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송나라때의 관직명칭

중은우시 2013. 5. 4. 01:16

글: 이개주(李開周)

 

양회기간동안 정협위원은 기구명칭에 대하여 열띤 토론을 펼쳤다. 어떤 새로운 부서는 명칭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우기도 어렵고, 공간도 많이 차지한다는 것이다. 네티즌들은 바로 더욱 길고 더욱 외우기 어려운 기구명칭들을 발굴해냈다. 예를 들어, "광서장족자치구종합치리위원회형만석방해제노교인원안치방교공작협조소조판공실". 모두 37자이다. 폐활량이 크지 않으면 한번에 읽어내기도 어렵다. 심지어 더욱 긴 것도 있다. 예를 들어, "호북성추진무한성시권전국자원절약형및환경우호형사회건설종합배투개혁시험구건설영도소조판공실" 모두 45자이다. 읽기전에 미리 숨을 한번 내쉬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스스로 숨막혀 죽을 것이다.

 

이렇게 길다란 기구명칭을 찾아낸 후, 어떤 친구는 요즘이 옛날만 못하다고 탄식을 쏟아냈다. 현대인들은 고대인들처럼 간결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기구명칭의 측면에서 보면 고대인들이 확실히 간결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명청 양조의 예부(禮部)는 문화사업과 교육업무를 책임지는 동시에 제사와 외빈접대를 책임지는 중앙기관이다. 현재라면, 이런 기관의 이름은 최소한 "국가제사및문화교육부"정도가 될 것이다. 동시에 다시 아마도 "외교부예빈사"라는 간판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인들은 단지 "예부"라는 두 글자로 개괄했다.

 

그러나, 고인들도 간결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송날대, 각급간부의 관직명칭은 아주 번잡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청백리 포청천 포증(包拯)은 사망하기 전의 관직이 "추밀부사조산대부급사중상경거도위동해군개국후식읍일천팔백호실봉사백호사자금어대증예부상서(樞密副使朝散大夫給事中上輕車都尉東海郡開國侯食邑一千八百戶實封四百戶賜紫金魚袋贈禮部尙書)"로 모두 45자이다. 본문의 앞부분에서 얘기한 "호북성추진무한성시권전국자원절약형및환경우호형사회건설종합배투개혁시험구건설영도소조판공실"과 같은 수이다. 누가 더하고 덜하고를 따지기 어려울 정도이다.

 

송나라때, 특히 북송전기에 포증과 같이 길다란 관직명칭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교과서에서 보아왔던 그 물항아리를 깨서 친구를 구한 사마광(司馬光) 선생은 만년에 힘들게 역사거작 <자치통감>을 써서 송영종에게 바칠 때, 이렇게 길다란 관직명칭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단명전학사겸한림시독학사태중대부제거서경숭산숭복궁상주국하내군개국공식읍이천육백호식실봉일천호사자금어대신사마광(端明殿學士兼翰林侍讀學士太中大夫提擧西京嵩山崇福宮上柱國河內郡開國公食邑二千六百戶食實封一千戶賜紫金魚袋臣司馬光)". 여기서 '신사마광'을 빼더라도 앞의 관직명칭만 52자에 달한다. 포증의 관직보다도 길다.

 

