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봉황망역사
1949년 8월, 귀양(貴陽) 검령산(黔靈山) 아래의 기린동(麒麟洞)의 한 은밀한 사합원에서 머리카락이 절반은 하얗게 변한 전 국민당서북군장령이자 '서안사변'의 발기인중 한명인 양호성 장군이 허리를 구부리고, 어린 딸을 안고, 노인의 걸음걸이로 집안으로 가서 한켠의 돌로만든 책상에 기대어 천천히 돋보기안경을 쓰고, 느긋하게 손에 든 신문을 펼치고서 조용히 읽어내려갔다. 그는 이미 장개석에게 연금된지 12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죄악의 마조(魔爪)가 그를 향해 뻗어지고 있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1. 장개석은 그를 '원흉'으로 생각했다.
양호성은 중경에서 비밀리에 귀양으로 옮겨지고나서 그는 세상과는 격리된 이 '야랑지국'에서 감금되어 있은지 이미 7개월여가 되었다. 12년의 감금으로 양호성은 일찌감치 당녕의 융마공총(戎馬倥傯), 정전사방(征戰四方)의 호기와 패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하루종일 부인의 유골함을 친구삼아 무관 한 쌍의 자녀를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신문을 통하여 양호성은 이미 시국의 변화를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마음 속에서 치열한 열망이 일어나고 있었다. 신문에는 장개석이 어떻게 광주에서 중경으로 정부를 이전했는지, 신문에는 황당한 말들이 많았다. 눈치있는 사람은 신문의 글만 보아도 장개석이 이미 궁지에 몰려 있어, 대서남을 빌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대, 그를 지키고 있던 군통조장이자 전 중경 백공관감옥장인 장곡(張鵠)이 웃음을 띄며 다가왔다.
"노선생, 위원장은 이미 군정계통을 모조리 중경으로 옮겼습니다. 그곳에는 8만명의 환영인파가 위원장께서 다시 배도(陪都, 중경)로 돌아온 것을 환영했고, 당과 국가의 상하는 한마음으로 뭉쳐서, 제2의 항전의 결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노선생은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양호성은 신문을 내려놓고, 눈을 들어 안개가 가득 끼어있는 하늘을 바라보고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대답했다: "날씨가 정말 이상하다. 중경이라면 더워서 죽을 지경일텐데, 하필 귀양에 와 있으니, 여기서는 봄,가을을 보내는 것같다. 아침 저녁으로는 약간 차갑다."
말을 하면서, 양호성은 몸을 일으켜 곁에서 혼자 놀고 있던 어린 딸을 불렀다. 감금생활은 그를 이상하게 민감하고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시국 특히 장개석 개인에 대하여 그는 절대로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장곡은 조용히 돌아간다.
장곡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양호성은 어린 딸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만일 아빠가 죽으면, 너는 어떡한단 말인가?" 어린 딸은 치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울지 마세요. 나중에 루리 포성(蒲城)의 고향집으로 돌아가요." 어린 딸의 이름은 양증귀(楊拯貴)였다. 그의 후처인 사보정(謝葆貞)이 1941년 그와 함께 식봉(息烽)에 갇혀 있을 때 낳았다. 그녀는 감금생활을 보내는 양호성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양호성과 장학량은 1936년 12월 "서안사변"을 일으킨다. 완고하게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외적을 물리치려면 반드시 먼저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 정책을 완고하게 고집하던 장개석에게 병간(兵諫)을 하며, 그들의 항일구국주장을 펼친다. "서안사변"이 평화롭게 해결된 후, 장학량은 10년유기징역을 받고, 양호성은 비록 잠시 도망쳐서 처벌은 면했지만, 병권을 내놓아야 했고, 부인과 어린 아들 및 수행원을 데리고 "해외시찰"을 나가야만 했다.
누가 알았으랴. 그가 국내로 귀국하자 마자, 장개석은 아무런 이유없이 그를 구금했고, 10여년에 걸친 죄수생활동안, 양호성부부와 어린아들, 그리고 옥중에서 태어난 어린 딸은 대부분의 시간을 귀주의 깊은 산 속에 있는 식봉에서 감금상태로 보내게 된다.
