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전(劉典)
민국시대에 군벌혼전으로 시국이 어지러웠다. 많은 보잘 것없는 인물들이 기회를 잡아서 일어서서 한시대를 풍미하기도 했다. 장종창은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이 장군의 명성은 실로 사람들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국가와 민족에 재앙을 끼치는 군벌의 전형적인 인물이었고, 민간에서는 "구육장군(狗肉將軍)", "혼세마왕"으로 불리웠다. 그리고 그에 관한 우스개가 적지 않게 전해내려온다. 그가 바로 장종창이다.
1927년 10월 상순, 국민당의 정금성(鄭金聲) 부대는 산동으로 진격하고, 장종창도 군대를 보내어 맞싸운다. 쌍방은 하남의 난고(蘭考) 일대에서 격전을 벌인다. 전투과정에서 장종창의 사단장 반홍균이 계책을 써서 국민군의 여단장 강명옥으로 하여금 부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게 한다. 그리하여 정금성은 반군에 체포된다. 장종창은 가볍게 큰 골치거리를 해결했으니, 자연히 아주 기뻤다.
장종창은 정금성을 보자 즉시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한다. 정금성은 무릎을 꿇지 않고 분노하여 맗한다: "너는 나를 총살해라. 빨리 손을 쓰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 나는 삼민주의를 위해서 중국국민혁명을 위해서 분투했다.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다!!" 장종창은 강경한 방법으로는 안되자 태도를 바꾼다. 그에게 고위관직을 주겠다고 한다. 정금성은 "토비, 매국노"라고 그를 욕한다. 이처럼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자에 대하여 장종창은 항상 강경했다. 바로 정금성을 총살하도록 명한다. 막료들이 극력 말렸지만, 장종창은 총살을 고집한다. 1927년 11월, 정금성은 총살당한다. 당시 나이 48세였다. 장종창은 사람을 죽인 일이 한 두번이 아니므로 이 일이 화근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정금성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정계성(鄭繼成)이다. 정금성은 어려서부터 정계성을 부대에 데리고 다니면서 글을 가르켰다. 정계성이 15세가 되던 해 병영에 들어가서 공부했으며 용맹하기가 남달랐다. 공부를 마친 후, 정금성은 풍옥상에게 추천하여 보낸다. 그는 풍옥상을 따라 이십여년을 다녔고, 풍옥상도 정계성을 자신의 친아들처럼 돌봐준다.
정금성이 피살된 후, 장종창은 자연히 참초제근하고자 한다. 비밀리에 정계성을 추포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정계성은 산동을 겨우 도망쳐 나와 풍옥상을 찾는다. 풍옥상은 그 자리에서 정계성을 북로군총참찬에 임명하고 북벌에 따라오도록 한다.
1930년 마침내 산동 역성의 원적으로 돌아온 정계성은 부친 정금성의 장례를 치르고 부친의 복수를 다짐한다.
1931년 9.18사변후, 일본군이 동북(만주)을 점령한다. 장학량은 동북군을 이끌고 관내(산해관이내)로 퇴각하여, 북평수정공서 주임이 된다. 1932년 봄, 장학량은 장종창이 매국노가 되는 것을 우려하여, 그에게 중국으로 즉시 돌아와 북경 철사자후통에서 잠시 거주하도록 전보를 보낸다. 장종창이 귀국한 후, 산동으로 돌아가서 옛 부대를 모아서 재기하고자 꿈꾼다. 그러나, 당시의 산동성주석은 기예로 "초비"총지휘,제3로군총지휘 한복거였다.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한복거는 자연히 장종창이 다시 권력을 잡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다만, 겉으로는 여전히 장종창과 형제로 칭하고 그를 상빈으로 모셨다.
한복거와 정금성은 모두 풍옥상의 부하이고, 정금성은 한복거에게 구명지은이 있었다. 정금성이 곤란할 때, 한복거도 옛 정을 잊지 않았다. 정계성을 남겨서 씀으로서 예전의 구명지은을 갚았다. 비록 나중에 장개석, 풍옥상, 염석산의 중원대전때 한복거가 장개석에게 투항하고, 이어 산동성 주석이 되지만, 여전히 정금성은 산동성정부에서 월급을 받는 참의였다.
며칠내에, 한복거는 정계성을 찾는다. 그리고 그가 복수하는 것을 돕겠다고 말한다. 정계성은 그 말을 듣자, 바로 탁자를 치며 일어난다: "부친을 죽인 원수는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나는 당시에 부친의 영전에서 맹세했다. 반드시 흉수 장종창을 죽여서 부친의 영혼을 위로하겠다고. 비록 5년이 지났지만, 부친의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은 그대로이다. 단지 기회가 없어서 바램을 이루지 못했을 뿐이다." 한복거는 장종창이 산동으로 온다는 소식을 그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그에게 준비를 잘 하라고 말한다.
1932년 9월 3일 오후 5시 55분, 날씨는 약간 무더웠다. 제남의 기차역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제남에서 천진까지 운행하는 열차가 5분뒤면 떠난다.
바로 이 때, 산동군무독판, 직로연구의 두목인 장종창이 산동군정관리들의 수행하에, 열차의 1등칸으로 걸어간다. 그는 자신의 참모장 김수창, 경제처장 유회주 및 두 명의 위사를 먼저 열차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배웅나온 사람들과 악수를 한 후에 열차에 올랐다.
