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귤(紫橘)
<대명왕조>드라마에서 엄숭(嚴嵩)이 수보(首輔)로 있던 시기는 청류(淸流)가 엄숭(嚴嵩)과 투쟁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 청류파(淸流派)는 서계(徐階), 고공(高拱), 장거정(張居正)을 핵심으로 한다. 그중 고공이 가장 과격했으며, 영원히 엄숭일당과 정면으로 부딛쳤다. 그리고 청류파중에서 관직이 가장 높았던 사람은 차보(次輔)인 서계인데, '과격파' 고공과 비교해보면 서계는 항상 엄숭의 주변에 있었다. 서계는 몸은 내각(엄숭의 영역)에 있으면서, 마음은 청류에 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엄숭을 타도하는 것이 성공한 후, 서계가 수보를 맡고나서도 그는 엄숭에 대하여 완전히 청산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여전히 엄숭을 예로 대했다. 이는 서계의 원활한 성격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역사상 서계는 어떻게 권력을 장악해서 엄숭을 타도할 수 있었을까?
1. 엄숭의 권력쟁취는 서계에게 하나의 교훈이 되었다.
가정제(嘉靖帝)떄 가장 먼저 권세를 가진 수보는 하언(夏言)이었다. 하언은 무영전대학사(武英殿大學士), 소사(少師), 내각수보(內閣首輔), 가수옥대수망비어기린복(加授玉帶繡蟒飛魚麒麟服)으로 은총이 더 이상 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하언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부(城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마음을 다 터놓지 않고 일정한 담을 쌓는 것)가 없었다는 것이다. 득세를 하자 오만해졌고, 게다가 스스로 깨끗하게 지내지 못했다. 엄숭은 하언보다 12년이나 먼저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즉, 하언의 관료로서 선배였다. 그러나 내각에 들어온 것은 하언보다 6년이나 늦었다. 그리하여 하언은 그를 멸시했고, 항상 하언이 조롱하는 대상이 된다. 하언은 자주 공개된 장소에서 엄숭을 조롱하고 풍자했다. 내각에서 업무처리를 하면서도, "(하언은) 갈수록 교만해져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했다.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처리했고, 엄숭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다. 엄숭은 그래도 아무 말도 못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원한이 깊어졌다."(왕세정 <대학사하공언전>). 이를 보면 하언은 비교적 방자하고 자기마음대로인 사람이다. 엄숭은? 꾹 참고 인내하는데 능했다. 기꺼이 '차보'로 있을 뿐아니라, 법도를 잘 지켰고, 하언에 대한 태도도 "마치 아들이 부친을 모시는 것같이"(<만력야획편>) 했다.
하언은 내시, 환관들을 노비로 보았고, 완전히 무시했다; 엄숭은 그러나 환관들과 최대한 잘 지내려고 노력했다. 하언은 금의위지휘사 육병(陸炳)까지도 탄핵했지만, 엄숭은 극력 금의위와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했다. 이는 두 사람이 표면상으로는 화합했지만, 속으로는 침봉상대(針鋒相對)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가정제는 도교(道敎)를 좋아하여, 도포(道袍)를 입고, 화관(花冠)을 썼다. 자신이 이런 복장을 했을 뿐아니라, 신하들에게도 그렇게 입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하언은 그렇게 하는 것은 조정의 예법에 어긋난다고 보아 결사반대한다: "신하가 입을 옷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명사>). 그러나, 엄숭은 가정제의 뜻에 극력 따른다. 가정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신하가 정직한 척하는 것이었고, 결국 하언은 황제의 총애를 잃게 된다. 이는 하언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중 하나이다. 윤수형(尹守衡)은 <명사절(明史竊>)에서 이런 견해에 동의한다: "하언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에....(가정제는) 이전에 향관을 쓰지 않은 일을 특별히 언급했다."