금년의 양회에서 기자가 새로운 부서의 이름이 왜 이렇게 긴지 물어보았을 때, 중앙기구편제위원회판공실의 한 책임자는 이렇게 답했다: "신부서의 이름은 비교적 길다. 그러나 단축시킬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어느 한 글자를 빼버리면 정확하고 완전하게 우리의 새로운 기구의 직책범위를 표현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만일 현재의 기자가 만일 시공을 초월하여, 송나라로 가서 포증과 사마광을 인터뷰한다면, 그들에게 관직을 짧게 해줄 수 없느냐고 물을 때, 아마도 그들도 더 이상 단축시킬 수 없다. 만일 하 ㄴ글자를 빼버리면 정확하고 완전하게 우리의 신분지위와 직책범위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먼저 포증의 관직인 "추밀부사조산대부급사중상경거도위동해군개국후식읍일천팔백호실봉사백호사자금어대증예부상서"부터 살펴보자. 이 길다란 관직명칭에서 쓸모없는 글자는 하나도 없다. 앞의 "추밀부사"는 포증의 업무직위를 표시한다. 현재로 따지면 국방부차관과 같은 직위이다; "조산대부"는 포증의 품급을 표시한다. 북송의 전기 공무원은 모두 29등급이 있었고, 조산대부는 제13등급이다; "급사중"은 포증의 급여등급을 표시한다. 북송의 전기 공무원의 급여는 모두 20개 등급으로 나뉘며, 급사중은 제12등급에 속한다. 이 직급의 간부는 매월 4만5천문동전을 받는다; "상경거도위"는 포증이 공로등급을 표시한다. 북송공무원은 모두 12개의 공로등급이 있다. 상경거도위는 그중 제8등에 속한다; "동해군개국후"는 포증의 작위등급을 가리킨다. 북송의 전기고위공무원의 작위는 모두 12등급이 있다. 동해군개국후는 제9등에 속한다; "식읍일천팔백호"는 포증이 명예상의 특권을 보유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 뜻은 조정이 일천팔백호의 농민을 그에게 주어 그가 부리도록 한다는 것이다(실제로 그는 1호도 마음대로 부릴 수 없다); "식실봉사백호"는 포증이 실제로 얻는 복리를 가리킨다. 그가 매월 보조금을 받는데, 이 보조금은 4백호농민이 납부하는 세금이라는 것이다(매호당 일반적으로 25문으로 계산한다. 포증의 실봉400호는 매월 개략 1만문의 보조금을 받는 것이다); "사자금어대"는 포증의 복장등급을 말한다. 그가 조회에 참석할 때, 금색물고기를 수놓은 자색소포(紫色小包)를 걸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3품이상 관리들이 누리는 특수한 대우이다; 마지막으로 "증예부상서"는 포증이 죽었을 때 황제가 추증한 것이다. 황제가 그를 아주 그리워하고 살았을 때 그는 예부상서를 하지 못했으니, 죽어서라도 하라는 뜻이다.

 

사마광의 관직명칭을 보자. "단명전학사겸한림시독학사태중대부제거서경숭산숭복궁상주국하내군개국공식읍이천육백호식실봉일천호사자금어대". "단명전학사"는 직책명이다. 이는 황제의 고급고문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경성의 고관이 은퇴하거나 혹은 장기간 휴가를 갈 때 얻는 명에직책이다; "한림시독학사"도 황제의 고급고문이다. 만일 앞에 "지제고(知制誥)"의 3글자를 붙이면(왕안석의 관직명칭에는 이 세 글자가 추가된 적이 있다) 반드시 황제의 곁에서 계책을 내고 성지를 초안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지제고'가 없으면 그것은 현재 휴가중이거나 이미 은퇴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태중대부"는 품급을 표시하는 관직명칭이다. 사마광의 급별은 "조산대부"보다 두 단계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거서경숭산숭복궁"은 "사록관(祠祿官)"에 해당한다. 이것은 조정이 한관(閑官)에게 주는 허함(虛銜)이다. 출근할 필요는 없지만, 급여는 받는다. 에를 들어, 사마광의 "제거서경숭산숭복궁"은 숭산의 아래 있는 국립도관 숭복궁에 가 있을 필요는 없고, 그저 집에서 글이나 쓰고, 사서나 편찬하면 된다. 매월 재정에서 어느 정도의 돈은 받는다; "상주국"은 최고등급의 공로직함이다. 사마광의 공로가 극히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내군개국공"은 제6등작위이다. 사마광은 '공작'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 몇 개의 관직명칭은 포증과 비슷하다. "식읍이천육백호"는 명예상의 특권이다. "식실봉일천호"는 실제상의 복리이다(사마광은 매월 보조금 2만5천문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자금어대'는 복장등급이다.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송나라관리의 관직명칭이 아주 길고, 특별히 복잡하지만, 이것이 반영하는 정보는 아주 풍부하다는 것이다. 어느 관리가 황제를 만날 때, 비록 황제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더라도, 그가 관직을 읊기만 하면, 황제는 즉시 그가 어떤 품급, 어떤 영예, 어떤 공로, 어떤 작위 그리고 현재 어디서 일하고, 어떤 업무를 책임지는지, 매월 얼마의 돈을 급여로 받아가는지, 얼마의 보조금을 받는지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긴 것은 긴대로 장점이 있다.