열차에 오른 후, 장종창은 몸을 돌려 열차의 문옆에서 아주 기품있게 오른손을 들어 다시 한번 배웅하는 사람들과 인사를 한다.
바로 이 때, 정계성이 사람들 틈에서 튀어나오며 앞으로 달려간다. 총을 들어 장종창을 향해서 욕을 했다: "내가 너를 죽여버리겠다. 왕빠단!" 말을 마치자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비오듯이 날아갔다. 이때 정계성은 플랫폼으로 돌아가서 총을 들고 소리높여 외친다: "나는 정금성의 아들 정계성이다. 부친의 복수를 한 것이다. 이제 자수하겠다!"
얼마후, 기차역의 군경이 도착한다. 정계성과 진봉산(陳鳳山)은 스스로 총을 내려놓고, 지방법원으로 압송되어 갇힌다.
장종창이 죽은 후, 그와 함께 제남으로 갔던 참모장 김수창, 비서장 서효루, 부관장 정용등은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한복거는 이 때 가식적으로 큰 돈을 들여서 관을 준비하고 염을 한다. 9월 11일 장종창의 시신을 북평(북경)의 집으로 돌려보낸다.
장종창이 암살된 후, 정계성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정계성을 자신의 친아들로 여기던 풍옥상은 자연히 갖은 방법을 강구하여 정계성을 구하려고 하였따. 풍옥상은 옛 부하이자 제남시 시장인 문승열에게 서신을 보낸다. 그에게 민국17년 국민정부가 일찌기 장종창에게 지명수배령을 내렸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다시 사람을 시켜 정계성을 위해 신변장(申辯狀)을 써서 남경최고당국에 사면을 요청한다.
1개월여가 지난 후, 1932년 10월 7일, 제남의 경찰은 정계성을 "살인모의죄"로 기소한다. 10월 15일 제남지방법원에서 공개재판이 열린다. 재판과정에서, 정계성은 당당하게 자신의 행위를 모두 인정한다.
정계성사건의 재판은 사회여론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정계성은 부친을 위하여 복수한 것이다. 고대에 "부친을 죽인 원수는 불공대천이다"라는 말이 있다. 민국연간에는 비록 이미 서방법률제도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전통사상이 여전히 거대한 관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물며, "효자복수"의 이야기의 상대방은 장종창이라는 "악당"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윤리적인 정당성이 있는 것이다.
장종창은 다른 원수들도 자연히 이 낙정하석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장종창의 성공은 진기미를 암살한 것에 원천이 있다. 진기미의 조카이자 국민당 CC계의 우두머리인 진입부는 자연히 원수를 죽인 은인이 감옥에 갇혀 있도록 방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산동성당부에 전보를 보내어 정계성이 사형을 받지 않도록 하게 한다. "장창종의 암살범은 법원판결후, 만일 죄에 대한 벌이 지나치게 중하면, 다시 특사조례에 따라 처리하고, 국법과 여론을 모두 고려하라" 장개석도 한복거에게 전보를 보내어, "장종창을 죽인 정계성은 어찌되었던 목숨을 보전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장창종은 선열 진영사(진기미) 선생을 죽인 흉범이고, 정계성의 숙부도 혁명의 희생자이다. 법률도 인정에 다름 아니다(法律, 不外人情也)"
10월 19일 법원은 판결서를 공표한다. <산동제남지방법원형사제1심판결. 민국21년지자제141호> 판결서에서 정계성을 유기징역 7년 및 공민권리박탈 7년에 처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겨우 3개월이 자난 후에 행정원의 비준을 받아, 남경사법행정부는 정계성에 대한 특사령을 내린다.
"사법원에서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정계성은 계부 정금성이 장종창에게 살해되어 기회를 보아 장종창을 열차역에서 살해했고, 조금 후 집법대 관병에 자수했다. 부친의 복수는 형벌에 저촉되지만 그 정상은 참작할 점이 있다. 이제 각성시현 당부, 각민중단체가 연이어 원판결에서의 형벌책임을 특사해주고, 법에 따라 집행을 면제해주기를 청구하고 있다. 이에 특별히 수정중화민국정부조직법제6조의 규정에 따라 유기징역 7년의 형을 받은 정계성의 특사를 허용하고, 집행을 면제한다. 이십이년 삼월 십사일.
특사령이 반포된 후, 제남지방법원은 즉시 정계성을 석방하도록 통지한다. 이렇게 하여, 정계성은 당당하게 감옥에서 걸어나온다. 이렇게 하여 1년여동안 시끄러웠던 장종창암살사건도 막을 내린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민국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9.18사변에서 누구를 가장 질책해야 하는가? (0) | 2013.11.11 |
---|---|
장정(長征)때 홍군은 왜 매복에 한번도 걸리지 않았는가? (0) | 2013.11.10 |
구추백(瞿秋白)은 왜 <다여적화(多餘的話)>를 썼는가? (0) | 2013.11.10 |
장학량(張學良)에 대한 재판경위 (0) | 2013.10.08 |
양호성(楊虎城) 일가피살의 내막 (0) | 2013.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