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탕현조(湯顯祖)는 어떻게 이지(李贄)를 숭상했는가?

중은우시 2023. 1. 16. 11:48

글: 역사백가회(歷史百家匯)

 

탕현조는 일찌기 나여방(羅汝芳)의 제자로 어려서부터 그에게 학문을 배우고, "비성지서(非聖之書)"를 읽었다. 나중에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선종대사(禪宗大師) 자백(紫柏)과 친구로 사귀면서 특히 급진사상가 이지를 존경하여, 그의 <분서(焚書)>를 읽고 매우 흠모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명덕선생(明德, 나여방)과 같은 분으로 당시 내 마음 속에 있던 사람으로 보기에 상인(上人, 자백)의 웅(雄)과 듣기에 이백천(李百泉, 이지)의 걸(傑)이다. 그들의 말을 찾아낸 것은 마치 아름다운 검을 얻은 것과 같았다." 

 

탕현조는 수창(遂昌)의 임지를 떠난 후, 일찌기 임천(臨川)에서 이지와 만난 바 있다. 이지가 옥중에서 자살한 후, 탕현조는 시를 써서 애도한다. 그는 반이학(反理學)의 달관선사(達觀禪師, 자백)를 숭상하며, 이지와 달관을 웅(雄), 걸(傑)로 칭했다. 그들의 영향은 많은 정도로 탕현조가 창작하는 과정에서 부패정치를 폭로하고, 정주이학(程朱理學)에 반대하며 개성해방을 추구하는 사상적 기초를 이루게 된다.

 

"동방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희극대사 탕현조의 일생은 가정제(嘉靖帝), 융경제(隆慶帝), 만력제(萬歷帝) 3명의 황제시기를 거친다. 그때는 바로 조정이 부패, 타락하고, 사회가 동탕에 빠져 불안했던 명나라 중후기였다.

 

그런 시대에 탕현조는 "진인(眞人)", "진룡(眞龍)", "진품(眞品)"을 닦으면서, 재상보신의 회유를 거절하고, 고관대작의 부패를 멸시하며, 죽기 전까지도 "진인"으로 명지(明志)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인자유진품(人自有眞品), 세자유공론(世自有公論)"(사람에게는 진품이 있고, 세상에는 공론이 있다). "복불감자위성지중인(僕不敢自謂聖地中人), 역기호진자야(亦幾乎眞者也)"(나는 감히 스스로 성인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거의 진자라고 할 수는 있다)

 

동시대의 사상가 이지도 "진인(眞人)"을 얘기하길 좋아했다. 그의 "동심설(童心說)"에서는 "진인" "지문(至文)"을 좋아하고, "가인(假人)" "가문(假文)"을 싫어하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진인'이 되고자 하는 탕현조가 '진리'를 이야기하는 이지를 만나자 탕현조에게는 창작의 영감이 자극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탕현조의 '정지설(情至說)'은 원굉도(袁宏道)의 '성령설(性靈說)'과 마찬가지로, 모두 예술분야에서 이지의 '동심설'에 대한 호응이라 할 수 있다.

 

<임천현지(臨川縣誌)>권10 및 서삭방(徐朔方) 선생의 <만명곡가연보(晩明曲家年譜): 탕현조연보(湯顯祖年譜)>의 기재에 따르면, 명나라 만력27년(1599년) 즉 <모란정(牧丹亭)>이 세상에 나온지 1년후, 이지는 임천으로 가서 탕현조를 찾아가고, 성동쪽의 정각사(正覺寺)에서 만난다.

 

탕현조와 이지가 서로 직접 교류한 것은 아주 적다. 그러나 서로 통하는 것은 많았다. 그는 <분서>를 읽고, 이지의 숭배자가 되었다.

 

만력18년(1590년), 이지의 <분서>가 호북(湖北) 마성(麻城)에서 출간된다. 그 해에 탕현조는 남경(南京) 예부사제주사(禮部祠祭主事)로 있었다. 이지의 <분서>를 보고나서 당시 소주지부(蘇州知府)로 있던 친구 석곤옥(石昆玉)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이백천(이지의 호가 백천임)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분서>를 보니, 기인(畸人)이다. 그가 쓴 책을 구해서 나에게 보내줄 수 있겠는가?"

 

석곤옥은 호북 황매(黃梅) 사람이며, 황매는 마성과 이웃한 지방이다. 그래서 탕현조는 그에게 이지의 저작을 구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탕현조가 이 서신을 쓴 것은 <분서>를 출판한 해와 같은 해이다. 이를 보면 탕현조가 얼마나 절실하게 그의 책을 구해보고자 했는지 알 수 있다.

 

탕현조는 이지의 <분서>를 읽은 후 깨달은 바가 있어, 친구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그 책을 찬양했다: "명덕선생(明德, 나여방)과 같은 분으로 당시 내 마음 속에 있던 사람으로 보기에 상인(上人, 자백)의 웅(雄)과 듣기에 이백천(李百泉, 이지)의 걸(傑)이다. 그 말을 찾아낸 것은 마치 아름다운 검을 얻은 것과 같았다." 

 

탕현조가 이지와 직접 교류한 것은 당연히 명덕선생 나여방이나 상인 달관선사만큼 밀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탕현조의 마음 속에 이지의 지위는 나여방, 달관에 못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이지의 사상은 "아름다운 검을 얻은 것"과 같았다. 더욱 날카로웠다. 이는 이지가 탕현조에게 사상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탕현조는 친구 원굉도가 이지와 심도있게 교류하는 것을 부러워했고, 일찌기 <독금범집회탁로(讀錦帆集懷卓老)>를 지어 이렇게 말했다: 세사영롱설부주(世事玲瓏說不周), 혜심인원벽상류(慧心人遠碧湘流). 도장설상청련자(都將舌上靑蓮子), 적여공안원육휴(摘與公安袁六休)" 원굉도는 일찌기 이지를 스승으로 모셨고, 이지의 급진사상은 원굉도에게 '성령설'의 문학주장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공안파(公安派) 문학활동의 기초를 이루게 된다.

 

탕현조는 원굉도의 시문에서의 성취를 찬양하는 동시에, 이지의 반전통 문학사상에 대하여도 마음 속으로부터의 존경을 표했다.

 

만력30년(1602년) 삼월, 탕현조는 집에서 이지가 옥중에서 자살했다는 흉보를 듣게 된다. 비분을 참지 못하고, <탄탁로(嘆卓老)>라는 시를 지어 애도했다:

 

자시정령애출가(自是精靈愛出家)

발두하필향경화(鉢頭何必向京華)

지교소무임도장(知敎笑舞臨刀杖)

난취제천우잡화(爛醉諸天雨雜花)

 

탕현조는 그가 '소무임도장'이라고 했는데, 이는 간략하면서도 정확하게 이지의 투쟁정신과 성격의 특징을 드러냈다. 

 

이지가 사망한 후, 명왕조는 그의 저작이 유행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지만, 민간학자들은 여전히 이지의 저작을 편집, 평점, 간행했다. 

 

탕현조는 <이씨전서(李氏全書)>에 총서문을 써서 이지의 저작에 대하여 "전세가(傳世可), 제세가(濟世可), 경세가(經世可), 응세가(應世可), 훈세가(訓世可), 즉해세역무불가(即駭世亦無不可)"라고 했다. 봉건문화전제주의에 대하여 강렬한 항의를 표시했고, 이지의 저작이 세상에 전해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