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세개)

원세개시대의 언론자유

중은우시 2013. 12. 22. 21:57

글: 부국용(傅國涌)

 

송교인이 졸지에 암살당하고, 새로 탄생한 민국에는 파란이 일었다. 손중산은 무력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선택했고, 금방 원세개의 우세에 밀려 무력으로 패배당한다. 민국의 창업자인 손중산, 황흥은 다시 망명길에 들어선다. 장태염(章太炎)은 북경에 연금되어 있었다. 이 "대훈장은 선추(扇墜)로 삼고, 총통부의 문앞으로 가서, 원세개를 욕해댄 포장화심(包藏禍心)의 인물"은 탕국리(湯國梨)와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유금되어 있던 3년동안 그들 한 쌍은 남북으로 떨어져 있으면서 그저 서신으로 내왕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당시 검열을 거쳐 보내어진 서신을 보면 말 속에 여전히 가시가 있고 뼈가 있었다(有刺有骨), 단지 집안일이나 아녀자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1913년 10월 25일자 장태염의 서신을 보면 원세개를 "원곤(袁棍)"이라고 칭한다. 같은 해 11월 4일, 그는 서신에서 원세개가 조조만 못하다고 탄식한다. 자신은 미형(禰衡)이 되고싶은데 될 수 없다고. "그의 행위를 보면 실로 간웅의 기상이다. 부패관료의 우두머리이다. 오호라 조맹덕을 만나서 미형이 되기를 바랐으나 그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조맹덕의 능력이 없기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조맹덕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더 할 것인가." 이런 서신도 요행히 검열을 거쳐 나왔다.

 

당시의 신문은 장태염이 남북분쟁, 대동간과(大動干戈)의 시기에 돌연 북상한 데 대하여 여러가지 추측과 논의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그는 부인에게 보낸 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문에서 하는 유언비어는 깊이 따질 필요가 없다. 이전에는 신문이 여러 당으로 나뉘어져 아직 가치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조리 정부기관이다. 무슨 볼 만한 것이 있겠는가? 이런 것은 천사부관(天師符觀)하면 그만이다." 민국초창기, <임시약법>은 언론자유, 출판자유원칙을 확립하여 신문계에 희망을 준다. 장태염과 같은 사람들의 몇 편의 글, 성명은 남경임시정부로 하여금 "잠행보율(暫行報律)"을 회수하도록 만들었다. 1912년에만, 신문을 만드는 붐이 일어나서 신문이 500종에 달한다. 그러나 원세개가 정권을 잡은 후 그가 죽을 때까지 4년동안 최소한 71개의 신문사가 폐쇄당하고, 49개의 신문사가 소환심문을 당하고, 9개가 파괴되었으며, 60여명의 신문기자가 체포되고, 최소한 24명이 피살되었다. 1913년부터 신문사의 총수는 신속히 500개에서 130개로 줄어든다. 이들 수치는 장태염의 주장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원세개 신문자유의 대체적인 상황도 알려준다.

 

원세개의 집권초기, 신문계는 자유로운 공기가 있었다. 1912년 12월 12일 북경에서 출판되는 <소년중국주간>에는 명기자 황원생(黃遠生)이 발표한 <소년중국의 자유>가 실리는데 거기에서 원세개에 대하여 이런 평가를 한다: "대체로 원총통의 사람됨은 착한 일을 하는 사람과 반드시 함께하지 못할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정권을 잡은 이래 착한 날을 적고 악한 날은 많은 자가 되었다..." 그는 원세개에게도 장점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가 '착한 날이 적고 악한 날이 많은 자'가 된 이유에 대하여는 "첫째 지식이 신사회에 맞지 않아서이고, 둘째 공심(公心)이 너무 적어서 자신의 세력을 심으려는 생각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말해서 신지식과 도덕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장점을 가지고 좋은 나라로 만들지 못하고 악한 땅으로 만든 것이다."

 

이전에 그는 12월 4일에 발표한 <둔갑술전문의 원총통>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실 웅재대략의 원공은 사통팔달하고 유인유여(遊刃有餘)했다. 취임한지 1년도 되지 않아 대권을 하나하나 장악하였다. 약법상의 여러가지 제한은 원공을 기속할 수 없었다. 마치 오나리소설가가 말하는 둔갑술을 익힌 사람같았다...우리는 머리가 잘리고 피를 흘림으로서 대총통이 황제가 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이 때는 아직 원세개가 칭제하는 때로부터 한참 이전이다). 그후 12월 19일에 발표한 <개인세력과 국가권력의 구별>에서는 이렇게 직언한다: "원총통이라는 자는 개인세력을 심을 수는 있지만 국가의 권력을 집행할 줄은 모르는 자이다."

 

원세개의 세력이 집중될수록, 신문계의 자유공간도 갈수록 좁아진다. 그래서, 1915년 11월, 황원생은 <동방잡지>에 <참회록>을 발표할 때, 당시의 신문자유는 심지어 청나라때만도 못했다고 탄식하기에 이른다.

 

당연히 이것은 그 시대에 원세개가 일수차천(一手遮天)하여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에게 고개를 숙이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상사람들은 다 알았다. <천연론>등 번역작품으로 한 시대에 영향을 준 엄복(嚴復)이 악명이 자자한 "주안육군자(籌安六君子)"의 한 명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을. 그는 개인적으로 사람들에게 말한 바 있다, 자신은 확실히 군주입헌에 찬성한다. '주안회'에 이름을 올린 것은 양도(楊度)가 임의로 한 것이며, 원세게에 대하여는 자신에게 나름대로 생각이 있다고. 그가 1915년에 웅순여(熊純如)에게 보낸 개인서신에서 우리는 엿볼 수 있다. 그의 눈으로 본 원세개는 "일시지걸(一時之傑)"이고 기껏해야 "옛날 황제체제때의 독무(총독순무)일 뿐이다" 새로운 세계조류에 직면하여, 열강의 도전에 직면하여, 그는 원세개가 '과학철학지식이 너무나 부족하고, 세계적인 안목이 너무나 없으며,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기를 원하고, 자신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지 않았다.". 여러해 후, 이 서신은 <학형> 잡지에 발표된다. 비록, 엄복의 서신은 당시 개인적인 견해이어서, 원세개는 알지 못했다. 세상사람들도 알지 못했다. 다만, 양계초등의 원세개에 대한 비판은 신문잡지에 공개적으로 발표되었다.

 

장태염의 눈에 조조만 못한 "원곤"이 엄복의 눈에는 과학철학지식이 없고, 세계적인 안목이 없는 구시대의 총독순무에 불과했고, 양계초의 눈에는 "중세사 암흑시대의 동방식 괴마같은 인물"이다. 이것은 동시대인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한 진실한 원세개이다. 원세개가 여론을 어떻게 장악하고, 신문을 어떻게 폐쇄시키더라도, 이런 사적이거나 공개적인 불협화음을 제거할 수 없었다. 이것은 원세개가 어찌할 수 없었던 것만이 아니라, 권력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권력의 밖에도 공도(公道)는 있다. 권력의 밖에도 역사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