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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사상

화하문명(5): 주나라의 정치체제와 진나라의 정치체제

by 중은우시 2024. 8. 11.

글: 현야(玄野)

선진(先秦, 진나라이전을 가리킴) 3백년간 제자백가는 국가본체문제에 대해 비교적 철저하게 논쟁을 벌였다. 특히 장자가 전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장자는 노자(老子)의 사변과 철학전통을 이어받아, 정치사상의 측면에서 <마제(马蹄)>편이 비교적 날카롭다. 마제편의 주요내용은 정치이론의 사상에 대한 무궁한 근원탐색이다. 그가 반대한 것은 유가(儒家)의 성인정치(圣人政治)였다. 그건 인성(人性)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성을 가두고 해치는 것이라고 보았다. 소위 "훼도덕이위인의(毁道德以爲仁義), 성인지과야(聖人之過也)"(도덕을 훼손하는 것을 인의라고 여기는 것은 성인의 잘못이다). 작자는 당시의 정치사상가를 말조련사와 비교했고, 보통백성을 말에 비유했다. 이 비유는 조금 과장된다고 할 수 있다. 말조련사와 말 사이의 차이는 물종의 층면이고, 통치계급과 민중의 차이는 사회역할층면으로 장기간으로 보면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후세의 정치발전은 그러나 유감스럽다. 진나라는 우민정책으로 통치계층과 백성은 완전히 불평등했고, 국가의지의 중요성이 민중이익보다 우선되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국가의 도구로 전락했고, 평등같은 것은 얘기할 것도 없게 된다. 또한 사람의 자신의 본성에 대한 추구와 유지는 말할 수도 없게 된다. 장자철학이 제창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본성과 본심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다. 법가는 그러나 사람은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하고, 철저히 자신은 버려야 한다고 본다. 마제폄은 법가를 공격하는데 비교적 적합하다.

외유내법(外儒內法)의 정치체제하에서 유가의 종교적 의미는 비교적 농후하고, 사람들을 위해 길을 잘 마련해두는 것이다. 사람들이 각자의 길에서 자신의 본심을 찾도록 건의하지 않는다. 확실히 장자의 공격에 대하여, 유가는 억울할 것이 없다. 그러나 법가는 더욱 나갔고, 국가의지를 우선했으며, 사람은 모두 국가의 도구가 되어 버렸으며, 사람의 영혼이 추구하는 것은 모두 한가한 일들이 되고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므로 반드시 억제되어야 했다. 그러나, 어쨌든 사람의 정신세계는 아주 강력한 흡인력이 있다. 설사 정치체제가 용납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중국의 역대 성철(聖哲)들은 할 수 없이 세상을 떠난다는 기치를 내걸고 정신세계를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는 원래 하나인데, 무슨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있을 것인가. 문제는 중국전통의 정치체제에 있다. 그 국가의지는 모든 것을 포괄하고, 개인의 의지는 존중받지 못한다. 그러나 도가는 사람의 본심, 본성에 대한 추구를 국가의 이익에 대한 복종보다 중시했다. 이것은 법가의 정치철학이다. 그 목적은 바로 국가를 강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국가는 특정한 사람들이 모든 사람의 근본이익을 달성하기 위하여 성립된 조직이다. 국가가 존재하는 목적은 국가의 개개인의 이익을 달성하는 것이다. 이 각도에서 분석해보면 아주 분명해진다. 원래 현대서방사회에서는 개인의 정신적인 추구를 광범위하게 할 수 있지만, 중국의 법가정치철학에서는 반드시 세상을 떠난다는 명목하에서만 가능했던지가. 여기의 "세상"은 당연히 자연의 세계가 아니라, 국가의 정치체제를 가리킨다. 이 정치체제하에서, 여하한 사람의 총명과 재지도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사마염(司馬炎)이 이밀(李密)을 태자사마(太子司馬)로 불렀을 때, 이밀은 죽을 힘을 다해서 진정표(陳情表)를 써서 올리고 진무제가 읽고 눈물을 흘리고서야 비로소 집에 남아 상을 치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황명을 거역한 죄로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국가에 힘을 바치는 것을 거절할 수 없는 의무가 있다. 현대의 병역의무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하에서 그저 세상을 떠난다는 것으로 그런 곤경을 회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법가정치체제는 개국초기에 확실히 거대한 정치적 역량을 응집시킨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사회집단의 개개인의 물질적인 이익과 정신적인 추구는 국가의 목표가 아니다. 사람들은 원래 특정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할 수도 없게 되고, 정신도 발전시킬 수 앖으며, 여러 인재들의 심령이 안정을 찾고, 위로받을 수도 없다. 사람의 개성은 갇혀버리고, 사람의 창조력은 점차 약화된다. 사회의 전체적인 발전도 점차 고갈되어 버린다. 그래서 이러한 정치체제는 일반적으로 오십년이면 쇠퇴를 맞이하고, 백년이 지나면 죽음의 기운이 넘치며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되는 것이다.