장개석은 고집스럽게 생각했다. "서안사변"을 일으킨 주요책임은 양호성과 공산당이다. 장학량은 그저 "나이가 어려서 잘 알지 못해, 잠롯된 길로 들어섰고, 다른 사람에게 속아서 미혹된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장개석의 마음 속에 양호성이 '원흉'이었다. 그는 반드시 양호성을 죽여야 시원할 정도이다.그러나 내외의 여론때문에 시종 손을 쓰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서안사변"후, 17로군은 이미 건제가 무너져서, 새로 재편되었다. 그러므로, 양호성의 처지는 특히 어려웠다. 3명의 나이가 비교적 많은 딸은 공산상에 의하여 적당히 안배되었지만, 어린아들 양증중(楊拯中)과 어린 딸 양증귀는 감옥에서 나오지를 못했다.
항전승리후 다음 해에 식봉 집중영은 해산된다. 모조리 중경으로 옮겨갔다. 과거의 흉신악살같던 특무들도 갑자기 웃는 얼굴로 "노선생"이라고 불렀고, "곧 졸업하시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희망에 가득차서 중경으로 갔지만, 그는 가락산 국민당 중미특종기술합작소로 보내어져 단독구금된다.
양호성은 실망한 나머지, 하루종일 장탄식만 했다. 부인 사보정은 더더욱 화를 가누지 못했고, 자주 장개석은 전무심간(全無心肝)하고, 특무들은 사람도 아니라고 욕을 했다. 1년후 사보정은 울분으로 옥중에서 서거한다.
2. 이종인의 석방은 물거품이 되다.
1949년 1월, 장개석은 내외로 곤경에 빠져서 어쩔 수 없이 은퇴하고, 이종인(李宗仁)이 '대총총(代總統)'에 오른다.
오로지 "획강이치(劃江而治)"를 추구했던 이종인은 평화회담의 성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취임하자마자 구금중인 정치범을 석방하겠다고 발표한다. 그는 즉시 장학량, 양호성 두 장군을 석방하는 문서에서명한다.
그러나, 기자들이 양호성이 옥문을 나서는 주요뉴스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즉시 중경시특별정부에 문의한다. 시장인 양삼(楊森)은 전혀 모르는 척 했다. 계속 추궁을 당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정말 너무나 억울하다. 나는 시장으로 사람을 풀어주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양호성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도 나는 모른다."
실제로 양삼은 양호성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알았다. 양삼은 일찌감치 전군(滇軍)에 투신하여, 사천군벌로서 장개석에 의탁하여 신임을 얻었다. 그와 같은 인물이 이종인의 명령에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누가 사람을 풀어주는가?" 기자들이 계속 추궁하자. "서남군정장관공서 제2처이다."라고 양삼은 답을 한ㄴ다.
이 제2처는 실질적으로 군통 서남참이고, 참장은 바로 살인마두 사원거(徐元擧)였다. 기자가 계속 그에게 추궁하자, 그는 모인봉(毛人鳳)이 나서야 되고,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는 자신도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모인봉은 이 때 상해에 있는 조카 모삼(毛森)의 공관에 숨어 있었다. 이종인은 모인봉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보밀국장 서지도(徐志道)을 "사람을 풀어주도록" 보낸다. 서지도는 양호성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를 아예 몰랐다. 그는 답변한다. 안다고 하더라도, 장개석, 모인봉이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으면 사람은 풀려나지 않을 것이라고.
모인봉은 여론에 대응하기 위하여 급히 계구(溪口)의 장개석에게 보고하여 지시를 요청한다. 장개석은 "즉시 양호성을 귀주로 보내라."고 지시한다.
양호성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희망을 품고 있을 때, 간수조장ㅇㄴ 공국언(龔國彦)은 돌연 그에게 귀주로 옮겨야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양호성부자 3명과 비서 송기운(宋綺雲)의 일가 3명은 10여년간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다. 그들은 주양호(周養浩)와 신임간수소장 장곡의 관리감독하에, 군통에 의해 비밀리에 귀양 검령산 아래의 기린동으로 옮겨진다.
