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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의 진짜 유언은 무엇이었을까?

by 중은우시 2024. 5. 9.

글: 섭영렬(叶永烈)

1976년 5월의 모택동

비록 모택동이 이미 화국봉을 중공중앙제1부주석으로 지정했지만, 왕홍문은 화국봉을 무시했다. 그가 보기에 화국봉은 그들의 적수가 되기에 등소평보다 훨씬 약했기 때문이다.

1976년 7월, 왕홍문은 다시 그의 비서 소목(萧木)에게 그를 위해 전면적인 발언개요를 초안하라고 지시한다.

반년전, 왕홍문은 주은래(周恩来)가 사망한 후 자신이 중앙업무를 주재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비서 소목에게 전면적인 발언개요를 작성하라고 하여, 소목은 설날연휴마저도 쉬지를 못했었다.

이번에, 왕홍문은 다시 한번 소목에게 고생을 하라고 시킨 것이다. 그것은 그가 강청, 장춘교, 요문원과 상의한 내용이다. 왜냐하면 그가 부주석이었기 때문에 그가 나서서 초안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전면적'인 발언개요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화국봉을 밀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초고의 '전면적'인 내용은 그가 마음 속으로 바라는 내용을 분명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원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적극적으로 여건을 조성하고, 서로 다른 상황을 구분하여, 노중청(老中青) 삼결합을 건립하고 완비한다. 한가지는 비교적 좋은 것으로, 투쟁중 점진적으로 완비하면 된다. 조직문제를 운동의 구성부분으로 하여 추진할 필요가 없다. 이는 충실하게 하고 조정할 필요가 있으며 주로 성위(省委)가 자체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다른 한가지는 1,2,3인자에게 모두 문제가 있어, 군중들이 그다지 신임하지 않으므로 중앙이 직접 도와야 한다.

(2) 국무원의 각 부의 문제. 이번 철도부는 만리(万里)동지로 하여금 업무에 신경쓰지 말고 스스로의 문제를 반성하게 한다. 또한 2명의 청년간부를 보내어 핵심소조부조장으로서 운동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렇게 하면 인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험은 종합해야 하고, 실제업무과정에서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야 한다. 나머지 각부는 적극적으로 여건을 조성하여, 점진적으로 참조하여 해결한다. 이들 부서는 건립이래 대부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현재의 상황은 아래가 바뀌었으니 위가 바뀌지 않거나 크게 바뀌지 않으면 모순이 점차 첨예해질 것이다. 이 기회에 바꾸어야 한다. 그러면 많은 기층간부, 군중들이 기뻐할 것이다.

(3) 군대문제. 기층은 좋다. 주요문제는 위층이다. 비교하자면 총참모부의 일이 더욱 긴급하다.

왕홍문은 이런 '전면적인' 말투로 발언개요를 준비하는 외에, 소목에게 모택동 주석에게 보내는 서신도 초안하게 했다.

소목의 회고에 따르면, 왕홍문이 모택동에게 서신을 쓸 때, 그에게 이렇게 준비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모주석이 최근 '국내문제를 주의하라'고 지시했다. 내가 보기에 국내문제는 역시 등비(등소평비판)이다. 전국운동은 여러가지 상황이 있다. 한가지는 잘 하고 있고, 한가지는 그저그렇다. 그리고 한가지는 문제가 비교적 많다. 이 뒤의 두 가지가 전국에서 다수를 점한다. 모두 지도부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특히 세번째는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무원의 일부 부서, 군위의 일부 부서도 마찬가지이다. 해결의 방법은 어떤 부서는 이미 하고 있는 것처럼 주요간부를 바꾸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그의 이런 말을 정리해서 모주석에게 보내는 서신으로 초안하게 했다. 나는 정리한 후에 그에게 보내주었고, 그는 수정하고, 다시 썼다. 그러나 모주석이 그 서신을 볼 기회는 없었다...."

왕홍문이 모주석에게 서신을 보내기 전에, 이미 모택동은 일을 볼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문혁'때, 중국대지에 붙어 있던 '모주석 만수무강 만세'의 큰 글자로 쓴 표어라든지, 하늘을 울리는 '모주석만세'라는 목소리도 모택동의 영생을 가져다 줄 수는 없었다.

대자연의 규율에 따라, 나이든 모택동은 점점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모택동의 신체는 하루 하루 나빠졌다.

주은래가 사망했을 때, 모택동은 탄식하며 말했다. "나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는 주은래의 추도식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1976년 2월하순, 미국의 전대통령 닉슨 부부가 중국을 방문한다. 모택동은 병중에도 미중관계의 대문을 열어준 옛친구를 만났다.

