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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사정의(謝靜宜): 모택동(毛澤東)의 기요비서(機要秘書)

by 중은우시 2024. 8. 21.

글: 왕우군(王友群)

10년문혁때, 모택동과 처 강청외에 모택동의 곁에는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그중 특히 유명한 여인이 있는데, 모택동을 잘 모셨을 뿐아니라, 관직도 갈수록 높아져서 거의 전인대부위원장에 오를 뻔했다. 그 여인은 바로 모택동의 기요비서를 맡은 바 있는 사정의이다.

총애를 받은 후 교만해지다.

모택동의 보건의사 이지수(李志綏)는 그의 회고록에서 '모택동에 의해 부화(腐化)된 여자들'을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처음 모택동을 알게 되었을 때 천진무사한 젊은 아가씨들이었다. 모택동의 성생활, 특수성격과 지존권세는 이들 젊고 무지한 여자아이들로 하여금 점차 타락하게 만들었다. 여러 해동안 나는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아왔다. 그녀들은 모택동의 '여자친구'가 된 후,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날로 기고만장해졌다."

"모택동과의 특수관계는 이들 교육도 받지 못하고, 앞날도 암담한 여자아이들에게는 유일하게 위로 올라가고 이름을 떨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모택동의 총애를 받은 후, 하나하나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권세를 부려서 모시기 힘든 사람이 된다. 문화대혁명기간에 모택동과 관계를 가졌다가 버려진 여인들은 모택동과 그런 관계가 있었던 것을 이용하여, 공산당내에서 '관직이 오르고' 권력을 차지했다."

모택동의 여러 '여자친구'들 중에서, 진정 중공당내에서 계속 승진하여 장관/성장급까지 오른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중 한명이 바로 모택동이 "소사(小謝)"라고 불렀던 사정의이다.

이지수는 그의 회고록에서 사정의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BBC와의 인터뷰때 그는 사정의가 모택동의 여자중 한명이라고 밝힌다.

중학졸업후 17살때 모택동의 기요비서가 되다

사정의는 1935년 12월생으로 하남(河南) 상구(商丘)사람이다. 1952년에 군대에 들어간다; 1953년초, 중앙군사위기요학교(장춘793부대)를 졸업한 후, 중앙판공청 기요국에 배속되어, 문건의 수발업무를 맡는다. 1956년 5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당지부조직위원, 청년위원 겸 단지부서기, 단총지부서기등을 맡는다. 1958년 중앙판공실기요학교에서 공부하고, 1959년 모택동의 기요비서가 된다.

사정의의 학력에 관하여 필자가 인터넷에서 본 것은 모두 그녀가 중학학력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확인은 되지 않았다. 그녀가 군대에 들어간 시기를 보면, 당시 그녀의 나이는 17살이 되지 않았다. 당연히 학력이 높지 않았을 것이다. 군대에 들어간 후 공부한 것은 기껏해야 1년이고, 아마 겨우 몇달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졸업후에는 중앙판공실에 배속되었으니, 그다지 많이 배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대학을 졸업했다면 그녀에 관한 글이나 책에서 마땅히 설명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본 자료에는 그녀가 어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던지, 어느 대학을 졸업했다는 말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중학졸업학력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고, 그것이 지나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중학졸업생이 청화대학, 북경대학을 장악하다.

청화대학, 북경대학은 중국에서 가장 저명한 두 개의 대학이다. 1966년 모택동이 문혁을 일으킨 후, 청화대학, 북경대학은 모두 큰 타격을 입는다.

1968년 7월 27일,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중앙경위단 부단장 장영온(張榮溫)이 3만여명으로 구성된 공선대(工宣隊)를 이끌고 청화대학에 진주한다.

공선대가 청화대학에 진주하는 과정에서 모택동이 기요비서인 사정의는 모택동과 상, 하, 좌, 우를 연락하는 핵심인물이 된다.

공선대가 청화대학을 장악한 8년간(1968-1976), 중앙경위단 부단장 장영온, 정위 양덕중(楊德中), 정치부선전과장 지군(遲群)이 전후로 청화대학의 1인자가 된다. 1972년 1월부터, 사정의가 청화대학 당위부서기를 맡는다.

