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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이 일본침략에 감사하면서 어떤 말을 했을까?

by 중은우시 2024. 8. 4.

글: 옥미수(玉米穗)

모택동이 일본침략에 감사한 것은 자주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다. 당연히 어떤 사람은 그건 그저 반어법에 불과하다고 변호한다. 그렇다면, 위대한 지도자 모택동은 일본침략에 감사할 때 도대체 어떤 내용으로 말했을까? 그것을 을한번 알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같다.

제1차로 모택동이 일본침략에 감사한 것은 1956년이다. 당시 일본군 중장 엔도 사부로(遠藤三郞)가 중국을 방문했고 직접 모택동에게 일본군도(軍刀) 한 자루를 선물하며, 일본군인은 이후로 더 이상 중국을 적으로 삼지 않겠다고 표시하며, 과거의 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과 진지한 사과를 보낸다. 모택동은 엔도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우리의 선생이고 우리는 당신들에게 감사한다. 너희가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중국인민을 교육시켰고, 모래알같던 중국인민이 단결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모택동은 그리고 엔도에게 제백석(齊白石)의 그림을 답례로 주면서 그 위에 친필로 이런 글을 남긴다: "승원도삼랑선생혜증진물(承遠藤三郞先生惠贈珍物), 무이위답(無以爲答), 근이제백석화일폭위증(謹以齊白石畵一幅爲贈)"(엔도 사부로선생의 진귀한 선물을 받아 보답할 것이 없어, 삼가 제백석 그림 한폭을 드린다)

제2차는 1956년 연말, 모택동은 진운(陳雲)등과 일본의 기업가 난고 사부로(南鄕三郞)일행을 접견한다. 난고 사부로는 과거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데 대하여 정중하게 사과하면서 "만일 장래 일본이 중국의 성 하나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모택동은 이렇게 대답한다: "문제를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전에 일본침략자들이 중국의 절반을 점령했다. 만일 그런 민족위기감이 없었더라면, 압박을 오래 받아온 중국인민은 아마도 각성하지 못했을 것이고, 단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아마도 아직 산 속에 있을 것이고, 북경에 와서 경극을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제3차는 1960년 6월 21일, 모택동은 일본의 좌파문학가 노마 히로시(野間宏)일행을 접견할 때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여러 일본친구들과 이 때의 일들을 얘기했었다. 그중 일부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것이 나쁜 일이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침략은 당연히 나쁜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나쁜 면만 보아서는 안된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은 우리 중국을 크게 도와주었다. 만일 일본이 중국의 절반을 점령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인민은 각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일본황군에 감사해야 한다."

제4차는 1961년 1월이다. 모택동은 일본 사회당 의원인 구로다 히사오(黑田壽男)과 회담할 때 이런 말을 한다: "일본의 난고 사부로가 나를 만났을 때 한편으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다. 여러분께 미안하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일본군벌이 중국절반을 점령했고, 그리하여 중국인민을 교육시켰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여전히 산 속에 있었을 것이고, 북경에 와서 극을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군벌, 독점자본이 좋은 일을 했다 .만일 감사해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일본군벌에게 감사하겠다."

제5차는 1964년 7월 9일 모택동이 아시아,아프리카,대양주방중대표단과 담화를 나누었다. 그때 이렇게 말한다: "일본자본가로 난고 사부로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와 얘기를 할 때 그가 말했다: '여러분에게 미안하다. 일본이 여러분을 침략했다' 나는 말했다: '아니다. 만일 일본제국주의가 대규모 침략을 발동하여 일본의 절반을 점령하지 않았더라면, 전중국의 인민은 단결하여 제국주의에 반대하지 못했을 것이고, 중국공산당이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상, 일본제국주의는 우리의 좋은 교사였다. 첫째, 그들은 장개석을 약화시켰다. 둘째, 우리는 공산당이 이끄는 근거지와 군대를 발전시켰다. 항전전에, 우리의 군대는 30만에 이른 적이 있다. 우리가 잘못을 범해서 2만여명으로 줄어들었다. 8년항전기간동안 우리 군대는 120만명으로 늘어난다. 보라. 일본이 우리를 크게 도운 것이 아닌가? 이 도움은 일본공산당이 도와준 것이 아니고, 일본군국주의가 도와준 것이다. 일본공산당은 우리를 침략하지 않았고, 일본독점자본과 그의 군국주의정부가 우리를 침략했기 때문이다."

제6차는 1964년 7월 10일이다. 모택동이 일본사회당인사인 사사키 고조(佐佐木更三), 구로다 히사오등 일행을 접견했을 때, 담화중 일본의 중국침략에 감사를 표시했다. 모택동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군대도 없다가 30만의 군대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잘못을 범한 것이고, 장개석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렇게 남방근거지를 모조리 잃어버린다. 할 수 없이 2만5천리의 장정을 진행해야 했다. 여기에 있는 사람은 나도 있고, 요승지(廖承志)동지도 있다. 남은 군대는 얼마나 되었는가? 30만에서 2만5천명으로 줄어들었다. 우리는 왜 일본황군에 감사해야 하는가? 바로 일본황군이 와서 우리가 일본황군과 싸우면서 비로소 장개석과 합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만5천의 군대는 8년간 싸우면서 120만군대, 1억인구의 근거지를 갖는 것으로 발전했다. 감사해야하지 않겠는가."

