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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사회

청년양로원(靑年養老院): 중국의 새로운 괴현상

by 중은우시 2024. 7. 10.

글: yitaotv(一條)

금년에 "청년양로원"이 급속히 유행하고 있다. 정저우(鄭州), 윈난(雲南), 충칭(重慶), 허페이(合肥)등지에서 생겨나고 있는데, 나타나자마자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젊은이들이 분투하지 않고 양로한다고? 양로원은 과연 젊은이들에게 걱정거리가 없이 탕핑(躺平)생활을 누리게 해줄 수 있을까?

젊은이들이 청년양로원에서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6월중순, 필자는 윈난 만디우고촌(曼丟古村)의 '청년양로원'을 현지탐방했다. 우리는 그것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사람들에게 장기간 거주나 요양을 제공하는 기구도 아니고, '유스호스텔'과도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창립자인 루바이커(盧柏克)는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주로 두 가지 유형이라고 말했다: "하나는 자유직업자이고, 이곳에 와서 사교기회를 늘이려 한다. 다른 하나는 업무나 생활에서 병목을 맞은 젊은이로 조정이 필요해서 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출발하려 한다."

청년양로원의 일상적인 모습

우리는 또한, 3명의 이미 입주한 젊은이들과 그들의 장기 혹은 단기간의 거주체험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90후의 샤오우(小武)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그에게 있어서 양로원일 뿐아니라 더욱 병원이라고.

이하는 윈난의 청년양로원 창립자 루바이커(盧柏克)의 말이다.

우리 청년양로원은 45세이상은 받지 않고, 일한 적이 없는 사람도 받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직장의 걱정도 없고, 가정의 갈등도 없으며, 그저 '하고싶은대로 하면' 됩니다.

나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청년양로원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이전에 군대에 있었고, 군대에서 나온 후 북경에서 10여년간 여러가지 일들을 했습니다. 항상 청년들과 얘기하면서 청년들이 어떤 방식으로 생활해야하는지를 생각해왔습니다. 신문에서 일부 청년들이 노인양로원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양로원의 사람들을 젊은이로 바꾸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청년양로원"을 개업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조롱, 의심과 무시를 받았습니다. 노인들은 우리가 시간낭비한다고 여겼습니다. 청년들이 무슨 양로냐, 제대로 된 일이나 하라고. 일부 중년인들은 이건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신과 가정에 책임지지 않게 만들어 사회의 기생충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다만 나는 현재의 젊은이들이 이 시대에 스트레스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택대출금, 차량대출금 혹은 일상소비압력에서 숨도 쉬지 못할 정도라고 여겼습니다. 사람은 휴식이 필ㄹ요합니다. 젊은이들은 분투해야할 뿐아니라, 균형을 갖춘 생활을 해야 합니다. 탕핑하고 싶을 때는 탕핑해야 합니다.

2022년 10월, 이 일을 해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나는 최저의 가격으로 휴식하고 싶은 젊은이들이 편안한 환경하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장소를 시쌍반나(西雙版納)의 만디우고촌으로 정했습니다. 첫째는 비용을 줄일 수 있어서이고, 둘째는 시쌍반나의 환경이 양생의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산과 이 있고, 주변의 촌민들도 아주 순박합니다.

청년양로원의 전신은 학교기숙사였습니다. 임대료는 1년에 8만위안입니다. 개조하기 전에는 쓰레기로 가득했고, 형편없었습니다. 낡은 건물을 개조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풀을 뽑고, 나무를 심고, 구조를 개조하는 것까지 모두 스스로 했습니다. 결국 비용은 모두 45만위안이 들었고, 12칸의 방을 개조했습니다.

공간은 모두 700평방미터정도이고 아래위 2층이며, 2층에는 베란다가 있어, 문을 열고 창을 열면 경치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방을 아주 크게 만들었습니다. 6,7명이 동시에 서 있을 수 있도록. 평상시에는 소그룹으로 먹거리를 사서 식사를 만듭니다. 소비는 사람수로 나누어 분담합니다. 같이 식사하고 싶지 않으면 따로 먹어도 됩니다.

처음 청년양로원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돌을 만져가면서 시내를 건너는 것같았습니다. 침대 하나, 하나의 공간까지도 젊은이들이 이 곳에 와서 불편하지 않게 애썼습니다.