청화대학의 지도층에서 사정의는 1인자가 된 적이 없다. 그러나 청화대학의 핵심인물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택동과 직접 통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1969년 3월 24일, 중앙경위단 정위 양덕중은 군인을 이끌고 북경대학에 진주하고, 북경대학선전대영도소조를 구성한다. 양덕중, 왕연룡(王連龍), 지군, 사정의등이 영도소조의 구성원이 된다. 양덕중, 중앙경위단 부정위 왕연룡은 차례로 북경대학의 1인자가 되고, 지군, 사정의는 계속하여 지도부를 구성한다.

묵경대학의 문혁을 주도한 영혼인물도 사정의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택동과 직접 통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겨우 중학교졸업학력을 지닌 여자가 중국의 양대명문대학을 실질적으로 장악해버린 것이다. 이는 확실히 중공당사의 일대 기이한 광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관직이 갈수록 높아지다.

1971년 3월, 중공북경제4기 1차전회에서 사정의는 시위상위로 당선된다. 1973년 5월 18일, 중공중앙의 비준을 받아, 사정의는 북경시위 서기처서기가 되어 문화교육을 담당한다.

전 북경시위서기처 제1서기 오덕(吳德)이 구술한 <십년풍우기사(十年風雨紀事)>에서 사정의가 북경시위에 취임한 경위를 설명했다: "개략 1973년에, 사정의는 시위로 옮겨와서 서기처서기가 된다. 그녀는 중앙판공실 기요국의 사람이고, 모택동과 아주 잘 알았다. 사정의가 오기 전에, 주은래 총리가 나에게 얘기했다. 주은래총리는 사정의를 보내 서기처서기를 맡게 할테니, 그녀를 통하여 모택동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모택동의 지시를 전달받으라고 말했다."

1973년, 사정의는 공청단 북경시위서기, 북경시 혁명위원회 부주임이 된다; 같은 해 중공제10차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에 당선된다.

오덕은 <십년풍우기사>에서 이런 이야기도 남겼다. 1974년 하반기에 제4기전인대를 소집하기 위해 준비할 때, "주은래총리는 사정의를 전인대부위원장에 앉히자고 했다. 그가 나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나는 동의했었다." 다만, 모택동이 전인대와 국무원의 인사명단을 살펴보면서 사정의의 이름을 전인대 부위원장에서 지워버렸다.

1975년 소집개최된 제4기 전인대 1차회의에서 사정의는 전인대 상위로 당선된다.

문혁때 한 일

문혁이 끝난 후, 사정의에 대한 조사에 참여했던 중앙기율검사위의 관리인 왕문풍(汪文風)은 그의 책 <'동회주(童懷周)'에서 강청재판까지>에서 사정의에 관해 얘기했다:

"그녀가 가진 특수한 지위는 바로 '통천(通天, 모택동과 직통할 수 있다)'이었다. 그리고 강청과도 아주 긴밀했다. 북경시위, 심지어 시위제1서기(오덕)도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 일처리를 했다....일처리스타일에서 발호하였고, 아무때가 사람을 욕하고 훈계했다. 그녀는 당중앙의 정치국위원, 정부의 부총리, 군대의 원수, 장군들도 모두 무시했다."

사정의는 문혁때 무슨 일을 했는가? 주로 아래의 네 가지이다:

첫째, 청화대학, 북경대학에서 사람들을 숙청했다.

당소걸(唐少傑)의 글 <청화대학공선대시말>에 따르면, 1968년말의 '계급대오정리'부터 1976년10월초의 '등소평비판, 우경번안풍반격"까지 공선대는 계속하여 조사와 박해로 통치를 유지했다.

문혁10년간 청화대학에서 모두 1,228명이 입건되어 조사받는다. 178명은 '적아모순' 혹은 '전정대상'으로 규정되고, 58명은 비정상적으로 사망한다. 그중 공선대가 입건조사한 사람은 1,120명에 이르고, 피전정자는 167명에 달한다. 1968년말부터 1970년까지 비정상사망한 사람수는 급격히 증가하여 이미 20명을 넘긴다.

