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역사상적괴점(歷史上的拐點)
"토목보지변"은 명나라 수십년간 축적한 국력을 하루아침에 모조리 날려버린 사건이다. 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문신, 무장, 병사들이 부지기수였다. 이 전쟁은 명나라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후 명나라는 다시 대규모로 병력을 일으켜 몽골을 공격하지 못한다.
알아야 할 것은 이때는 명나라가 수십만대군을 일으켜 몽골을 친지 겨우 25년이 지난 때였다. 그리고 이 비극을 일으킨 것은 바로 왕진이었다.
천순(天順)원년, 명영종(明英宗)은 왕진의 관직을 회복시켜주고, 영예롭게 장례를 치러주고(의관총), 왕진을 위해 사당을 지어 기념한다. 지금도 그 사당은 남아 있는데, 바로 베이징의 지화사(智化寺)이다.
"왕진에게 제사를 지내고 장례를 지내도록 하고, 사당을 세워주었다(賜王振祭葬, 立祠)"(<명사.왕진전>)
알아야 할 것은 왕진은 간신으로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치 않다면 "토목보지변"이후에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모조리 주살당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주살당한 사람에는 금의위지휘사(錦衣衛指揮使) 마순(馬順)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그는 분명히 처형당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조카인 왕산(王山)이 그를 대신하여 사형에 처해졌는데, 그 사형도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바로 능지(凌遲)였다.
왜 여러 신하들이 왕진을 이렇게 싫어했을까? 왜냐하면 토목보지변을 그가 일으켰고, 토목보지변은 바로 그가 잘못 군대를 지휘하여 발생했기 때문이다.
정통(正統)14년, 예센(也先)은 먼저 병력을 넷으로 나누어 요동, 감숙, 선부(宣府), 대동(大同)으로 명나라를 친다. 그전에 몽골과 명나라는 서로 싸우지 않고 지냈었다. 그런데 왜 몽골이 이 떄 명나라를 치게 되었을까? 이걸 알려면 왕진이라는 인물을 이해해야 한다.
명나라와 몽골은 호시정책(互市政策)이 있었다. 소위 '호시정책'이라 함은 명나라가 정기적으로 변방으로 가서 몽골과 교역하는 것을 말한다.
어쨌든 몽골은 수공업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솥, 그릇, 바가지, 대야같은 생활필수품을 명나라와 교환해서 얻지 않는다면 빼앗을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도 그 점을 인식하여, 몽골과 교역을 해서 교환한 것이다. 그렇치 않으면 명나라의 대신들은 죽어도 몽골과 교역하지 않았을 것이다. "융경의화(隆慶議和)"가 아주 좋은 예이다.
왜냐하면 첫째, 몽골은 계속하여 명나라에 위협이 되었고, 둘째, 명나라의 대신들은 자신은 문화인이고 몽골은 야만인이라고 여겼다. 한마디로 말해서 무시했다.
이런 말이 있다. "한손으로 돈을 건네고, 다른 손으로 물건을 받는다" 다만 정통14년의 거래에서 몽골은 겨우 1/5의 대금만 받아가게 된다. 그럼 나머지 4/5는 어디로 갔을까? 바로 왕진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던 것이다.
왕진은 왜 몽골의 돈을 챙겼을까? 그것은 예센이 그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전에 몽골은 매번 명나라와 교역을 할 때마다 예센이 왕진에게 뇌물을 바쳤다. 이를 통해 교역이 순조롭게 진행하고자 한 것이다. 왜냐하면 몽골의 소, 양과 말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센은 몽골을 통일하였으므로 충분한 무력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점점 품질이 떨어지는 소, 양과 말을 상품의 소, 양과 말인 것처럼 교역했던 것이다. 이 정도로 성의가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변경으로 가는 사신들의 일행중에는 많은 강도들도 끼어들었고, 도중에 계속 강탈을 당했다.
명나라는 일찌감치 몽골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몽골은 확실히 강대했기 때문에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건 왕진이 고려하는 범위내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너 예센이 이렇게 세상의 흐름을 알지 못한다면, 내가 간상이 된다고 해서 뭐라고 하지 말라. 어쨌든 나에게는 명분이 있으니까.
만일 예센이 몽골을 통일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명나라와 협상을 하려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몽골을 통일했다.
게다가 이때는 원나라가 멸망한지 100년도 지나지 않았고, 원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은 몽골인들의 꿈이었다. 그리하여 명나라가 정말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시험해볼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원래 명나라는 어가친정(御家親征)까지는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몽골이 동원한 대군은 10만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나라는 영락제때부터 내려온 명장들이 남아 있었다. 예를 들면 장보(張輔)같은 무장이 있었다.
다만 명영종은 굳이 어가친정을 하겠다고 결정한다. 이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왕진이다.
