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장정(長征)때 홍군은 왜 매복에 한번도 걸리지 않았는가?

중은우시 2013. 11. 10. 23:44

글: 서염(徐焰)

 

장정기간동안 홍3군단장, 홍1방면군사령원을 지낸 팽덕회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홍군지휘관의 영용과 뛰어난 정찰업무덕분에, 전멸을 피하고 섬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리장정에서, 홍군은 시시때때로 중병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한번도 매복에 걸린 적이 없다. 국민당군이 설치한 포위망에서 모두 정확하게 빈틈을 찾아서 빠져나갔고, 이것은 주로 무선통신정찰에 의존하여 적시에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홍군장정이 선두부대에는 정찰병을 두어 포로를 잡고,변장을 하고 길을 여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러나 이런 류의 정찰은 전술적인 가치만 지니고 있을 뿐, 적군 고위층의 계획과 전체 작전배치를 알기는 어렵다. 장정도중 계속하여 국민당의 암호를 해독한 것이 홍군정찰업무의 가장 뛰어난 점이었다. 지금 오래동안 먼지가 쌓여있던 문건이 이미 세상에 공개되었고, 숨겨진 전선영웅의 역사공적도 마침내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1976년 깊은 가을, 전 홍4방면군 총지휘관 서향전(徐向前)은 당시 중앙조사부장인 나장청(羅長靑)과 정보업무에 관하여 얘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장한조가>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모주석의 용병은 정말 신과 같다'. 맞다 모주석의 용병은 확실히 뛰어난 점이 있었다. 다만 그도 정보에 기초한 것이다." "홍군이 감히 운남, 귀주, 사천, 호남의 몇몇 노군벌방어지역을 뚫고 오가면서 물만난 고기같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용운(龍雲), 왕가열(王家烈), 유상(劉湘), 하건(何鍵)의 내부에 우리 사람을 심어두었고, 그들의 암호를 해독했기 때문이다."

 

장정기간동안 홍군이 무선전신정찰과정에서 걸출한 성취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중공중앙의 전신공작에서 미리 장기적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1929년, 주은래(周恩來)는 상해에서 비밀리에 무선전신인원훈련반을 만들고 소련에 요청하여 무선통신 암호기술과 암호해독기술은 이미 세계에서 선진적이었다. 중국공산당의 무선통신업무는 건립초기에 외국의 선진기술을 도입하고 본국인원의 고된 분투가 결합된 정신을 나타냈다. 국민당고위층과 특무기관내에 잠입한 중공중앙 특과인원은 적의 핵심부서의 일부 암호책을 획득한다. 이를 통하여 많은 중요정보를 해독하였을 뿐아니라, 국민당의 암호법칙을 장악하게 된다.

 

1930년대, 중공중앙은 소련과 국내에서 훈련받은 무선통신인원을 각지의 홍군으로 보낸다.그들은 배운 기술과 획득한 적국정보를 결합하고, 실천과 연구를 결합하여 마침내 적군의 비밀전보를 해독하는 독특한 방식을 파악하게 된다.

 

홍군은 1931년의 제2차 반소탕전부터,국민당군의 전보를 해독하기 시작한다. 모택동, 주덕등 지도자들은 제2차 제2차 반소탕전에서 적군의 사정을 손바닥보듯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제5차 반소탕기간동안 국민당 각부대는 대부분 소베이트구주위에상대적으로 고정된 위치에서 작전하고, 주로 유선전화로 지휘했다. 홍군은 적군의 지휘와 배치상황을 전부 파악하기 어려웠다.

 

장정이 개시된 후, 적군아군 쌍방의 군대는 모두 시시때때로 움직였다. 당시에는 유선전화망이 아직 국내에 건립되지 않았으므로, 장개석은 국민당군 각군, 각사단에 명령을 내려 무선전보를 통하여 발송했다. 이제, 홍군의 암호해독활동은 최고조에 달한다. 적군의 전보명령은 대부분 획득하였고, 해독성공률른 거의 100%였다. 예를 들어, 홍4방면군의 무선통신대 대장 송간부(宋侃夫)는 내부의 별명이 "본자(本子)"였는데, 그 뜻은 그가 무선으로 획득한 국민당군의 암호전보를 암호책을 뒤져보지 않고서도 그 내용을 읽어낼 수 있었고,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중앙홍군 장정시, 무선전신정찰을 책임진 군위2국(軍委二局)이 제공한 정확한 정보 하나하나는 중앙이 위험을 벗어나는데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상강전투이후 국민당군은 상서(湘西, 호남서부)에 구대진(口袋陣)을 펼치고 있었다. 대도하(大渡河)를 건너기 전에 적군은 대수보(大樹堡) 일대에 중병을 배치했다는 정보를 얻어, 모택동등 지도자들은 신속히 방향을 바꾸도록 결정하게 만든다. 장정이 끝난 후, 모택동은 증희성(曾希聖)과 그가 지휘산 군위2국을 고도로 평가하고 칭찬했다: "이국이 없었으면 홍군장정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국이 있었기에 우리는 등불을 들고 밤길을 걸을 수 있었다."