1949년 8월의 어느 날, 장개석은 광주에서 비행기로 중경에 간다. 8만영의 환영인파도 내버려두고 밤에 임원(林園)으로 들어가 모인봉을 부른다.
"양호성은 어디에 있는가?" 장개석은 맹물을 한 잔 집어들면서,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물었다.
모인봉이 황급히 답변한다: "비직(卑職)은 위좌(委座, 위원장님)의 의견에 따라, 이미 귀양으로 옮기도록 조치해놓았습니다."
"이...중미특종기술합작소에는 몇명의 난당분자를 감금하고 있는가?" 장개석이 다시 묻는다.
"총재에게 보고드립니다." 모인봉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며 대답한다: "약 450명입니다."
모인봉은 어떻게 처리할지를 물었다. 장개석은 손을 내두르며 말한다: "모조리 죽여라. 한명도 남기지 말고."
"그럼 양호성은 어떻게 합니까? 언제 그를 대만으로 보낼까요. 장부좌(張副座, 장학량)도 보내지 않았습니까."
장개석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화를 내며 말한다: "이 자는 일찌감치 죽여버려야 했다. 살려둬서 뭐하겠는가."
3. 삼마두 밀모암살계획
모인봉은 장개석의 뜻을 알아차린다. 8월 27일, 모인봉은 시중심에 있는 군동의 "수려(漱廬)"라는 공관으로 가서 친히 보밀국 서남참 참장 서원거와 생산처 처장 주양호를 부른다. 3사람이 비밀리에 상의하기 시작한다.
모인봉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총재가 어제 저녁에 우리에게 지시했다. 즉시 양호성을 처리하라고. 이 자는 일찌감치 죽여야 했다. 지금까지 남겨둔 것은 그저 골치거리만 늘인 것이다. 어떻게 처리할지, 어떤 수단을 쓸 것인지는 다른 것과 다르다. 반드시 깔끔하게 처리해야 한다."
서원거는 이해를 하지 못하여 묻는다: "양호성을 죽이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관건은 양호성의 두 아들과 비서 일가인데, 어떻게 처리할까요? 종이보자기로 불을 쌀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누설될 것입니다."
"서처장은 걱정이 너무 많군." 모인봉은 입끝을 끌어올려 웃음을 짓고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참초제근(斬草除根). 총재께서는 하나도 남기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남겨두면 나중에 복수하려 하지 않겠는가?"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운 후, 모인봉은 양호성등을 비밀리에 중경으로 불러서 죽이기로 결정한다.
그날 오후, 주양호는 자기구(磁器口)의 집으로 돌아와서 잠시 머문 후, 백공관으로 간다. 그는 백공관에서 행동공작을 한 바 있는 간수장 육경청(陸景淸),양가산(楊家山)등을 불러서 밀담을 나눈다. 양가산은 즉시 사재동(渣滓洞) 간수장 양진흥(楊進興), 안문방(安文芳), 양흠전(楊欽典)의 세 사람을 부른다. 음험하고 악독한 암살계획이 이렇게 마련된 것이다.
주양호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즉시 모인봉에게 보고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모인봉은 주양호에게 이 3명을 군통의 조석장판사처의 예당으로 불러오게 하여 친히 접견한다.
주양호는 양진흥등 3명을 지정된 장소로 데려간다. 모인봉은 양진흥등과 악수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무다가, 장중하게 말한다: "오늘 너희들을 부른 것은 하나의 아주 중요한 임무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 몇몇 중요인물을 제거하는데 절대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 누설되어서는 안된다. 행동시 비수를 사용하고 절대로 총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소리가 나와서 목표를 노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자리에 있던 양진흥등 3명을 둘러본 후, 더욱 강하게 말한다: "일이 끝난 후, 논공행상을 할 것이다. 실패하면, 가법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
1949년 9월 1일, 귀주 기린동. 오후에 낮잠에서 일어난 후, 양호성은 평상시대로 문앞의 원탁에 앉았고, 그날의 신문을 보았다. 돌연 급한 발걸음이 다가왔다. 온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띄고 말했다: "노선생 경하드립니다."