문혁10년, 북경대학에서 '반당반사회주의완고보루'등 각종 죄명을 뒤집어쓴 간부와 교수들은 '흑방분자' '주자파' '반동학술권위'로 규정되어 잔혹한 박해를 당한다. 이 기간동안 가산몰수된 것이 400여호이고, 억울한 사건이 1000여건이다. 거기에는 저명한 학자 요육태(饒毓泰), 전백찬(翦伯贊), 유대인(兪大絪)을 포함한 60여명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한다.

공선대가 청화대학, 북경대학에 진주한 이후 진행된 숙청의 악행은 모두 사정의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둘째, 임표의 딸을 처벌하는데 참여하다.

1971년 9월 13일, 문혁때의 중공2인자 임표, 임표의 처 섭군(葉群), 아들 임입과(林立果)가 몽골 원두르칸(溫都爾汗)에서 비행기추락으로 사망한다. 임표 및 그의 수하요원들은 '임표반당집단'으로 규정된다.

1971년 10월 4일, 임표의 딸 임두두(林豆豆)와 그녀의 미혼부 장청림(張淸林)은 특별조사를 받는다. 먼저 북경 옥천산에서 나중에는 북경위수구의 모 주둔지로 옮긴다. 특별조사팀의 책임자는 모택동의 기요비서 사정의였다.

사정의가 임두두에게 인정하라고 내놓은 목록의 내용은 이러했다: 9.13사건의 경위, 임표와 유소기, 등소평의 관계, 특히 9월 12일 저녁 섭군과 주은래간의 통화내용추적.

임두두는 하나하나 진술한다: 임표는 섭군, 임입과에게 속아서 비행기를 탔다. 다만 이건 모택동이 원하는 진술이 아니었다. 사정의는 반복적으로 그녀에게 주입시킨다. 어떤 때는 네가 잘 진술하면 너의 <공군보>부총편집의 직위를 그대로 갖게 해주겠다고 말하고, 어떤 때는 네가 더 계속 고집을 부리지 말고 가족들과 선을 긋고 임표의 음모를 폭로해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이다등등.

사정의로부터 반복되는 비판을 받은 후, 임두두는 임표가 이전에 모택동에 대해 '나쁜 말'을 했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모택동의 곁에도 섭군같은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이들 자료를 모택동에게 보고한 후, 특별조사팀을 비판을 받고, 임두두는 더욱 격렬한 비판을 받는다. 그녀가 고의로 '독을 풀어서' 위대한 영수를 '공격'했다고 본 것이다.

임두두의 진술을 바꾸게 하기 위하여, 사정의는 그녀와 장청림에게 제공하던 "육채일탕(六菜一湯)"의 대우를 취소하고, 하루 세끼를 보통병사식당에서 먹도록 한다. 그리고 매일 그녀에게 압박을 가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녀는 모택동이 원하는 진술을 얻어내지 못했다. 사정의는 장청림을 회유하는 전략을 생각해낸다. 그들 둘을 분리시켜 각자 다른 건물에 거주하게 한다. 그후 사정의는 장청림을 회유하여, 그에게 모택동의 편에 서도록 설득한다. 그녀와 잘 협력해야만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등의 말을 하면서.

사정의는 임두두, 장청림과 반년간 힘겹게 싸운다. 마침내 장청림은 사정의가 요구하는데로 진술자료를 작성한다. 사정의의 수정을 거친 후, 다시 임두두에게 건네주어 베껴쓰게 한다. 그후 모택동에게 올려서 살펴보도록 한다. 모택동은 만족했고, 이 일은 그렇게 끝이 난다.

셋째,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을 '촉발'한다.