제7차는 1970년 12월 18일, 모택동이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와 얘기를 나눌 때 이런 말을 했다: "그들 일본인들이 정말 좋다. 중국혁명은 일본인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했다. 이 말을 나는 한 일본인에게 한 적이 있다. 그는 자본가이고 난고 사부로라고 한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다. 여러분을 침략했었다.' 나는 말했다. '아니다. 너희가 크게 도와준 것이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일본천황, 너희들이 중국의 절반을 점령하는 바람에 중국인민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너희와 싸울 수 있었다. 우리는 100만군대를 만들었고, 1억인구의 근거지를 마련했다. 이게 너희가 도와준 것이 아니란 말인가'"(이상의 7번의 대화는 모두 대륙의 정식출판물에 기록되어 있고, 쉽게 검색해볼 수 있다.)

모택동이 일본의 침략에 감사한 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가, 아니면 반어법인가. 각자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정확한 답안은 모택동 어르신 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현재 그 답안은 그 어르신과 더불어 수정관 속에 묻혀버렸다. 주변사람들의 억측과 논쟁은 결과도 나올 수 없고, 의미도 크지 않다. 그러나 위대한 영수의 원화(原話)에서 명백한 약간의 사실을 확인해볼 수 있다. 모주석이 말한 일본인이 크게 도와주었다는 것은 첫째, 장개석을 약화시켰다는 것이고, 둘째는 공산당의 군대와 근거지를 발전시키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원래 공산당의 군대는 장개석에 의해 30만에서 2만5천으로 쪼그라들었다. 일본인이 오자 공산당은 기운을 회복해서, 100여만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1억의 근거지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장개석은 원기를 상하여, 더 이상 공산당의 군대를 2만5천으로 줄어들게 할 힘이 없어졌다. 그래서 일본인에 감사한다는 것이다. 모주석이 감사한 것이 진심이든 아니면 반어법이든 그가 말한 이상의 사실은 확실히 진실한 역사이다. 일본인이 쳐들어오면서, 장학량이 서안사변을 일으키고, 그후 장개석은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 외적을 물리치려면 반드시 내부의 적부터 진압해야 한다)"의 전략을 중단하게 된다. 그리고 공산당과 2차례의 국공합작으로 공동으로 일본의 침략에 맞선다. 그러나, "동실조과(同室操戈)"로 공동으로 외적과 싸운 결과는 한편으로 장개석의 국군은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모주석의 공산당군대는 수십배 늘어난다. 항전이 끝난 후, 모주석은 <항전승리후의 시국과 우리의 방침>이라는 글에서 장개석의 항일정책을 "수수방관, 승리를 기다리는 것, 실력을 보존하는 것, 내전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과연 승리가 돌아오자, 현재 이 위원장은 산을 내려왔다. 산을 내려와서 항전승리의 과실을 빼앗아가려고 한다." "장개석은 복숭아나무를 심은 적이 없다. 물한통 준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손을 뻗어서 산을 내려와 복숭아를 따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수수방관, 승리를 기다리는 것, 실력을 보존하는 것, 내전을 준비하는' 장개석의 국군이 왜 심각하게 '약화'된단 말인가. 그건 누구에 의해 약화되었다는 것인가. 공산당이 "나무를 심고" "물을 주고" 전력을 다하여 항전하였다고 하지만, 팽덕회가 백단대전을 일으키자, 모주석은 '아군'의 실력을 드러내어, 일본군이 공산당군대를 향해 공격하도록 할 빌미를 주었다고 질책하지 않았던가. 만일 일본인이 정말 '공산당과 공산군'을 항일의 '중류지주(中流砥柱)'로 여겼다면 전력을 다해서 소탕했을 것이다. 기껏 2만5천에서 백만대군으로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겠는가.

모택동이 일본침략에 감사하는 말은 역사의 사실에 충실한 말이다. 다만 그의 말에서 모택동이 말을 잘하고 말을 과감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전우나 동료들도 모두 그가 한 말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과감하게 말하지도 못한다. 만일 그랬다가는 공개적으로 당을 '모욕'하는 반당분자로 몰릴테니까. 추측컨대 모주석의 전우와 동료들은 위대한 영수가 전혀 거리낌없이 일본침략에 감사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마음 속으로 씁쓸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감사'의 말은 쉽게 사람들로 하여금 도대체 '수수방관하고' '실력을 보존하고, 내전을 준비하고' '산을 내려와 항전승리의 과실을 따게 된 것'은 일본인의 침략으로 장개석이 심각하게 '약화'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일본인의 침입으로 2만5천명에서 백만대군의 당과 군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인가.

영도자의 말을 항상 정확하다. 그러나, 그런 말은 전우와 동지들에게 곤란과 난감을 가져다 주었다. 재삼재사 '일본황군'의 침입에 감사하는 것은 '우리 당 우리 군'이 항일전쟁의 중류지주라는 신화와 모순되는 말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