 

각도를 바꾸어 보면, 길면 긴대로 단점이 있다. 첫째, 송나라때의 법도를 모르는 현대인에게는 뭐가뭔지 모르게 한다. 심지어 사서를 읽을 때 아주 수준낮은 착오를 일으키게 한다. 에를 들어 필자의 친구중 하나는 소동파(蘇東坡)를 연구하는데, <송사>를 살펴보니 소동파의 첫번째 관직은 "대리평사(大理評事)"였다. 그래서 소동파 선생이 최고법원에서 법관을 지낸 것으로 알았다. 만일 당나라때라면 그의 이해는 정확하다. 왜냐하면, "대리평사"는 바로 "대리시평사(大理寺評事)"의 약칭이기 때문이다. "대리시"는 최고재판기구이니, "대리평사"는 당연히 현재의 최고법원 법관에 해당한다. 그러나 소동파는 송나라의 관리이다. 그의 시대에는 "대리평사"가 대리시로 출근하지 않았다. 그저 막 관직에 들어선 하급관리의 자력을 정하고, 급여를 지급하는 직책일 뿐이었다. 기실 소동파가 관리로 있을 때 관직의 전체명칭은 "장사랑수대리시평사첨서봉상부절도판관청공사(將士郞守大理寺評事簽書鳳翔府節度判官廳公事)"이다. 그중 "장사랑"은 품급을 정하는 것이고, "수대리시평사"는 급여를 정하는 것이며, "첨서봉상부절도판관청공사"야말로 진정한 업무직위이다. 이는 봉상지부(鳳翔知府, 북송전기에는 '지부'라는 관직이없었다. 정확하게 부르는 방법은 '權知鳳翔府'이다)의 조리(助理)이다. 오늘날의 명칭으로 말하자면 섬서성 어느 시의 시장비서인 셈이다. 이를 보면, 송나라의 관직명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조금만 잘못하면 지방관리를 중앙관리로 인식하게 되고, 시장비서를 고위법관으로 이해하게 된다.

 

둘째, 그렇게 긴 관직명칭은 현재 사람에게도 그렇지만, 송나라때 사람들도 읽는데 힘이 들었다. 힘을 덜 들게 하기 위하여 송나라사람들은 약칭을 즐겼다. 예를 들어, 포증의 관직은 그렇게 길지만, 사람들은 그를 "포추밀(包樞密)", "포용도(包龍圖)"(포증은 일찌기 용도각직학사를 지낸 바 있다), "포효숙(包孝肅)"(효숙은 그가 서거한 후 조정이 내린 시호이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소동파가 섬서봉상에서 시장비서로 있을 대 사람들은 직접 그를 "소판관(蘇判官)"이라고 불렀다. 현재 중앙기구편제위원회판공실을 줄여서 "중편판"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약칭으로 부르면 혼동하기 쉽다는 것이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수호전>의 그 화화상 노지심이다. 출가전에 사람들은 그를 "노제할(魯提轄)"이라고 불렀다. 기실 "제할"은 그저 관장한다는 의미이다. 송나라때 여러 관직명칭의 앞에는 모두 "제할"이라는 두 글자가 붙었다; 국고를 장악하는 경관은 "제할좌장고", "제할봉춘하고"가 있고, 공공물자구매를 관장하는 "제할잡매무"도 있다. 이들 관직의 약칭은 모두 "제할"이다. 노지심은 출가전에 감숙성 위주에서 하급무관으로 있었다. 그의 관직의 전체명칭은 "제할위주병갑도적공사(提轄渭州兵甲盜賊公事)"이다. 이는 감숙 평량시의 공안국장에 해당한다.

 

보라. 이렇게 약칭으로 부르니 고귀한 정보가 모두 사라지지 않는가.