1974년초, 모택동이 비림비공운동을 발동한다. 임은 임표이고, 공은 공자이다. 이 운동은 지군, 사정의가 모택동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모택동에게 이렇게 말한다. 임표의 집에서 임표가 쓴 공자,맹자의 말을 발견했다. 모택동은 이렇게 회신한다: "아, 반동계급은 역사를 후퇴시키자고 주장한다. 이들은 공자를 받들고 법가에 반대한다. 모두 진시황에 반대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지군, 사정의에게 자료를 만들게 한다. 지군, 사정의는 사람들을 데리고 임표의 집으로 가서 상자와 가구를 뒤진다. 글고 임표가 공자를 존경했다는 자료를 만들어낸다. <임표와 공맹지도(자료1)>

그후, 강청등이 이 자료를 달라고 하여, "전국의 각성, 시, 각대군구, 성군구, 군위각총부, 국무원각부에 보내어 비림비공에 참고로 하게 한다." 모택동은 이렇게 지시를 내린다: "전달하는데 동의함". 이 자료는 1974년 중공중앙1호문건의 내용이 된다. 그후 전국범위에서 비림비공운동이 정식으로 시작된다.

넷째, 비등(批鄧),반격우경번안풍(反擊右傾飜案風)

1975년 8월 13일, 10월 13일, 청화대학 당위부서기 유빙(劉氷)등은 등소평을 통하여 모택동에게 글을 올려, 지군, 사정의를 고발한다.

모택동은 고발서신을 받은 후 이렇게 지시한다: "청화대학 유빙등이 서신으로 지군과 소사를 고발했다. 내가 보기에 서신을 쓴 동기가 불순하다. 지군과 소사를 타도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서신에서 창끝을 나에게 향했다. 나는 북경에 있는데, 편지를 왜 직접 나에게 쓰지 않았는가. 굳이 등소평을 통해서 전달했는가. 소평은 유빙을 편들고 있다. 청화대학에 관련된 문제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현재 두 노선간의 투쟁을 반영한다."

모택동이 왜 이렇게 말했는가? 왜냐하면 모택동은 문혁을 발동한 것이 자신의 일생에서의 업적중 하나라고 여겼기 대문이다. 지군, 소사는 모택동이 청화대학에 파견하여 그의 의도를 관철하려는 것이다. 유빙등이 지군, 소사의 문제를 고발하는 것은 모택동이 일으킨 문혁에 대한 불만이고, 등소평이 유빙을 도와 서신을 전달하는 것은 등소평도 문혁에 대해 불만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등소평이 유빙의 서신을 전달해준 것을 기화로 창끝을 등소평에게 겨냥한다. 그렇게 비등,반격우경번안풍이 발생한다.

사정의는 유빙등이 모택동에게 고발장을 썼다는 것을 알고, 모택동의 태도를 확인한 후, 즉시 비등, 반격우경번안풍운동에 가담한다. 1976년 3월 26일, 사정의는 중앙정치국회의에 열석(列席)하여 그 자리에서 등소평을 비투, 성토한다.

청화대학은 더더욱 등소평비판의 중요보루가 된다. 완전하지 않은 통계에 따르면, 1975년말부터 1976년봄여름까지, 전국각지에서 30여만명이 청화대학으로 와서 '비등' 경험을 공부한다. 10여개국가의 주중사절과 기자들이 '비등운동'과 대자보를 보러 온다.

쫓겨나다.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이 사망한다. 사정의에게는 자신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사라진 것이다. 1976년 10월 6일, 모택동의 처 강청등 '4인방'이 체포된다. 같은 날, 지군, 사정의도 체포된다.

1977년 7월 6일, 중공북경시위는 통보를 통해 사정의를 북경시위에서 제명한다. 같은 해 10월 4일, 북경시위는 <지군,사정의의 당적을 박탈하는데 관한 결정>을 작성한다. 결정에서 지군, 사정의는 '4인방이 권력을 찬탈하는데 선봉장역할을 했다; 그들의 죄행은 엄중하고, 백성들의 분노도 아주 크다. 시위는 지군, 사정의의 당적을 영원히 박탈하고, 그들의 당내외모든 직위를 취소한다.

사정의사건에 참여한 바 있는 중앙기율검사위 관리 왕문풍은 이렇게 말한다: 사정의가 체포된 후, "여러 간부, 군중은 그녀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정의가 처벌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지도부에서도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최종적으로 '기소면제'를 결정한다.