양호성은 눈을 들어보니, 그를 관리감독하는 특무조장 장곡이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신문을 내려놓았고, 얼굴은 굳어있었다.
장곡은 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시 한걸음 앞으로 나가서 포권하며 말했다: "노선생은 다시 자유를 얻으셨습니다. 주양호 처장이 이미 위원장의 지시를 받아왔습니다. 노선생을 만나서 석방절차를 진행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양호성은 그 말을 듣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함참이 지나서야 조용히 묻는다: "주처장이 귀양에 왔는가?"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장곡은 한편으로 대답하면서 한편으로 양호성의 시선을 숲에서 멀지 않은 곳의 돌계단으로 이끌었다.
한무리의 사람들이 몸매가 가는 30여세의 젊은이들 모시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코끝에 그에게 익숙한 금테안경을 끼고 있었으며, 참신한 황색군간편복의 넥타이위로 매화금성(梅花金星)이 반짝이고 있었다.
온 사람이 바로 주양호이다. 양호성은 군통특무를 극히 미워하고 싫어했다. 오로지 이 절강 수향에서 오고, 상해대학 법률계를 졸업한 군통소장에게만은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양호성이 어찌 알았으랴. 주양호는 살인으로 더욱 유명했고, 막을래야 막을 수도 없었다.
"양장군", 주양호는 자리에 앉은 후, 진심을 담은 표정을 하고, 담배를 하나 꺼내어 불을 붙이고 깊이 들이마신다. "당신을 석방한다는 소식은 확실한 것입니다. 이것은 위원장의 지시입니다. 먼저 당신을 중경으로 모시고 간다음 그곳에서 그가 당신을 만날 것입니다. 형식적인 절차를 끝내고 대만으로 다시 갑니다. 당연히 서안은 여러분이 돌아갈 수 업습니다. 그러나, 차선을 선택하십시오. 대만도 괜찮습니다. 당과 국가의 중요한 기구, 고관대작은 모두 그곳으로 갔습니다. 당신이 자유를 얻은 것이 가장 기쁜 일이 아닙니까. 먼저 축하드립니다."
"대만으로 반드시 가야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양호성이 의문을 나타냈다.
"그건 분명합니다." 주양호는 두 손을 펼쳤다. "만일 중경에서 당신에게 자유를 회복시켜드리면, 당신을 어떻게 안치하겠습니까. 위원장이 당신을 공산당쪽에 보내겠습니까? 대만으로 보내야만이 이 일을 처리하기 좋습니다. 한마디 더 말씀드리면 대만에서 당신이 자유를 회복하더라도, 당신은 기껏해야 우동(寓公)으로 지내셔야 합니다. 숲과 샘을 친구삼아 세상일은 간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위원장께서 안심하실 겁니다."
이렇게 하여, 9월 5일, 양호성은 희망을 가득 품고 자녀, 부하를 데리고 주양호와 함께 귀양을 떠난다.
4. 죄악이 비수가 장군을 향하다.
다음 날 정오, 양호성을 암송하는 차량행렬이 중경의 교외에 있는 송패(松壩)에 도착한다. 일생은 간단히 점심식사를 한다. 주양호는 아직 날이 밝아서, 밤에 도강하려는 계획을 실시하기 어렵게 되자, 그는 양호성에게 송패의 소객참내에서 잠시 쉬도록 권한다. 낮에 시내에 들어가면 여러가지 불편한 점이 있을 것이라고. 양호성도 그 말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여 동의한다.
주양호는 그들이 쉴 수 있게 어레인지한 후,즉시 승용차를 타고, 바람처럼 번개처럼 중경시내를 질주한다. 양호성 일행으 차량 2대는 남겨놓고. 오후 7시, 주양호는 중경시에서 8킬로미터 떨어진 해당계(海棠溪)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그는 오랜 시간 기다려온 암살을 시행하는 행동조장 양진흥을 만난다. 주양호는 차에서 내린 후, 피로한 얼굴을 하였다. 양진흥이 그에게 다가와 모인봉이 쓴 쪽지를 전해준다. 위에는 간단하게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양호형(養浩兄). 모인(某人)은 양진흥 동지에게 이끌고 중경으로 돌아오게 임무를 맡겼으니, 형은 먼저 강을 건너서 집으로 돌아가 휴식하세요."