 

중앙홍군(제1방면군)이 장정을 시작한 후 반년간, 대부대는 낮에 행군했다. 무선통신인원은  할 수 없이 기기를 거두어 따라가야 했다. 길을 가면서 업무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이때, 홍4방면군의 무선통신부대가 천섬(川陝)소비에트구의 고정위치에 있었다. 그리하여 낮에는 무선신호를 청취하는 업무를 책임진다. 그리고 해독해 낸다. 날이 어두워지면 1방면군의 무선통신부대가 숙영지에 도착한다. 제4방면군의 무선통신부대는 감청해서 해독한 전보를 제1방면군에 알려준다. 이어서 제1방면군의 무선통신부대가 야간업무를 시작한다. 국민당군의 야간전보통신을 감청한다. 제1,제4방면군은 서로 수천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릴레이식으로 상호협력하여, 장정중 끊임없고, 빠지는 것없이 적군의 모든 전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1935년 가을, 홍1방면군은 먼저 섬북에 도착한다. 전신정찰방면에서 제4방면군과의 상호협력관계에 약간 변화가 온다. 나중에 홍4방면군은 사천서부에서 북상하여 낮에는 무선통신부대가 행군을 하고, 다시 제1방면군의 무선통신부대가 적군의 암호통신을 해독하여 다시 제4방면군에 알려준다.

 

중앙홍군의 장정때, 홍6군단에도 무선방송부대가 하나 있었다. 전후로 제1,제4방면군의 무선통신부대와 연락을 유지했다. 그리고 정보를 공유했다. 장강이북에서 활동하던 홍25군은 무선통신부대가 없었다. 중공중앙이 섬북에 도착하기 전에, 그들은 중앙과의 연락을 교통원에 의존했다. 한번 떠나면 몇 달이다. 의사소통이 아주 곤란했다. 모택동이 섬북에 도착한 후, 홍25군과 섬북홍군이 합병된 홍15군의 수장 서해동(徐海東)을 만났을 때 즉시 그에게 무선통신설비를 하나 분배해준다. 이렇게 하여 각지의 주력홍군은 모두 무선통신부대를 갖게 된다. 모두 전신연락과 적군에 대한 정찰을 실시할 수 있게 된다.

 

장정때 무선통신으로 암호를 해독한 무명영웅은 군위2국 국장 증희성외에 홍1방면군의 무선통신부대장 왕쟁(王錚), 홍4방면군의 송간부, 왕자강(王子綱)등의 사람들이 있다. 홍4방면군의 암호해독전문가 채위(蔡威)는 장정때 병을 앓으면서 업무를 했다. 들것에 들려 초지로 나왔을 때 병사한다. 총사령부의 지도자는 매우 슬퍼하며 말한다: "우리는 고귀한 한 쌍의 눈을 잃었다." 비밀유지때문에, 198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채위의 복건 고향집에 그의 영웅적인 사적을 알려준다. 그리고 감숙에 묻혀 있는 유해를 고향으로 옮겨가 융중하게 안장한다.

 

홍군장정 내지 전체 중국혁명전쟁에서 공산당은 국민당의 내부사정을 대부분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국민당은 공산당의 행동에 대하여 거의 몰랐다. 모택동은 장정때 군위2국 국장을 지낸 증희성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증희성 동지는 '유리잔'을 만들었다. 우리는 장개석과 싸우면서, 마치 유리잔 속의 주사위를 보는 것처럼 정확히 볼 수 있어서, 이길 수 있었다.

 

장정때, 국민당군의 암호를 홍군이 해독할 수 있었지만, 홍군의 암호는 적군이 해독할 수 없었다. 당시 홍군의 무선통신부대에 한가지 기본요구사항이 있었다: "사람이 있으면 암호도 있고, 사람이 죽으면 암호도 없다." 위급한 순간에, 먼저 무선통신설비를 파괴하고, 암호를 훼손한다. 예를 들어, 중앙소비에트구가 함락될 때, 홍10군단이 회옥산에서 패배했을 때, 기요인원은 일체의 기밀을 훼멸시켜 버린다. 희생하더라도 누설하지 않았다. 국민당군대는 홍군에 사단이 통채로, 여단이 통채로 궤멸당할 때, 무선통신설비와 암호가 함께 홍군에 탈취당하는 경우가 여러번 발생하고, 무선통신인원도 교육을 받은 후 홍군에 참가하곤 했다.

 

전신기밀유지문제에서, 국민당군의 효율저하는 충분히 드러난다. 1931년 4월, 중공중앙에서 보위업무를 책임진 고순장이 체포되어 배신한다. 국민당특무두목 서은증은 가신의 비서 전장비(錢壯飛)가 공산당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의 암호가 모조리 해독되었다는 것도 알았다. 서은정은 장개석이 그의 용인실찰(用人失察)을 추궁할까 두려워, 여러해동안 동료들과 결탁하여 공동으로 암호가 이미 해독되었다는 사실을 숨긴다. 장개석은 대륙에서 패배하고 1975년에 죽을 때까지, 이 일의 진상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