왜 기소면제되었는가?

관건원인은 그녀가 한 많은 일들이 모두 모택동이 지시한 것이라는 것이다.

당시 북경시혁명위원회의 지도부구성원인 사송(史松)은 그의 회고록 <천천적각인(淺淺的脚印)>에서 사정의에 대하 언급한 내용이 있다. 그가 말하기를, 1976년 사인방이 분쇄된 후, 북경시위는 당위확대회의를 소집하여 사정의를 비판했다. 그는 방청하면서 상세히 기록으로 남겨, 나중에 비판글을 쓰는데 참고하고자 했다. 그가 갔을 때, 참가한 비판회의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의장: 사정의, 너는 사실대로 위대한 영수 모주석에 반대한 죄행을 진술하라!

사정의: 나는 모주석에 반대한 적이 없다.

의장: 모주석이 비림비공을 제기하고, 너는 대회에서 거기에 반주후문(反走後門)을 추가했는데, 모주석이 불만을 가지고 너를 비판한 적이 있다는데, 그런 사실이 있느냐?

사정의: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그날 모주석에게 가서 반성했다. 나는 말했다. 주석, 이건 강청이 나에게 말하도록 한 것입니다. 나는 강청이 나에게 하라고 한 일은 모두 당신의 동의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그녀가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면 저는 먼저 당신께 보고하겠습니다. 동의하시면 제가 하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주석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주석은 이미 나를 용서했다. 너희는 왜 아직까지도 그걸 계속하여 얘기하는가.

의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사인방이 너를 북경시로 파견한 것은 오덕에 반대하고 북경시위를 전복하려고 한 것이 아니냐. 사실대로 진술하라!

사정의: 나는 오덕과 사적으로 관계가 아주 좋다. 왜 그를 반대해야 하는가? 사인방이 그에게 무슨 불리한 일을 했는가. 나는 수시로 보고했다. 한번은 정치국에서 회의를 열었을 때, 사람들이 모두 떠났지만, 사인방은 남았다. 오덕이 회의실을 떠날 때, 장춘교가 오덕의 등을 보며 말했다. 이 자는 노간거활(老奸巨猾)이다. 강청도 말했다. 노활두(老猾頭)이다. 이 일을 나는 그날 저녁에 오덕에게 말하면서, 그에게 조심하라고 했다.

이런 대답에 의장은 할 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저 회의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상부에서 사송에게 시킨 비판글도 역시 쓸 수가 없었다.

일찌기 청화대학 당위부서기를 맡았던 혜헌균(惠憲鈞)이 사정의에 관해 얘기할 때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손에 항상 작은 노트를 들고 다녔다. 모주석이 말한 것, 왕동흥이 말한 것, 이 부총리가 말한 것, 저 부총리가 말한 것을 기록했다. 그녀를 비판하려면, 그녀에게 말하도록 해야 하는데, 그녀는 그것이 누가 말한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일은 누가 하라고 한 것이라고 말할텐데, 그녀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결론

10년문혁기간, 겨우 중학졸업학력만을 가진 여인이 모택동과의 '특수관계'로 인하여, 청운직상하여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두 개의 대학을 실제로 장악하기도 하고, 북경시위, 중공중앙의 요원까지 된다. 이것이 황당한 일중 하나이다.

그녀는 모택동의 지시를 받아, 많은 문화엘리트를 박해했지만, 마지막에는 그 책임을 모조리 사인방에게 뒤집어 씌웠고, 마치 모택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이 처리한다. 이것이 황당한 일 중 둘이다.

그녀는 '죄행이 엄중하고, 민분이 극대하다'고 하였지만 모택동과의 관계로 인하여 형사처벌을 면제받는다. 이것이 황당한 일중의 셋이다.

상유소호하필심(上有所好下必甚)

황음황당갱황탄(荒淫荒唐更荒誕)

시비선악전전도(是非善惡全顚倒)

번운복우화하란(飜雲覆雨華夏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