국내외문화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즉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했고, 진시황은 중국의 최초 황제라고. 그가 처음 황제를 칭한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을 통일했다는 주장은 황당무계하다. 먼저, 황제를 칭한 것은 뭐 좋은 일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전에 하상주의 군주는 그저 왕으로 칭했고, 제(帝)라는 칭호는 신에게만 붙였다. 그런데 진시황에 이르러서는 왜 칭제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천지에 대한 경외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하고 싶은대로 하고, 더 이상 하늘의 징벌을 겁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하늘의 징벌은 엄중하고 빈번해졌다. 중국을 통일한 일은 있었지만, 그것은 예악이 붕되되는 전국시대라는 배경하에서 일어난 통일이다. 즉 소위 '분구필합(分久必合), 합구필분(合久必分)'일 뿐인 것이다. 하왕조는 문자를 남기지 않았다. 그 통치강역은 하락평원(河洛平原)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상왕조는 변방부락과 정벌전쟁을 벌였고, 비록 전차(戰車)가 천리를 이를 수 있었지만, 통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지역은 진령(秦嶺), 회하(淮河)이북 황하하류부분의 발달한 지역일 뿐이었다. 그리고 주왕조에 이르러, 전투력이나 정치철학등의 방면에서 전승하고 학습하며 역사교훈을 흡수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국가는 여러 층면에서 보다 성숙한다. 실제로 장기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정치체제구조를 갖추었다. 주를 종주국으로 하는 제후국이 북으로는 연(燕)이북의 기자조선(箕子朝鮮)부터 남으로는 오월형초(吳越荊楚)까지 이른다. 그 강역은 진나라보다 적지 않았다. 구별이 있다면, 주나라의 통치는 비교적 느슨하여 위로는 왕제후로부터 가운데로는 경상사대부(卿相士大夫), 그리고 아래로는 산과 들의 촌민들까지, 각각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침범하지 않았다. 동시에 서로 상대방의 권리를 보호했다. 이런 정치구조하에서는 강대한 국가의지가 형성되지 않는다. 진나라이후의 중국정치체제는 다르다. 황제는 지고무상의 권력을 갖고, 더욱 관건인 것은 나라의 모든 사람이 국가를 위해 봉사할 의무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이는 강대한 국가의지를 형성한다. 그래서, 진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시작이 아니라, 법가사상을 입국의 근본으로 삼은 시작일 뿐이다. 권력집중정치의 시작일 뿐이다. 2천여년간의 발전을 거쳐, 민중의 생활과 과학기술 및 국제환경층면에서 이미 천지가 뒤바뀌는 변화가 발생했는데, 정치핵심은 여전히 예전과 같았고, 한비자의 법가체제를 벗어나지 못했었다. 원래 이건 아주 의문스러운 현상이다. 필자는 우리가 이미 서방민주자유정치체제가 법가정치체제보다 우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우리는 법가정치체제가 당대세계에서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지에 대하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본다.

주나라때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일을 하고 각자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건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사회안정에 유리하지만, 사회계층의 고착화라는 불리한 점도 있다. 사람은 지혜와 근로를 통해 부를 획득할 수 있지만,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바꾸기는 어렵다. 진나라이후 사회변혁이 아주 컸다. 사람의 사회적 지위는 더 이상 고착화되지 않고, 동시에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한다. 황제라는 칭호의 탄생은 사람의 하늘에 대한 경외심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내가 옳다고 여기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법가사상에 기반을 둔 중앙집권정치체제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춘추전국시대부터 시작하여 한무제시기에 이르는 수백년의 시간동안 여러 엘리트들의 아이디어를 다듬은 것이다. 그리고 각국에서 실제로 추진하고 전쟁을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형성되었다. 상앙(商鞅)은 어민수단(馭民手段)에서, 숙손통(叔孫通)은 예악의식(禮樂儀式)에서, 동중서(董重舒)는 종교사상에서, 한비자(韓非子)와 가의(賈誼)는 논리사고와 정치이론방면에서 이런 방대한 체계를 구축한다. 당연히 정치체제의 형성은 자연히 제왕의 선택권과 관련된다. 진효종, 진시황 그리고 한무제는 각자 시대의 최종결정권자였다. 그러나 관중(管仲), 자산(子産)등이 법률층면에서 한 역할은 국가를 원시적이고 모호한 법률체계에서 집행가능한 명문법률체계로 발전시킨 것이고, 중앙집권정치체제의 법가사상을 만든 것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중국의 이러한 법가사상에 기초한 중앙집권정치체제는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이런 강대한 하나의 국가의지는 정치가 깨끗할 때에는 주변지역에 상당한 힘을 가진다. 그러나 정치가 어두운 시기에는 쉽게 내부의 상호투쟁이라는 재난에 빠져들 수있다. 가장 근본적인 위해는 언론자유의 소실이다. 이는 문화발전에 치명적인 상해이다. 역사를 살펴보면,가의 이후, 중국에 내세울만한 정치이론가가 나타나지 않았다. 문화예술은 아주 찬란했지만, 정치이론방면에서는 그저 틀이 잡혀진 내에서 돌고 도는 수준이었다. 인구는 열배 백배 늘어났지만, 정치이론사고방면에 재능있는 사람이 열배 백배 늘어났지만, 이천년이 흐른 지금까지 중화대지에는 그런 재능이 완전히 말살되어버린다. 사상이 자유를 잃으면서, 중앙집권정치체제는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정통이 되고, 당금정권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정치이론가의 주업이자 정업이 되어버린다. 정치이론분야는 금기분야가 되어 사막화되어버린다. 중앙집권정치체제는 정치사상과 형이상학적 종교철학사상의 종결자이다.

