정부, 반국가활동을 벌인다. 여러 설이 난무하면서 마사영등 간사한 자들이 황제의 윤리를 끊게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가짜태자사건은 홍광제의 합법성에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호북군벌 좌량옥은 이 기회를 틈타 정사에 관여한다. "태자를 보전하겠다"는 글을 올리며 마사영의 권력독점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청군측(淸君側, 황제의 곁에 있는 간신을 제거하겠다는 의미임)을 핑계로 내걸며, 무창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마사영은 황급히 강북사진의 군대를 모아 남하하고, 강회(江淮)의 방어선이 비게 된다. 그리하여 청군은 남경으로 바로 쳐들어올 수 있었고, 홍광정권은 멸망하게 된다.
결론
홍광삼안은 정치사건이다.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당쟁이 관련되어 있다. 야사에서는 더더욱 이 세 사건을 이용하여 대담하게 추측한다: 홍광제는 복왕 주유숭이 아니다! 예를 들어, 황종희(黃宗羲)는 마사영이 옹립의 공을 세우기 위해 사람을 구해서 주유숭을 사칭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만사동(萬斯同)은 복왕계는 이미 낙양에서 모두 죽었으며, 동비가 진짜라는 전제하에 복왕이 가짜라고 추단했다. 그래서 홍광제는 감히 동비를 인정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풍문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홍광제의 합법성을 약화시키고, 남방의 인심을 분열시킨다는 것이다. 명나라의 당쟁은 정말 그 해가 무궁무진하다. 역사가 주는 교훈은 항상 이렇게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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