청년양로원은 현재 1년여간 운영해왔고, 상주인원은 10-15명입니다. 입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90후입니다. 일부 00후도 있고, 80후도 있습니다. 원래 자유직업자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결과적으로는 출근족들이 더욱 많이 옵니다. 그들 대부분은 잠시 쉬면서 잘 휴식하려는 것입니다.

이곳에 들어오려먼 조건이 있습니다. 45세이상인 사람은 이곳에서 사람들과 사귀지도 못하고, 많은 경우 며칠 못있다 떠났습니다. 그들은 빨리 돌아가서 가족들을 먹여살려야 합니다. 그래서 이곳에 온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나와 단 하루도 직장생활을 해보지 않고 바로 탕핑하려고 하면 우리는 이곳에 오지 말도록 권합니다.

비수기에 들어오려면 한달에 1,500위안가량입니다. 우리는 '의공환숙(義工換宿)'도 제공합니다. 즉 약간의 청소위생작업을 하는 것으로 숙비를 대체하는 것입니다. 이는 나의 이전 경력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나는 가진 것이 100여위안이 되지 않았는데, 중국을 무전여행하기로 했습니다. 베이징에서 출발하여 중국을 다 돌았습니다. 그동안 단기간 알바를 하면서 다음 목적지로 가는 비용을 마련하였습니다.

청년양로원에 온 젊은이들은 대다수 핸드폰을 끕니다. 그들은 컴퓨터도 보지 않습니다. 이 기간동안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사람들과 다 털어놓고 교류합니다.

대다수는 7시경에 일어나서, 조깅을 하면서 운동하고, 소수는 정오까지 잡니다. 우리는 활동을 조직하기도 합니다. 팔단금(八段錦)도 하고, 농사도 짓고, 폭포까지 걸어가기도 하고, 권투를 배우거나, 모두 같이 좌선을 하기도 합니다. 저녁에는 음악회를 열기도 하고, 기타를 치고, 북을 두드리기도 합니다.

이전에 왔던 일부 화이트칼라들은 함께 농사를 지을 때, 처음에는 토지에 대해 배척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일단 발을 진흙에 담그고 나면 바로 자신을 놓아버리고, 풀모자를 쓰고 밭에서 하루종일 즐겁게 지냈습니다. 우리는 삼륜자전거를 타고 가서 과일을 따기도 합니다. 원래 모든 물건은 돈을 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농민들은 아주 친절합니다. 우리집 과일 하나를 먹는 것에 불과한데 왜 돈을 받아야 하느냐? 대도시에서 항상 돈으로 모든 것을 바꾸던 사람들이 이런 시골의 환경으로 돌아오게 되면,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는 청년양로원이 반영하는 것은 기실 젊은이들의 새로운 정신적 추구라고 봅니다. 일도 하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집도 사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으면서 저욕망시대로 접어들었는데, 그들에게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한 것입니다.

동시에 빠른 리듬의 사회에서, 많은 젊은이들은 고독과 귀속감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집단활동과 지역생활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과의 연결을 증가시킵니다. 90후의 독생자녀세대들이 미래에 직면할 양로문제에 대하여 청년양로원은 모두 미리 '포단취난(抱團取暖)'을 시험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도시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이 7일, 20일간 투숙하고, 다시 원래의 생활과 업무상태로 돌아갑니다.

이전에는 '양로'라는 말을 꺼내면, 모두 일종의 '타락'이라고 여겼습니다. 현재 우리는 양로를 일종의 적극적으로 향상하려는 생활태도로 전환시키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이 자신의 마음에 안정을 찾고, 더 나은 출발을 할 수 있도록.

2. 아래는 세 명의 양로원에 들어온 젊은이들의 말입니다.

쥬샤오텐(邱小天) 90후 개인미디어에 종사하고 있고 쓰촨(四川) 청두(成都)에서 왔다.

내가 청년양로원에 와서 가장 기쁜 것은 바로 아무도 내가 한 일이 옳은지 그른지 평가하지 않는 것이고, 아무도 나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재촉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오늘 산보를 다녀왔는데, 비를 맞았지만 아주 즐거웠다.

나는 개략 2022년에 왔었고, 반년간 투숙했다. 금년 6월에 다시 왔다. 처음에 가족들은 내가 '청년양로원'에 가겠다고 했을 때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나도 양로원에 가는 것이 싫은데 네 나이는 한창 분투해할 때인데 네가 무슨 양로원에 가느냐고 말했다.

