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중국의 사상

화하문명(6):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법가부체(法家附體)

중은우시 2024. 8. 11. 18:37

글: 현야(玄野)

여기에서 먼저 언급할 것은 일찌기 모든 사람을 곤혹하게 만들고 풀지 못한 하나의 문제이다: 백년동안 세계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통치하는 지역은 가볍게는 민생이 파탄나고, 심하면 생령이 도탄에 빠지며, 1990년대에 총본산인 소련과 동구의 공산주의정권이 도미노식으로 붕괴했는데, 오직 중국의 공산주의정권은 계속하여 성장하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공산주의가 중국에 조성한 재난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대약진, 문혁 등등. 왜 중국인민은 여전히 공산주의를 국가의 영혼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중국은 공산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언제 벗어날까? 어떻게 벗어날까? 아마도 이는 국제대형자본이 가장 주목하는 문제일 것이다. 중국의 노동력품질과 이전의 자본환경은 실로 얻기 힘든 것이었다. 그런 이익은 너무나 유혹적이다. 그러나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에게 그런 유혹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먼저 말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출현은 역사의 필연이라는 것이다. 정치와 철학사상의 발전은 반드시 이런 사상유파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독일에서 뿌리를 내리고, 영국에서 자라는 이런 정치사상학파는 최종적으로 전체 유럽의 동쪽절반을 지배한다. 전체 유럽은 문화적으로 일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게다가 1차대전, 2차대전으로 인하여 공산주의가 소련과 동구를 통치하게 된 것은 정리에 부합하는 현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멀리 동방에 있는 중국은 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가장 성공한 곳이 되었을까? 이 성공은 하나의 대전제가 필요하다. 마르크스레닌주이와 중국의 정치문명이 철학적 유전자의 핵심층면에서 반드시 어느 정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아래에서는 우리가 중국의 종교신앙과 정치의 역사변천과정에서 이 문제를 이해해보고자 한다.

인문주의에서 물질주의로의 변화의 전환점으로 되돌아가 보자. 이 사고는 중국에 사전에 인문주의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국이 물질주의로 진입한 시기도 서방문명보다 훨씬 앞섰다. 물질주의하에서의 정치는 인문주의에 대한 속박과 이질화는 거대하다. 물질주의가 주목하는 것은 만져지는 이익이다. 더이상 신도 아니고, 더 이상 경외도 아니다. 모든 것은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것이어야 믿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인성과 자유등 개념은 더 이상 이런 사상체계에서 고려대상이 아니다. 사람의 자유를 박탈당할 수 있고, 심령을 펼칠 수 없고, 영혼이 날 수 없다면, 사회는 사상층면에서 발전의 원동력을 잃게 된다. 물질주의가 중국에서 나타난 현상은 법가이다. 중국의 법가사상은 제왕의 필수철학이었다. 인문주의는 신성한 광환을 잃었고, 이는 사회사조에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했다. 그렇다면 완전히 정치적이익에서 출발한 법률체계를 운용하는 학파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법가이다. 법가는 국가가 제정한 법률은 바로 강대한 국가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무엇이 천도이고 인도이고, 인륜인지는 법가에서 고려하는 사항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한비자는 일찌기 상나라때의 법령중 길거리에 재를 뿌리면 참한다는 것을 언급했다. 유가에서는 이런 법령은 말이 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법률은 천도나 인도의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법가의 방식으로 진나라는 신속히 강대해졌지만, 백성들은 힘들어진다. 법률과 인성의 충돌은 이런 국가가 오래동안 안정적으로 통치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나라초기, 가의는 이렇게 결론내린다: 인의를 베풀지 않으면 공수의 기세가 달라진다.

유가는 법률합법성의 근원을 천도에서 찾는다. 예악을 숭상한다. 법률의 원천은 하늘에서 온 것이므로 마땅히 정확하다. 그러나 유교의 이런 종교신존는 실제생활에서 집행성이 부족하다. 유가사상은 실제 집행가능한 법률로 전환시킬 수가 없다. 법가는 정반대이다. 법가는 명확한 법률조문을 제정하지만 종교신앙과는 관계가 없다. 천도, 인륜의 구속을 전혀 받지 않는다. 그 목적은 오직 하나이다. 즉 군주가 강대한 국가를 건립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중국문화는 점차 인권을 능가하는 국권의 존재위에서 건립된다. 여기에서 '국권'이라는 개념은 언급했으니 한두마디 덧붙이기로 하자. 필자는 여러 지식인들이 국권이라는 말을 들으면 등골이 서늘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여러 정치인들이 민족감정을 조장하면서 민족주의를 들고 나오는데, 실제로 그들의 본질은 '국권'을 보호하는 것이지, 절대로 '민족주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간단하게 마르크스레닌주의도 아니다. 즉 순수한 국권은 민족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국권을 보호하는 것이다. 중국의 민족주의정권은 있었다. 즉 장개석의 그것이다. 민족유산에 대하여 아주 숭배하였지만, 약점은 지나치게 숭배하다보니 철학적인 공력이 부족했다.