닉슨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1976년 내가 다시 중국을 때, 모택동의 건강상황은 이미 심각하게 악화되어 있었다. 그의 말은 듣기에 약간의 단음으로 이루어진 웅웅하는 소리같았다. 다만, 그의 생각은 여전히 민첩하고 깊이가 있었다. 내가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 다만 그가 대답할 때는 말로 뱉어내지를 못했다. 그는 통역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기다리지 못하고 노트를 가져다 자신의 논점을 적었다. 그의 이런 상황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괴로웠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그를 대하든지간에, 누구도 그가 이미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파킨슨병으로, 모택동의 행동은 당시에 이미 아주 곤란했다. 그는 더 이상 건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82세(마땅히 83세라고 해야할 것이다)의 비틀거리며 것던 농민이 지금 걷기도 힘든 노인이 되었다. 모택동은 만년의 처칠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자존심이 강했다. 우리가 대화를 끝내고, 그의 비서가 의자에서 그를 부축하ㅓ여 우리는 함께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TV카메라가 우리를 비추면서, 나와 그의 마지막 악수장면을 찍을 때, 모택동은 그의 비서를 밀어내고 혼자서 문앞에 서서 나와 작별했다.

천안문사건때 모택동은 그저 힘들게 말을 몇 마디 이어갔고, 떨리는 손으로 알아보기 힘든 몇 자의 글자를 적었다.

천안문사건후 모택동은 훨씬 늙어보였다.

1976년 6월초, 모택동에게 심근경색이 발생하여, 하마터면 '마르크스를 만날 뻔(죽을 뻔)' 했다. 의사와 간호사의 전력을 다한 응급조치끝에 그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아마 스스로도 남은 날이 얼마되지 않는다고 여겼고, 또한 심근경색이 돌연 다시 발작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정신이 또렷할 때인 1976년 6월 15일, 화국봉, 왕홍문, 장춘교, 강청, 요문원, 왕해용들을 불러서 임종당부식의 얘기를 한다.

모택동은 말하는 것이 힘들었고, 알아듣기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정신은 멀쩡했다.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칠힙고래희인데 나는 이미 팔십이다. 사람이 늙으면 항상 후사를 생각하게 된다. 중국에 이런 말이 있다. 개관정론(盖棺定论). 관짝을 닫고 나서 평가가 정해진다. 나는 아직 관짝을 닫기에는 좀 빠르지만, 그래도 평가는 내릴 수 있을 것같다. 나는 일생동안 두 건의 일을 했다. 하나는 장개석과 싸운 그 몇십년이고, 그를 바다의 섬으로 쫓아냈다. 항전8년을 통해 일본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이 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저 몇몇 사람이 나에게 와서 얘기하지만 그건 내가 하루빨리 그 섬을 회수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또 다른 일은 너희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이 일은 지지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 두 가지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이 유산을 다음 세대에 넘겨야한다. 어떻게 넘길 것인가? 평화롭게 넘기는 것이 아니되면 동탕중에 넘겨야 한다. 잘못하면 혈우성풍이 일 것이다. 너희가 어떻게 해아할지는 하늘만이 알 것이다"

모택동의 이 말은 자신의 일생에 대한 총괄이며, '후계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이었다.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문혁'에 대하여 지지하는 사람은 적고, 반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그러나, 그가 일으킨 '문혁'은 그가 일생동안 행한 2가지 큰 일 중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절대로 문혁이 부정되는 것은 허용할 수 없었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그의 침상 앞에 서서 이 당부를 듣고 있던 사람은 화국봉(华国锋), 왕해용(王海容) 외에 그가 '문혁파' 인물로 인식하고 있던 왕홍문(王洪文), 장춘교(张春桥), 강청(江青), 요문원(姚文元)이었다. 등소평(邓小平)을 무너뜨리면서 왕홍문, 장춘교, 강청, 요문원은 기세가 살아났다.

20여일후인 7월 6일 주덕(朱德)이 사망한다. 모택동은 탄식하며 말한다. "주모(朱毛), 주모. 갈라질 수 없다. 이제 주가 죽어서 마르크스를 만나러 갔으니, 나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모택동은 미약한 목소리로 남북조시대의 문학가 유신(瘐信)의 <고수부(枯树赋)>를 읊었다.

석년종류(昔年种柳), 의의한남(依依汉南);

금간요락(今看摇落), 처창강담(凄怆江潭);

수유여차(树犹如此), 인하이감(人何以堪).

예전에 한수의 남쪽에 심은 버드나무는 가지가 무성했는데,

지금보니 잎이 모두 떨어져서 강변에 처량해 보이는구나.

나무도 이러할진데, 사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는 이미 한 그루의 고목이 되어 '처창강담'한 상태였다.

중국은 10년 문혁의 재난을 받았다. 1976년 7월 28일 새벽 3시 42분, 새로운 재난이 닥친다. 바로 당산대지진이다. 북경, 천진도 그 영향이 미쳤다. 사람들은 황급히 모택동을 집안에서 들고 나왔다. 그후 모택동은 죽을 때까지 더 이상 말을 할 힘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