주나라의 사회구조와 비교하여 말하자면, 진나라이래 지금까지의 중앙집권정치체제하의 사회구조는 사람의 사회계층이 더 이상 고착화되지 않게 되었다. 이는 좋은 변화이다. 사람들은 모두 요순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변화의 또 다른 일면은 바로 사람이 더 이상 각자의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자신의 몫을 지키려고 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사람이 불안정해진다. 진승이 말한 것처럼,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느냐?"

주나라사회의 각자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아주 좋은 특징이다.다만 당대에 만일 주나라제도로 돌아가 각자 자신의 자리를 지키도록 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불필요하다. 공자이래 교육은 갈수록 사회의 행위를 일치시키고, 모든 사람이 교육을 받을 권리에서는 이론적으로 균등해졌고, 당금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나 가족적 배경이 다르다고 하여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없어졌고, 사람들이 배우는 영역은 주로 개인의 재능과 흥미 그리고 어떤 인연에 따른 것이 되었다. 지금 대다수의 비교적 선진적인 국가는 모두 학자금대출제도가 있다. 학습기회의 균등은 더욱 보편적이 된다. 여기에서는 집권자의 사심으로 만들어낸 출신성분론은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그건 정부범죄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사회구조는 더 이상 주나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다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전통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먼저, 사유재산신성불가침의 철칙을 확립해야 한다. 소위 재산은 공유로 할 수 없고, 권력은 사유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동시에 사람은 서로 다른 직능에서 사로 다른 지위와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느 관리의 직위가 아주 높다고 하여 관리의 보고를 받고 의사결정할 때 그는 반드시 강산을 손아귀에 넣을 기백과 위엄이 있어야 한다. 어쨌든 그에게는 조금만 잘못하면 수천수백만의 생활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를 경외하도록 요구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사람들은 민중이 복지에 대해 경외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동시에 그는 아마도 어느 아이의 부친이나 모친일 것이다. 아이를 기르는 과정에서 각종 힘든 일과 더러운 일도 반드시 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각 교육단계에서 부당한 점이 있으면 선생이나 교육자로부터 시정을 받아야 한다. 고위관료여서 모두 자신의 지휘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이의 선생도 반드시 자신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필자가 말하는 각자가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대체로 고대의 주나라와 일치하게 된다. 현대에는 명확하게 분업, 협력하는 사회이므로 각자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것은 서로 다른 모습이다. 먼저, 개인재산의 불가침이고, 다음으로, 개인의 사회역할에 대한 존중은 주로 그 사회의 직능에 대한 존중이지, 그 독립된 사람에 대한 존중은 아니다. 법정에서 법관에 대한 존중은 절대로 모 법관 개인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법관의 뒤에 있는 법률체계에 대한 존중이듯이. 다른 방면에서 예를 들어, 개인감정, 친구간의 우의, 부모자녀간의 애정등등이 있다. 사람은 각 방면에서 처한 역할이 서로 다르다. 즉 자신의 여러 역할을 서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어느 사람이 정치 혹은 경제활동에서의 역할과 지위를 가정관계에 옮겨오게 된다든지, 그 반대같은 것이 그것이다. 춘추시대에 진나라의 기해(祁奚)는 일찌기 내거불피친(內擧不避親), 외거불피구(外擧不避仇)의 방식을 썼다.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이 자신의 사회내에서의 서로 다른 역할내에서 그 본분을 지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나중에 중국은 정치적으로 통일을 이루었지만, 철학적으로는 직관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생각지도 않고 중용을 선택하는 등으로 인하여, 이 층면의 논리분석은 더이상신진행되지 않게 된다.

이런 사회적 기초를 달성한 후에 사회지위와 사회직능이 서로 결합하면, 개개인에게 고착화되지 않을 것이다. 이 사회의 직능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고, 사회는 더 이상 계층으로 고착화되는 우려가 없게 될 것이다. 동시에 개인재산은 엄격히 보호되고, 재산방면에서 모든 사람은 각자의 본분을 지키게 된다. 감정과 우의측면은 모호한 지대이다. 상호인식과 묵계의 문제이다. 이런 3가지 관계는 3가지 서로 다른 논리망모형이다. 흥미있는 사람들은 한번 종합적으로 생각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