서방사회도 인문주의시대에 물질주의를 이질화했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이다. 공산주의 백여년의 실천과정에서 공산주의가 휩쓴 곳은 비극이 횡행했다. 오직 중국에서만, 몇 차례의 곡절과 고난을 거쳐 결국 세계2위의 경제체를 이루게 된다. 왜 당금 중국에서는 공산주의운동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당연히, 편협한 민족주의정서도 그 중의 한 가지 역량일 것이다. 다만 이런 것은 공산주의와 관련이 없다. 1차대전이후의 역사에서 세계의 대다수정권은 모두 이런 정신무기를 충분히 이용하여 민의를 확보했고, 자신의 합법성을 보호했다. 옛날의 독일, 일본이 그러했고, 지금의 튀르키에도 그러하다. 상대적으로 약소한 한국의 정치인들도 그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절대다수의 개발도상국은 거의 예외없이 편협한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중국은 달랐다. 국민의 민족주의 경향이 있었지만, 예전의 독일, 일본 현재의 한국보다 약하다. 어쨌든 예전에 잘 살다보니 그랬던 것이다. 소위 능력이 모자라면 민족주의를 들고 나온다. 능력이 있는 정치인이라면 민족주의를 꺼내들지 않는다. 민족주의를 들먹이는 것은 정치인의 최대 오점이다. 현재 민족주의가 횡행하고 있는데, 원인은 집권자의 실덕과 무능때문이다. 민족주의는 단지 중국에서는 최우선문제가 아니다. 중국과 공산주의의 결합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법가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정치제도와 공산주의간의 근본적인 공통점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화하문명은 일찌감치 인문시대로 접어들었다. 그것이 복인지 화인지는 알 수 없다. 유가는 "경귀신이원지(敬鬼神而遠之)"하고, 노자는 아예 귀신을 언급하지 않으며, 장자는 귀신을 그저 자신의 인생사고의 도구로 활용했다. 그러나, 유가, 도가의 가장 근본적인 이념은 역시 천도를 경외하고, 사람의 왜소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소위 인법지(人法地), 지법천(地法天), 천법도(天法道), 도법자연(道法自然)이다. 사람은 천도와는 3층의 뛰어넘을 수 없는 문턱이 있다. 이를 보면 그 겸허한 태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현대의 과학성과는 계속하여 이러한 철학적 이해의 깊이를 증명한다. 노자의 가장 유명한 주석가인 한비자는 그 철학적 기본이 많은 정도에서 도가, 노자에서 왔다. 다만 인문주의사상으로 얻어낸 정치철학은 더욱 깊이 이들 사고의 목표를 체현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욕망이다. 젊은 한비자가 죽은 이후, 제왕장생의 욕망추구하에 후세의 정치철학가에게 남겨진 것은 물질주의정치철학의 소묘 위에 색깔을 입히는 공간뿐이다. 한비자의 유가,도가철학의 근본이 정치철학의 바깥으로 격리되었다. 상앙, 오기, 한비자, 이사, 여기에 이후의 가의, 숙손통과 동중서, 여러 철학가와 정치가는 이 물질주의하의 법가정치철학을 완성한다. 그리고 2천여년의 역사축적은 중국민중의 마음 속에 박대정심한 가국정회(家國情懷)를 만들어냈다. 그중 각 단계가 어떻게 인성에 소급되고, 다시 천도에 소급되는지는 이미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일이 되었다. 설사 절박하더라도 정통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 되었다. 북송의 유영이 일파를 이루게 된 것은 그가 꽃과 여자를 읊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통에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는 전체적인 정치인문체계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그는 정통에 부합하는 불사이중(不思而中), 불면이득(不勉而得)의 사고방식의 문제점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우리는 이 방대한 물질주의정치체제를 상층구조층면의 정치구조와 정치철학뿐아니라,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견실한 정치기초인 보통민중의 법가정치철학에 대한 인정과 자아헌신이 있다. 같은 물질주의인 공산주의를 맡났을 때, 그 화학적 반응이 나타나고, 그 격렬한 정도는 공산주의가 다른 어느 국가에서의 상황보다 컸다. 등소평이 말한 것처럼, 공산주의는 중국인민의 선택이다. 겉으로 보기에 강도논리같지만, 실제로는 이치에 맞는다. 모택동의 진시황에 대한 칭찬과 존경도 그 철학층면에서 이치에 맞는다. 즉 양자는 모두 물질주의에 기초한 정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