왕진은 비록 태감(太監)이었지만, 의지는 굳었고, 우상도 있었고, 꿈도 있었다. 그의 우상은 바로 명영종의 증조부인 영락제 주체(朱棣)이고, 그의 꿈은 주체와 마찬가지로 혁혁한 전공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가 태감이라는 것이다.
수십만대군이 동원되는 대규모 전쟁이라면 일반적으로 준비하는데만 최소 3개월이 소요된다. 왜냐하면 병마가 움직이기 전에 양초(糧草)가 먼저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兵馬未動, 糧草先行).
충분한 양식이 없다면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굶어야 하고, 병사들이 굶주리면 전투력을 잃게 된다. 당시 명영종은 준비기간이 얼마였을까? 겨우 10일이 되지 않았다.
역대이래 몽골을 정복하는 전투의 시기는 봄이었다. 주체도 그러했다. 왜 그랬을까?
만일 출정시기를 여름이나 가을로 잡으면, 시간이 너무 조급하게 된다. 왜냐하면 일단 가을이 되면 승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겨울이 되면 병사들이 추운 새외(塞外)에서 싸울 수가 없게 된다. 활조차 당기기 어렵게 되니, 전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몽골대군은 다르다. 그들은 원래 새외에서 산다. 겨울이 되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런데, 명영종은 출정시기를 칠월로 잡는다. 이미 가을에 가까워진 시기이다.
어떤 각도에서 보자면, 토목보지변은 처음부터 실패할 운명이었다.
예센은 겨우 6만대군이었으나, 명나라는 20만대군이었다. 이 20만대군은 모두 전투경험이 있는 병사들이다. 영락제때부터 내려왔거나, 혹은 선덕제때부터 내려온 사람들이다.
이렇게 대규모로 군대를 동원하면 예센이 아무리 큰 담량이 있다고 하더라도 감히 공격을 감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왕진에 그에게 공격기회를 준다.
원래 양식조달에도 문제가 있었다. 왕진은 대군을 이끌고 이리저리 다녔다. 왜 그랬을까?
그는 20만대군을 이끌고 자신의 고향인 울현(蔚縣)으로 가고 싶었고,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 왕진이 얼마나 크게 성공했는지, 황제마저도 자신의 말을 듣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울현에는 그의 재산이 있었다. 그것은 당연히 농장였다. 20만대군이 울현으로 간다면 그의 농장은 망가질 터였다.
그리하여 그는 도중에 다시 명령을 내려, 거용관(居庸關)을 통해 귀경하도록 명령한다. 그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베이징으로 되돌아간단 말인가? 왜냐하면 그가 전선의 장병에게 보고를 받았는데, 깜짝 놀라서 더 이상 싸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총사령관은 만난 것은 병사들에게는 불행이었다.
원래 사기가 충천했던 명군은 왕진이 이렇게 굴리면서 굶주리고 피곤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생각해보라. 이런 대군이 어떻게 몽골기병과 싸워서 이긴단 말인가. 전투를 해본적이 없고 훈련도 받아본 적이 없는 일반백성들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린다.
사실이 바로 그러했다. 예센이 일단 공격을 해오자, 대군은 바로 궤멸된다. 너도 도망치고, 나도 도망치는...
운이 좋았던 것은 왕진도 이 전쟁통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적군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라, 명군장군 번충(樊忠)의 손에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번충이 너무나 화가나서 그를 철추로 때려죽었기 때문이다.
토목보지변에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왕진이다. 그런데, 왜 명영종은 왕진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었을까?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왕진은 잘못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진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몽골이 명나라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왕진이 그에게 어가친정하자고 한 것은 승리를 거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왕진이 한 것은 모두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이기적인 일을 벌인 인물을 광명정대한 인물로 본 것은 명나라에서 오직 한 사람 명영종 뿐이었다.
그러나 기실 그 모든 것은 이해가 된다. 어쨌든 왕진은 어려서부터 그와 함께 자란 태감이고, 항상 명영종을 자기 친자식처럼 아껴주었다. 당연히 목적은 단순하지 않았다. 그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기 위함이었다.
다만 당사자는 잘 모르는 법이다. 왕진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모두 간사하기 그지없는 인물이지만, 명영종의 눈에는 충성스럽기 그지없는 인물인 것이다.
만일 명영종이 흐리멍텅했다고 한다면, 그 이후의 군신들도 모두 흐리멍텅했다고 해야 한다. 명영종이 죽고나서 여러 신하들은 왕진에 대하여 다시 한번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사당을 철거하는 등. 그러나 여러 신하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사당을 유지해준다. 더욱 가소로운 것은 이 사당은 항상 향불을 사르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력제때 크게 수리를 한번 하고, 강희제때도 다시 한번 대수리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남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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