2. 서계의 성격
엄숭은 환관, 금의위와 연합하여, 하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 가정제의 성지를 받아 하언은 기시(棄市, 길거리에서 사형을 집행하고 시신을 버려두다)당하고, 처자식은 유배를 간다. 하언의 죽음으로 누구에게 경종이 울렸을까? 하언이 직접 발탁한 서계는 하언의 죽음으로 인하여 마음 속에 큰 그림자가 드리우게 된다. "하언이 도륙을 당한 것에는 엄숭의 죄가 하늘만큼 크다"(<명사절>). 그 과정에서 서계는 엄숭이 착실하게 준비하고, 와신상담하며, 성부가 깊은 정치적 수완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무가 크면 바람도 많이 맞는' 은사 하언이 스스로의 생활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여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이한 것도 보았다. 더더구나 자신의 지위는 완전히 황상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오로지 황상만이 자신의 뒷배경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하언의 죽음은 서계를 교육시켰고, 서계로 하여금 "선용지(善容止), 성영민(性潁敏), 유권략(有權略), 이음중불설(而陰中不泄)"(용납하고 적절한 선에서 멈추는 것을 잘하며, 성격은 영민하고, 권모술수도 있지만, 그것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다)하는 성격을 기르게 된다.
서계는 전형적인 학술형 교수형의 관료였다. 일찌기 그는 단지 <대명회전>을 편찬하는데 공을 세우고, 그후 하언에 의해 발탁되어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하언이 '기시'당하자, 서계는 좌불안석하게 된다.
다행히 서계의 상사인 이부상서 웅협(熊浹)은 정직한 관료였다. 웅협은 서계를 밀어주었던 하언이 숙청되었다고 하여 서계까지 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서계의 능력을 인정하고 서계를 잘 보살펴 주었다. 동시에 웅협은 시류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황제에게 직언을 했다. 웅협은 대학사 장치(張治)와 함께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세종(가정제)는 현학(玄學, 도교)을 좋아하여, 대신들 중에서 그에 영합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중 이를 막는 사람은 웅협, 장치에 불과했다."(오서등 <양조헌장록> 가정29년 십월조). 이런 정직한 관리는 자연히 끝이 좋지 못하다. 그래서 웅협의 최후도 서계에게 경고해주게 된다. 서계는 그저 시류의 흐름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3. 엄숭의 권력장악, 서계의 명철보신
서계의 정치적 운명은 하언이 죽임을 당한 후에도 여전히 순조로웠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기실 엄숭과 같이 아부도 하고, 황상에게 청사(靑詞)도 써주면서 자신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위 '청사'는 가정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읽고서 불에 태워 하늘에 기도하는 글같은 것이다. 서계는 학식이 높고, 글을 잘 썼다. 그리하여, 하언이 죽임을 당한 후, 서계는 오히려 예부상서로 옮겨가서, 황제의 곁에서 도교활동을 함께 했다. 황제가 그를 총애했다는 것은 당시 이부상서의 자리가 비어있게 되어, 대신들이 상의하여 서계가 맡는 것이 좋겠다고 했는데, 가정제는 오히려 대신들을 질책했다: "서계는 내 곁에서 잘 지내는데, 왜 다른 곳으로 보내려 하는가?" 서계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황제가 이렇게 서계를 좋아하니, 수보인 엄숭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엄숭은 서계를 부러워하면서도 질투했다. "서계는 일찌기 하언이 발탁한 사람이므로, 엄숭이 그를 꺼려했고, 질투가 아주 심했다."(<명사>). 그래서 엄숭은 항상 배후에서 서계에 대하여 좋지 않은 말을 하고, 서계도 그것을 알아차린다. 다만, 서계는 황제의 총애만 잃지 않으면, 누구도 그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더욱 노력하여 청사를 쓰면서, 황제의 비호를 받고자 했다. "서계는 아주 위험해졌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오로지 청사를 열심히 쓰면서 황상이 그에게 관대하게 대해주기를 기대했다."(<명사>). 동시에 서계는 엄숭과 아무런 분쟁도 일으키지 않고, 위곡구전(委曲求全)한다. 마침내 가정31년, 서계는 예부상서로 내각에 진입한다.
4. 내각에 들어간 후 신중하게 행동하다.
내각에 들어간 것은 엄숭의 기반에 들어간 셈이다. 황제의 보호는 없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힘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제2의 하언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장대(張垈)의 <석궤서(石匱書)>에는 이때 서계가 채택한 방법을 쓰고 있다: 그는 엄숭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자신의 딸을 엄숭의 아들 엄세번(嚴世藩)과 결혼시켜서, 정략결혼으로 잘 지내고자 한다. 또한 자신이 은퇴한 후에 살 집을 엄숭의 본가 곁으로 정한다. 이를 통해 자신은 엄숭을 따르고, 수시로 가르침을 받겠으며, 엄숭을 스승이자 부친처럼 여기겠다는 뜻을 표시한다.