주양호는 아무런 표정변화없이 쪽지를 받아들고 양진흥에게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차에 오른다. 그리고 먼저 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간다.
깊은 밤에 강을 건너고 약 1시간후, 자동차는 가락산 자락에 섰다. 접대를 담당하는 몇명의 특무가 공손하게 그를 위해 차문을 열어준다. 그리고 양호성을 부축하며 산위의 그림자가 보이는 서양식 작은 건물을 가리킨다: "주임께서는 잠시 대공사(戴公祠)에서 이틀간 머무시지요. 한편으로 위원장과의 접견을 기다리고, 다른 한편으로 비행기로 대만으로 가는 것을 기다리시면서."
대공사는 원래 항전초기, 대립이 장개석에게 잘보이기 위하여 지은 방공별장이었다. 두 명의 특무가 좌우에서 양호성을 부축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고양이허리를 하고 앞에서 길을 인도했다. 아들, 막 스무살이 지났지만 머리카락은 하얗게 센 양증중이 허리를 굽히고, 모친 사보정의 유골함을 받들고, 가파른 돌계산을 따라 부친의 뒤를 가쁜 숨소리를 내며 뒤따랐다.
양증중은 모친의 유골함을 안고 계단 옆의 집으로 들어간다. 이때 일찌기 그곳에 매복하고 있든 양진흥, 웅상(熊祥), 왕소산(王少山), 임영창(林永昌)등 4명이 암살자가 칼을 손에 쥐고 두 조로 나뉘어 건물 위와 아래의 방안에 숨어 있었다.
왕소산과 임영창은 양증중이 문안으로 들어오는 틈을 타서 돌연 튀쳐나가 손에 쥔 날카로운 칼을 양증중의 허리를 향하여 찔러간다. "아빠!" 비명소리와 더불어 그는 땅바닥에 쓰러진다. 선혈이 모친의 유골함 위에 뿌려진다.
양호성은 아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급히 고개를 돌려 살펴본다. 양진흥과 웅상은 한 명은 앞에서 한 몇은 뒤에서 두 개의 날카로운 칼로 그의 가슴을 찌른다. 양호성은 "아이쿠" 하는 소리를 내며 땅 바닥에 쓰러진다. 두 조의 암살조는 말도 없이 앞으로 다가가서 칼로 몇 번을 더 찌른다. 그후에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묻은 피를 닦고 산을 내려가 보고하러 간다.
이어서 압송되어 온 세번째 차량이 도착한 후, 비서 송기운과 부인 서림협(徐林俠), 그들의 아들 송진중(宋振中), 양호성 장군의 어린 딸 양증귀는 경위실로 모셔진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몇몇 암살단이 피비린내나는 칼을 들고 방안으로 뛰어든다. 송기운은 그제서야 분명히 알았다.그는 급히 소리지른다. "중국공산당만세"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암살자는 그에게 뛰어들고 한칼로 그의 가슴을 찔러버린다. 송부인 서림협은 특무들에게 두 어린아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특무들이 그녀의 말에 신경이나 쓰겠는가. 한컬로 서림협을 찔러버린다. 부부는 모두 핏물속에 쓰러진다.
두 아이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금방 두 아이도 칼에 찔려 숨을 거둔다.
암살조는 모두 죽인 후, 칼에 묻은 피가 굳기도 전에 산을 내려가서 술과 고기를 먹는다. 그뿐아니라, 그들은 양호성이 가지고 있던 돈과 재물도 나누어가진다. 이들에게 밥을 해준 사람도 양장군 딸의 은패를 하나 받는다. 그 은패의 앞면에는 "장명부귀(長命富貴)"라고 적혀 있고, 뒷면에는 "양선생여공자쌍월기념(楊先生女公子雙月記念), 장지과(張止戈)"라는 14자가 쓰여있었다. 이것은 양호성의 딸이 두달이 되었을 때, 식봉의 특무조장이 기념으로 준 것이다. 불행히도 이제 다시 마장에 다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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