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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사상

중국인은 왜 "정치적 올바름(PC주의)"에 반감을 가질까?

by 중은우시 2024. 8. 1.

글: 노패악곤(老牌惡棍)

이번 파리올림픽 개막식은 현대올림픽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기장을 실내에서 실외로 옮겨놓은 것뿐아니라, 내용과 형식에서 현지예술, 인문특성과 사회의제를 결합시켰다.

관중으로서 나는 상당히 성공했다고 본다. 심지어 사회의 진보와 발전은에 따라 아마도 올림픽 역사상의 이정표로 꼽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개막식에서 이런 탐색과 시도는 반드시 리스크를 동반하게 되고,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국제적인 논쟁은 여기서 언급하지 않도록 하자. 왜냐하면 이 이슈를 놓고 이미 오랫동안 논쟁이 지속되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비교적 흥취를 느낀 점은 중국관중들의 개막식을 본 후의 반응이었다.

중국내에서 개막식에 대한 견해는 "차마 눈뜨고 못보겠다(辣眼睛)", "역사상 가장 엉망진창인 개막식"이라는 것이 위주였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유형의 사람들은 단순히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다. 베이징올림픽과는 너무나 수준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둘째 유형의 반감은 개막식에서 화면을 가득 채우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때문에 좋게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자는 이해가 쉽게 된다. 개인들의 심미관이나 문화차이 혹은 문화보수주의로 인하여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할 것은 아니다. 여기서 주로 얘기할 것은 중국내에서 최근들어 성행하고 있는 후자이다.

먼저 한 가지 보편적인 오해를 해명하고자 한다. 중국내에서는 서방의 "정치적 올바름(PC주의)"을 얘기할 때면 왕왕 중국의 "정치우선(政治掛帥)"와 나란히 얘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전형적인 망문생의(望文生義)이다. 마치 <사회계약론>을 읽고 계약정신을 논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양자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ly correct)"라는 단어가 최초로 나타난 것은 1930년대이다. 그 내용과 대상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1980년대이후에는 주로 "사회의 특정집단구성원들을 비하하거나 해치는 것을 막자"는 정책을 의미한다. 매체에서는 왕왕 폄하하는 의미로 나타난다. 어떤 행위 혹은 정책이 과도하거나 무리하다는 식으로.

서방에서 "정치적 올바름"에 반감을 가진 사람은 주로 두 부류이다: 하나는 백인인종주의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차별의식은 없지만 언론자유가 파괴된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자들이다. 전자는 주로 인종차별발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때문에 불만을 가지고, 후자는 언행이 과도하게 해석되어 사회적 압박을 받게 된다는 우려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서방의 주류사회는 "정치적 올바름"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그중 지나치게 바로잡으려는 부분들이다.

그럼, "정치적 올바름"에 반감을 가진 중국인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백인도 아니고, 흑인처럼 외국에서 쉽게 차별대우를 받을 수 있는 아시아계이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도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은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다.

그러므로, 이치대로라면, 그들은 '정치적 올바름'에 반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지해야 한다. 그게 아시아계인 그들에게는 더 유리하기 때문에.

아주 간단한 사례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중문명 瞬息全宇宙)>가 오스카상을 휩쓴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영화드라마계는 일찌기 서방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곳중 하나였다. 아시아계의 지위는 아프리카계보다 못했다. 그저 악인역할이나 감초역할밖에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일부 아시아계 심지어 중국계는 서방영화의 최고무대에서 최우수영화상, 최우수여우상, 최우수감독상 등을 포함한 여러 상을 받고 있다. 작품 자체가 뛰어난 것외에 서방사회에서 지난세기부터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운동의 공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여기의 "정치적 올바름"은 많은 사람들이 억측하는 것처 '아시아인의 목숨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종차별관념을 점진적으로 시정하는데 기인하는 것이다.

기실 이전에 이 영화는 이미 국제영화계에서 300여개의 상을 밧았고, 300여번 후보에 올랐다. 영화평론가이건, 관중이건 모두 이 영화를 아주 높게 평가한다. imdb상 54만명의 평가점수는 8.0에 가까운 높은 점수이다.

이는 이 영화의 성공이 단순히 아시아계를 내세워서 헐리우드로부터 우대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단순히 아시아계에 대한 차별의식이 약화되면서 영화자체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것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것은 2000년의 <와호장룡>이다. 당시 아시아계에 대한 보편적인 차별이 있어서, 원래 최우수여우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양자경(楊紫瓊)은 아예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했다.

실제로 아시아계(중국인과 해외의 중국계를 포함)들이 서방에서 생활하고 일하면서 받는 차별이 줄어든 것은 '정치적 올바름'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백인인종주의자들의 엉덩이뒤를 따라가면서 자신과 동포들이 혜택을 보는 운동을 함께 반대하고 있다니,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차별을 받을 때에는 불만과 항의를 하다가, 어렵사리 차별이 줄어들게 되자 다시 거기에 반감을 가지다니, 듣기 좋은 말로 하자면 자존감이 낮은 것이고, 듣기 거북한 말로 하자면 비천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알아볼 수 있다. 많은 중국인들은 기실 자신의 동포들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말하는 차별반대는 그저 반미일 뿐이다. 이 핑계거리를 잃고나면 다시 평등에 반대한다. 그러므로, '정치적 올바름'이 그들의 심미관이나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 예를 들어, 성취향, 흑인, 이사아계, 성차별등이 전면에 나타나게 되면, 뿌리부터 남아 있는 차별의식이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고 그저 입으로 튀어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지역차별, 사회진화론, 여성혐오집단과 고도로 중첩된다.

당연히 이걸 모두 그들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사회발전수준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으니까.

엄격히 말하자면, 중국은 아직 전형적인 전현대사회(前現代社會)에 처해 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는 의식주행이다. 취업압력이고, 업무경쟁이다. 그러나 선진국은 이미 포스트공업시대로 접어들었고, 포스트모더니즘사조가 유행하고 있다. 사회이슈도 여성평등, 성취향, 환경보호, 동물학대등이다.

게다가 민족주의와 보수관념으로 서방사회를 이해하려고 하면, 그건 치인설몽(痴人說夢)이다. 이는 왜 중국내에서 "고도의 복지는 게으름뱅이를 키운다"는 말이 나옥, "정치적 올바름은 바로 흑인의 목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서구좌파는 허위의 앵글로색슨이다."라는 기괴한 주장들이 유행하는지를 설명한다.

어쨌든 낙후된 사회형태에 국한되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선진국의 각종 사회집단간에 존재하는 다원성과 합리성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생활하는 사회환경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면 얻어낸 답은 반드시 남원북철(南轅北轍)로 터무니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이렇게 비유해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이 시간여행을 통해 청나라로 되돌아가서 이홍장(李鴻章)에게 우리는 이미 황제가 없고, 사서오경도 배우지 않는다. 장포마괘도 입지 않고, 삼강오륜도 믿지 않으며, 남존여비도 없다고 말해준다면, 그는 아마도 인지불균형으로 그 자리에서 혼절해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