가정32년, 서계는 내각에 들어간 후 첫번째 난제를 맞이한다. 당시 형부에서 근무하는 하급관리 양계성(楊繼盛)이 엄숭이 결당하여 나라를 망치고, 권력을 농단하고, 부정부패하며, 윗사람에 아부하고 아랫사람을 괴롭힌다는 등 10대죄상을 들어 탄핵한 것이다. 가정제는 신하가 정직한 척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고, 그래서 양계성을 하옥시킨다. 엄숭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금의위지휘사 육병에게 엄히 고문하도록 요구한다. 그가 마구잡이로 누군가를 불도록 하기 위해서. 창끝은 서계를 향하고 있었다. 서계는 이 일에서는 그저 명철보신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끼어들지 않았다.
엄숭의 일당이 사직을 위태롭게 하다보니 당연히 정직한 신하들로부터 탄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력37년, 형부의 하급관리 장충(張翀), 동전책(董傳策)이 다시 엄숭을 탄핵한다. 묘하게도 장충은 서계의 제자이고, 동전책은 서계와 같은 고향사람이다. 그리하여 엄숭은 막후에 서계가 있다고 의심하게 된다. 다른 방법이 없는 서계는 그저 계속 열심히 청사를 쓰면서 황상에게 잘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내각의 일은 모조리 엄숭의 뜻에따라 처리하도록 하고, 이를 통해 자신은 엄숭에게 공손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5. 마침내 햇볕을 보다.
여리박빙(如履薄氷)하는 와중에 서계는 차보로서 엄숭의 곁에서 여러 해를 지낸다. 마침내 엄숭이 멍청한 짓을 저지르고, 서계에게 기회가 온다.
가정40년, 가정제의 궁전 서원(西苑)의 영수궁(永壽宮)이 불에 탄다. 가정제는 옛궁전인 옥희궁(玉熙宮)으로 옮겨서 지낸다. 일부 대신은 황제에게 대내(大內)로 옮겨올 것을 주장한다(당시 가정제는 도사의 생활을 지내기 위해, 세속의 건청궁에 살지 않았다). 황제가 엄숭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엄숭은 머리가 어찌된 것인지, 황제에게 남원(南苑)으로 옮기자고 말한다. 남원은 명영종이 오이라트에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왔을 때 명대종에 의해 연금되었던 곳이다. 원래 길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가정제는 도교로서 풍수를 중시했다. 그래서 엄숭의 건의에 불같이 화를 낸다. 이때부터 엄숭은 총애를 잃는다. 이때, 서계는 교묘하게 상소를 올려, 다른 궁전의 목재를 가져와서 영수궁을 새로 지으면,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고 물자와 인력도 아낄 수 있다고 건의한다. 황제는 그의 말에 동의하고, 과연 1달도 되지 않아 새로운 영수궁이 완공된다. 황제는 크게 기뻐했고, 친히 만수궁(萬壽宮)이라 명명한다. 이때부터 "엄숭의 기세는 날로 쭈그러들고, 황제는 서계의 말만 듣게 된다" "그리하여 안팎에서 모두 황제의 뜻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게 되었고, 서계가 엄숭을 제거할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한다!"(만사동 <명사>)
결론
하언은 비록 발호했지만 "여전히 올바름을 지켰다(持正)"(<양조헌장록>) 엄숭일당은 나라와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다. 엄숭이 집권한 기간은 바로 대명이 남왜북로의 우환이 극심한 때였다. 엄숭일당은 권력을 농단하면서 재물을 긁어모았고, 결국 변방의 방어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서계는 엄숭이 수보로 있는 동안 명철보신했다. 그의 이런 태도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신조차 보호하지 못한다면 어찌 치국평천하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명사>에서 서계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한다: "조정에서는 재상의 풍도가 있었다. 좋은 사람들을 지켜냈고, 가정, 융경의 정치에 여러 업적이 있었다. 그 동안 위사(委蛇)하기는 해도 대절(大節)을 잃지는 않았다." 이를 보면 서계가 많은 인재들을 지켜냈고, 융만신정에 기초를 닦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서계는 공이 과보다 많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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