여기에 오기 전에, 나는 2년간 직장을 다녔다. 하던 일은 행정업무이고, 매일 같은 일이 반복되어서, 끝까지 이렇게 살아야할 것같았다. 사직후에 나는 스스로 인터넷에 영상을 올리게 되었고, 윈난을 왔을 때 처음 청년양로원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규칙을 잘 지키면서 자랐고, 지금 나이가 되니 부모로부터 결혼독촉도 아주 심하다. 엄마는 항상 너는 졸업했으니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일을 먼저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집으로 가서 연말연시를 지낼 때면 한해 한해 스트레스가 커져갔다.

지금 나는 이미 오랫동안 컴퓨터를 켜지 않았다. 가끔 핸드폰으로 가족, 친구들과 연락할 뿐이다. 나는 내가 지금 아주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항상 외식을 했는데, 지금은 스스로 밥을 해먹는다. 이전에는 아침에 일어날 때 알람 소리를 들으면서 일어났는데, 지금은 새소리를 들으면서 일어난다. 사람이 훨씬 상쾌해진 것같다.

나는 여기에서 잠시 쉬려는 것이다. 영원히 탕핑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인생을 한번 정리해보고,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아내려고 한다. 금년 연말에 나는 다시 출발할 것이다.

룽젠핑(龍建平), 80후, 도예사 윈난 쿤밍에서 왔다.

나는 청년양로원에서 나이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다른 90후들과는 상태가 조금 다르다. 일반적으로 나는 7시경에 일어나서, 차를 한잔 마시고, 혼자 조용히 책을 본다. 어떤 때는 도자기를 만들고, 어떤 때는 흥미가진 친구들에게 도기를 만드는 법을 간단하게 가르치기도 한다.

이전에 도시에 있을 때는 비교적 시끄러웠다. 집안에서 매일 아이와 지냈고, 창작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이곳은 훨씬 조용하고, 잡다한 일은 잠시 내버려두고 완전히 도자기를 빚어 창작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이곳은 비록 '양로원'이라고 하지만, 내 생각에 이곳은 젊은이들과 부딛칠 수 있는 곳이라고 여긴다. 90후는 비교적 움직이기 좋아하고 아주 활발하다. 함께 비교적 신선한 일들을 접촉할 수 있다. 나는 평상시에 의견을 표시하거나 교류하는 걸 잘 못한다. 이들 90후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듣고, 나의 아이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아이를 교육하는데 있어서의 생각변화가 비교적 크다. 이전에는 내가 아이와 함께 있을 때 비교적 엄숙했지만, 지금은 훨씬 부드럽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아이가 좋아하고 유행하는 걸 알아보려고 한다. 나는 1,2주 정도 머물 생각이고, 9,10월에는 처를 데리고 함께 올 생각이다. 그녀도 느껴볼 수 있도록.

샤오우(小武), 90후 전 국유기업직원, 베이징에서 왔다.

이곳은 양로원일 뿐아니라, 나에게 있어서 이곳은 '병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이곳에 상주하는 쪽이다. 이곳은 천성에 따라 행동하며 끝없는 즐거움을 느끼며, 나는 '1인'에서 'E인'으로 바뀌었다.

나는 이전에 군인이었고, 퇴역후에는 계속 국유기업에서 일했다. 베이징에 정착한지 10여년이 지났다. 한 도시에 그렇게 오래 있다보니, 교류범위가 점점 국한되고, 나중에는 결국 아주 고독해지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게 되었다.

북방은 겨울이 아주 춥다. 2022년에 나는 구정을 보낸 후 기분전환을 위해 이곳저곳 다니다가 우연한 기회에 이곳을 오게 되었다. 당시 양로원은 초기였는데 나는 양로원에 노인이 없다는 것이 기괴하게 여겨졌었다.

당시 사람들은 모닥불을 둘러싸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처음에 나는 매우 어색해하고,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다. 다만 그들은 내가 낯선 사람이라는 것에 개의치 않고, 나와 술잔을 부딛치고,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돌연 나는 마음이 열렸고,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주변 마을의 작은 집을 하나 빌려서 청년양로원이 완공되기를 기다렸다. 건설과정에서 문, 창, 죽렴같은 것들을 고르는 것을 도와주었고, 양로원이 완비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일종의 성취감을 느꼈다.

청년양로원에서 있으면서 일이 있으면 나가서 처리한다. 돌아오면 모두가 이곳에서 기다려주고 있다. 이런 느낌은 아주 친근하다. 미래 어느 날, 나는 분명 이곳에서 나갈 것이다. 그리고 다시 어떤 일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 되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